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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교회의 균열 시작 – 하나였던 교회가 갈라지기까지의 역사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5.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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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교회의 하나 됨과 다양성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처음부터 하나였습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로마 제국 전역으로 복음을 전파했고, 각지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신앙의 본질에서는 하나였지만, 표현 방식에서는 다양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동방의 그리스어권 교회와 서방의 라틴어권 교회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 속에서 발전했습니다. 동방 교회는 그리스 철학의 영향 아래 신학적 사색과 신비 체험을 강조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콘스탄티노플의 신학 전통은 매우 정교하고 사변적이었습니다. 동방 교부들은 하느님의 초월성과 신비를 강조했고, 인간이 하느님과 하나 되는 신화라는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전례는 화려하고 장엄했으며, 성화와 향, 촛불을 통해 천상 예배에 참여한다는 의식이 강했습니다. 반면 서방 교회는 로마의 법률 전통과 실용 정신을 반영했습니다. 신학은 더 간결하고 실천적이었으며, 죄와 구원, 은총과 자유의지 같은 윤리적 문제에 집중했습니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로 대표되는 서방 신학은 인간의 죄성과 하느님 은총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전례는 동방보다 단순했고, 설교와 교리 교육을 중시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처음에는 상호 보완적이었습니다. 동서방 교회는 서로의 전통을 존중하며 하나의 보편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4세기와 5세기의 세계 공의회들은 동서방 주교들이 함께 모여 신앙을 수호한 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차이들은 점차 갈등의 원인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동서 교회의 균열 시작 – 하나였던 교회가 갈라지기까지의 역사

정치적 분열과 교회의 이원화

동서 교회 분열의 근본 원인 중 하나는 로마 제국의 정치적 분열이었습니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사망 이후 제국은 동서로 영구 분할되었습니다.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여 그리스 문화권을 대표했고, 서로마 제국은 로마를 중심으로 라틴 문화권을 대표했습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동서의 간극은 더욱 벌어졌습니다. 서방은 게르만 부족의 침입으로 혼란에 빠졌고, 교황은 세속 권력의 공백을 메우며 독자적 권위를 확립했습니다. 반면 동로마 제국은 강력한 황제 통치 아래 번영을 계속했고, 교회는 황제의 보호와 통제를 받았습니다. 동방에서는 황제가 교회 문제에 깊이 개입하는 황제교황주의가 발전했습니다. 황제는 공의회를 소집하고, 총대주교를 임명하고 해임하며, 교리 문제에도 관여했습니다. 이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래 전통이었지만, 서방의 관점에서는 교회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서방에서는 교황이 황제로부터 독립된 영적 권위를 주장했습니다. 교황 젤라시우스 1세는 494년 두 칼의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권위가 있는데, 영적 권위인 교황권과 세속 권위인 황제권이며, 영적 문제에서는 교황이 우위에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러한 교회관의 차이는 동서 교회의 근본적 갈등 요소가 되었습니다. 언어 장벽도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시대에는 그리스어가 제국 전역의 공용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방에서는 라틴어가 지배적이 되었습니다. 6세기 이후 동서방 성직자들은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기 어려워졌고, 이는 신학적 오해와 의사소통 단절로 이어졌습니다.

필리오케 논쟁의 발단

동서 교회를 갈라놓은 가장 중요한 신학적 쟁점은 필리오케 문제였습니다. 필리오케는 라틴어로 "그리고 아들로부터"를 뜻하며, 성령이 성부로부터만 발하는지 아니면 성부와 성자 모두로부터 발하는지에 관한 논쟁이었습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확정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은 성령께서 "성부로부터 발하신다"고 명시했습니다. 이는 동서 교회가 공통으로 고백하던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6세기 이베리아 반도의 서고트 왕국에서 아리우스주의와 싸우기 위해 신경에 필리오케를 추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성자의 완전한 신성을 옹호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이 관행은 서방 교회로 퍼져나갔고, 8세기 프랑크 왕국에서 공식화되었습니다. 809년 아헨 종교회의에서 카롤루스 대제는 교황 레오 3세에게 필리오케를 신경에 공식 추가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레오 3세는 신학적으로는 필리오케를 지지했지만, 공의회의 결정 없이 신경을 변경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타협안으로 필리오케 없는 원래 신경을 은으로 만든 판에 새겨 성 베드로 대성전에 걸었습니다. 그러나 프랑크 교회는 필리오케를 계속 사용했고, 점차 서방 교회 전체로 확산되었습니다. 11세기 초 로마도 결국 필리오케를 공식 채택했습니다. 동방 교회는 이를 심각한 신학적 오류이자 교회법 위반으로 간주했습니다. 신학적으로 그들은 성령이 오직 성부로부터만 근원적으로 발한다고 믿었습니다. 성자는 성령을 보내시지만, 성령의 영원한 발출은 성부로부터만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는 삼위일체 내에서 성부의 독특한 위치를 보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포티우스 분열과 첫 번째 위기

