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초 유럽은 혼란의 시대였어요. 이단이 만연하고, 사람들은 진리를 찾아 방황했으며, 교회는 신뢰를 잃어가고 있었죠. 바로 이 시기에 한 스페인 청년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어요. 그의 이름은 도미니코, 평생을 설교와 가르침에 바친 진리의 사도였죠. 성 프란치스코가 가난과 단순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성 도미니코는 지성과 말씀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일깨웠어요. 그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복음 말씀을 삶으로 살았던 사람이에요. 오늘은 설교자 수도회를 창립하고, 묵주기도를 보급하며, 지성과 신앙의 조화를 추구했던 성 도미니코의 삶과 영성을 함께 들여다보려고 해요.

카스티야의 젊은 신학자
1170년, 스페인 북부 카스티야 지방의 작은 마을 칼레루에가에서 도미니코가 태어났어요. 그의 가문은 귀족 출신이었지만 부유하지는 않았죠. 어머니 후아나는 매우 경건한 여성이었고, 도미니코가 태어나기 전 꿈에서 횃불을 입에 물고 세상을 밝히는 개를 보았다고 해요. 이 꿈은 나중에 도미니코가 설교로 세상을 밝힐 것을 예언한 것으로 여겨졌답니다. 어린 시절부터 도미니코는 학문에 뛰어났어요. 그는 7세부터 숙부인 신부님께 교육을 받았고, 14세에 팔렌시아 대학에 입학했죠. 당시 팔렌시아 대학은 스페인 최고의 학문 중심지였어요. 도미니코는 그곳에서 6년간 인문학을, 4년간 신학을 공부했답니다. 그의 학업 성적은 탁월했고, 특히 성경 연구에 깊이 몰두했어요. 하지만 그는 단순히 머리로만 공부하는 학자가 아니었어요. 어느 해 대기근이 들었을 때, 도미니코는 자신의 귀중한 책들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도왔죠. 동료들이 의아해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죽은 양피지를 공부하느니, 살아있는 사람의 살을 연구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이 일화는 그의 학문이 단순한 지식 축적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과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줘요.
오스마의 참사 사제, 사도적 삶의 시작
1195년, 25세의 도미니코는 오스마 대성당의 참사회원이 되었어요. 참사회원은 성당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전례와 기도를 책임지는 성직자들이죠. 오스마의 주교 디에고는 아우구스티노 규칙에 따라 참사회원들이 청빈과 공동체 생활을 실천하도록 개혁했어요. 도미니코는 이 공동체에서 9년간 생활하며 기도와 공부, 금욕의 생활을 익혔답니다. 그는 매일 밤 성당에서 기도했고, 성경을 깊이 묵상했으며,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어요. 동료들은 그의 열정과 헌신에 감탄했죠. 1203년, 도미니코의 삶에 전환점이 왔어요. 주교 디에고가 외교 사절로 덴마크에 가게 되었고, 도미니코를 동반자로 선택한 거예요. 여행 중에 그들은 남프랑스 랑그독 지방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어요. 알비파라는 이단이 널리 퍼져 있었고, 수많은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었던 거죠. 알비파는 물질 세계를 악으로 보는 이원론적 사상이었고, 성육신과 성사를 부정했어요. 더 충격적인 것은 교회의 대응 방식이었어요. 당시 파견된 시토회 수도자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로운 마차를 타고 다니며 설교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반발을 샀던 거예요.
청빈한 설교자, 새로운 선교 방법
주교 디에고와 도미니코는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 봤어요. 알비파가 성공한 이유는 그들의 지도자들이 청빈하게 살며 진지하게 가르쳤기 때문이었어요. 반면 가톨릭 성직자들은 부유하고 세속적으로 보였죠. 그래서 그들은 완전히 다른 접근을 시도했어요. 모든 화려함을 버리고, 맨발로 걸으며, 청빈하게 살면서 설교하기 시작한 거예요. 이것이 바로 "사도적 설교"의 시작이었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난하게 살며 복음을 전하는 방식이었죠. 도미니코는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설교했어요. 그는 성경을 깊이 공부했고, 이단의 주장을 정확히 파악했으며,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진리를 설명했어요. 하지만 그의 설교는 단순히 지적인 것만은 아니었어요. 그는 사람들과 함께 머물며 그들의 삶을 나눴고, 밤새 기도하며 영혼들을 위해 간구했죠. 한번은 어떤 이단자와 밤새도록 대화를 나누며 논쟁했는데, 결국 새벽녘에 그 사람이 회심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도미니코의 설교는 공격적이거나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온화하고 인내심 있게 진리로 이끄는 것이었어요. 그는 "말씀과 모범으로" 가르쳤고, 그의 삶 자체가 가장 강력한 설교였답니다.
설교자 수도회의 탄생
1215년, 도미니코는 툴루즈에 최초의 공동체를 세웠어요. 처음에는 소수의 동료들과 함께 시작했지만, 그의 비전은 명확했죠. 그것은 "진리의 말씀을 설교하기 위한 수도회"였어요. 정식 명칭은 "설교자 수도회(Ordo Praedicatorum)"이고, 약칭으로 OP라고 불려요. 같은 해 도미니코는 로마에서 열린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 참석했고, 1216년 교황 호노리오 3세로부터 수도회 인준을 받았답니다. 도미니코가 세운 수도회는 여러 면에서 혁명적이었어요. 첫째, 설교를 주된 사명으로 하는 최초의 수도회였어요. 전통적으로 설교는 주교의 권한이었는데, 도미니코회는 어디서나 설교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죠. 둘째, 학문을 매우 중시했어요. 모든 수도자들이 신학을 공부해야 했고, 각 수도원에