9세기 중반 동서 교회는 첫 번째 심각한 분열을 경험했습니다. 858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이그나티우스가 황제 미카엘 3세와 갈등을 빚어 강제로 퇴위당했습니다. 황제는 세속 관리였던 포티우스를 후임 총대주교로 임명했습니다. 포티우스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지만, 평신도에서 일주일 만에 총대주교가 된 그의 임명은 논란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이그나티우스 지지파는 포티우스를 찬탈자로 규탄했고, 교황 니콜라오 1세에게 중재를 요청했습니다. 니콜라오 1세는 강력한 교황 수위권을 주장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플로 보냈지만, 사절들은 현지 상황에서 포티우스를 인정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니콜라오 1세는 이를 거부하고 863년 포티우스를 파문했습니다. 이는 동방 교회에 충격이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로마 교황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포티우스는 반격에 나섰습니다. 그는 867년 로마 교회의 여러 관행들을 비난하는 회칙을 발표했습니다. 주요 비난 내용은 필리오케 추가, 사순절 토요일 단식 금지, 사제 독신제, 견진성사 집전권 등이었습니다. 포티우스는 특히 필리오케를 신경에 추가한 것을 심각한 이단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는 동방 총대주교들을 소집하여 공의회를 열고 교황 니콜라오 1세를 파문했습니다. 이것이 역사상 최초로 동방 교회가 로마 교황을 파문한 사건이었습니다. 다행히 이 분열은 일시적이었습니다. 867년 황제 미카엘 3세가 암살당하고 바실리우스 1세가 즉위했습니다. 새 황제는 포티우스를 해임하고 이그나티우스를 복권시켰습니다. 교황과 콘스탄티노플이 화해했고, 869-870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포티우스가 단죄되었습니다.

불가리아 선교권 분쟁

포티우스 분열의 이면에는 불가리아 선교권을 둘러싼 경쟁이 있었습니다. 불가리아는 발칸 반도의 강력한 국가로, 9세기 중반 기독교 개종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864년 불가리아의 보리스 칸은 비잔티움 제국의 압력으로 동방 정교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보리스는 교회 조직에서 더 많은 자율성을 원했고, 867년 로마 교황에게 사절을 보내 서방 교회로의 전환을 타진했습니다. 교황 니콜라오 1세는 이를 환영하며 라틴 선교사들을 파견했습니다. 불가리아 교회가 로마의 관할 아래 들어갈 위기에 처하자, 콘스탄티노플은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포티우스는 불가리아가 전통적으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의 선교 구역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분쟁은 단순한 교회법적 문제를 넘어 동서 교회의 세력 균형 문제였습니다. 결국 870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불가리아 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 소속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동서 교회의 관할권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났습니다. 유사한 선교권 분쟁은 다른 지역에서도 발생했습니다. 9세기 성 키릴루스와 메토디우스 형제는 슬라브족 선교를 위해 슬라브 문자를 창제하고 전례를 슬라브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들은 교황의 승인을 받았지만, 현지 독일 주교들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독일 선교사들은 라틴어 전례만을 인정했고, 슬라브어 전례를 이단시했습니다. 이는 서방 교회 내부에서도 전례어 문제로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키릴루스와 메토디우스의 업적은 결국 동방 정교회에서 더 크게 인정받았고, 슬라브 정교회 전통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교황 수위권 논쟁의 심화

동서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교회 정치 구조에 대한 이해였습니다. 서방 교회는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 교황이 전 교회에 대해 직접적이고 보편적인 수위권을 가진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황은 단순히 명예상 수위가 아니라 실질적 권위를 가지며, 모든 주교는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5세기 교황 레오 1세 이래 서방의 확고한 전통이었습니다. 반면 동방 교회는 오대 총대주교제를 선호했습니다.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다섯 총대주교가 동등한 권위를 가지며, 로마 교황은 이들 중 명예상 수위일 뿐이라는 입장이었습니다. 중요한 교리 문제는 세계 공의회에서 결정되어야 하며, 어느 한 주교가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교회관의 근본적 차이를 반영했습니다. 서방은 교회를 계층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제도로 이해했습니다.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명확한 권위 체계가 교회의 일치를 보장한다고 믿었습니다. 특히 서로마 제국 멸망 후 혼란한 상황에서 강력한 교황권이 교회를 보호했다는 역사적 경험이 있었습니다. 동방은 교회를 공의회적이고 합의적인 공동체로 이해했습니다. 주교들의 단체성과 지역 교회의 자율성을 중시했습니다. 황제의 소집 아래 열리는 공의회가 최고 권위를 가진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강력한 황제 통치 아래서 교회가 발전했던 동방의 역사적 맥락을 반영했습니다. 10세기와 11세기를 거치며 이 차이는 더욱 벌어졌습니다. 서방에서는 클뤼니 개혁 운동을 통해 교황권이 강화되었습니다. 교황들은 세속 권력의 간섭을 배제하고 교회의 독립성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반면 동방에서는 황제와 총대주교의 공생 관계가 계속되었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로마 교황의 수위권 주장을 더욱 강하게 거부했습니다.

1054년 대분열의 비극

11세기 중반 동서 교회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1054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우스와 교황 사절 움베르토 추기경 사이의 충돌이 결정적 분열로 이어졌습니다. 케룰라리우스는 강력하고 자존심 강한 인물로,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1053년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라틴 예배당들을 폐쇄하고, 누룩 없는 빵으로 성찬례를 거행하는 서방 관행을 비난했습니다. 동방 교회는 전통적으로 누룩 든 빵을 사용했고, 이를 중요한 신학적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교황 레오 9세는 화해를 시도하며 움베르토 추기경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움베르토는 외교적 자질이 부족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오만하고 타협 불가능한 태도로 협상에 임했습니다. 케룰라리우스도 마찬가지로 완고했습니다. 양측은 서로를 이단으로 비난했습니다. 협상은 결렬되었고, 1054년 7월 16일 움베르토 추기경은 성 소피아 대성당의 제단 위에 케룰라리우스와 그 지지자들을 파문하는 교서를 놓고 떠났습니다. 케룰라리우스는 즉각 반응했습니다. 그는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교황 사절들을 파문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케룰라리우스는 교황 자신은 파문하지 않고 사절들만 파문했습니다. 실제로 교황 레오 9세는 이미 그해 4월에 사망했고, 움베르토의 사절권은 법적으로 무효였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상징적으로 동서 교회의 공식 분열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역설적으로 1054년 당시에는 이것이 영구적 분열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과거에도 동서 교회 사이에 일시적 분열이 여러 번 있었고, 결국 화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정치적 상황, 십자군 전쟁의 여파, 상호 불신의 누적으로 인해 간극은 메워지지 않았습니다.

분열의 깊어짐과 화해의 어려움

1054년 이후에도 동서 교회의 완전한 단절은 즉각적으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여전히 교류가 계속되었고, 일부 신학자들은 화해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11세기 말부터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동서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악화시켰습니다. 1096년 시작된 제1차 십자군은 처음에는 동로마 제국과 협력했지만, 곧 불신과 갈등이 생겼습니다. 십자군 지도자들은 비잔티움의 복잡한 외교를 배신으로 간주했고, 비잔티움인들은 십자군의 야만성과 약탈을 두려워했습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약탈은 치유 불가능한 상처를 남겼습니다. 예루살렘을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출발한 십자군이 그리스도교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고 약탈한 것입니다. 성 소피아 대성당이 모독당했고, 수많은 성물과 예술품이 약탈되었으며, 수만 명이 학살당했습니다. 라틴 제국이 세워지고 콘스탄티노플에 라틴 총대주교가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동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군이 이슬람보다 더 위험한 적임을 각인시켰습니다. 13세기와 14세기에도 교황들은 여러 차례 동서 교회 일치를 시도했습니다. 1274년 리옹 공의회와 1439년 피렌체 공의회에서 일치 선언이 있었지만, 동방 교회의 일반 신자들과 수도자들이 거부하여 실패했습니다. 특히 피렌체 공의회 이후 동방에서는 "터키인의 터번이 교황의 삼중관보다 낫다"는 극단적 반서방 정서까지 나타났습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에 함락되면서 동로마 제국은 멸망했습니다. 동방 정교회는 이슬람 통치 아래 들어갔고, 서방과의 교류는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러시아 정교회가 동방 정교회의 중심으로 부상했지만, 모스크바는 스스로를 제3의 로마로 자처하며 서방 로마와의 연결을 거부했습니다.

분열의 유산과 현대의 에큐메니즘

동서 교회의 분열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입니다. 하나였던 교회가 둘로 나뉘어 천년 가까이 단절된 상태로 지냈습니다. 이 분열은 단순히 제도적 분리를 넘어 신학적, 영성적, 문화적 차원에서 동서 그리스도교 세계를 분리시켰습니다. 서방 가톨릭 교회는 교황 중심의 중앙집권적 구조를 발전시켰고, 스콜라 신학과 법률적 사고를 정교화했습니다. 동방 정교회는 전통과 전례를 중시하는 보수적 영성을 유지했고, 신비 신학과 성화 공경을 강조했습니다. 두 전통은 각자의 길을 걸으며 풍부한 유산을 남겼지만, 그리스도께서 원하셨던 교회의 일치는 깨졌습니다. 20세기 들어 화해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습니다.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가 예루살렘에서 역사적 만남을 가졌습니다. 1965년 양측은 공동 선언을 통해 1054년의 상호 파문을 철회했습니다. 이는 상징적이지만 중요한 화해의 몸짓이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동방 정교회를 분리된 형제 교회로 인정하고, 그들의 성사와 전통의 유효성을 확인했습니다. 공의회는 동방 교회가 사도 시대부터 이어온 정통 교리와 성사를 보존하고 있으며, 비록 완전한 일치는 아니지만 진정한 교회임을 선언했습니다.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동방 정교회와의 대화를 적극 추진했습니다. 그는 교회가 두 개의 폐로 숨 쉬어야 한다며, 동방 전통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1995년 회칙 "하나 되게 하소서"에서 그는 교황직이 일치의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되며, 교황 수위권의 행사 방식을 재검토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도 2014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와 예루살렘에서 만나 1964년 만남 50주년을 기념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완전한 일치는 요원합니다. 교황 수위권, 필리오케, 성체성사의 빵 문제, 이혼과 재혼에 대한 태도 차이 등 신학적 쟁점들이 남아있습니다. 정치적 긴장도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동방 가톨릭 교회 문제는 러시아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 사이의 주요 갈등 요인입니다.

역사적 사건 연표

연도 사건 내용 의미
395년 로마 제국 동서 분할 테오도시우스 1세 사망 후 영구 분할 동서 교회 분리의 정치적 배경
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 오도아케르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폐위 동서 정치적 분리 심화
494년 젤라시우스 1세 두 칼 이론 영적 권위와 세속 권위의 구분 제시 서방 교회관의 기초
6세기 필리오케 추가 시작 이베리아 반도에서 신경에 필리오케 추가 신학적 갈등의 씨앗
726-787년 성상 파괴 논쟁 동로마 황제들의 성화 금지, 제7차 공의회 복원 동서 신학적 긴장 증가
800년 카롤루스 대제 대관식 교황이 프랑크 왕에게 황제관 수여 서방의 독자적 제국 형성
809년 아헨 종교회의 필리오케 공식 채택 시도 동방의 강력한 반발
858-867년 포티우스 분열 포티우스와 니콜라오 1세의 상호 파문 최초의 심각한 동서 분열
864-870년 불가리아 선교권 분쟁 불가리아 교회 관할권 다툼 세력권 경쟁 표면화
863년 키릴루스와 메토디우스 슬라브 문자 창제, 슬라브어 전례 동방 슬라브 교회 발전
1054년 7월 16일 대분열 케룰라리우스와 움베르토의 상호 파문 공식적 동서 교회 분열
1096-1099년 제1차 십자군 동로마와 십자군의 협력과 갈등 동서 불신 증가
1204년 콘스탄티노플 약탈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공격 화해 불가능한 상처
1274년 리옹 공의회 일치 시도, 동방에서 거부 일치 실패
1439년 피렌체 공의회 일치 선언, 동방 신자들 거부 일치 재실패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오스만 투르크의 비잔티움 정복 동방 교회 고립
1964년 예루살렘 만남 바오로 6세와 아테나고라스 역사적 만남 화해의 시작
1965년 상호 파문 철회 1054년 파문 공식 취소 화해의 상징적 조치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동방 교회를 분리된 형제로 인정 에큐메니즘의 신학적 기초
1995년 회칙 하나 되게 하소서 요한 바오로 2세의 일치 촉구 교황직 재검토 제안

참고 문헌 및 사이트

스티븐 런치먼 (2021). 『동서 교회 분열사』. 서울: 은성출판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22). 『동방 교회의 역사와 전통』. 서울: 한국교회사연구소.

티모시 웨어 (2020). 『정교회란 무엇인가』. 서울: 은성출판사.

요한 마이어도르프 (2019). 『비잔티움 신학』. 서울: 분도출판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2018). 『동방 가톨릭 교회 교령』.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2019). 『회칙 하나 되게 하소서』.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가톨릭대사전 편찬위원회. 『가톨릭대사전』. https://www.catholic.or.kr

한국천주교주교회의. https://www.cbck.or.kr

바티칸 공식 홈페이지. https://www.vatican.va

콘스탄티노플 세계 총대주교청. https://www.ec-patr.org

New Advent Catholic Encyclopedia. https://www.newadven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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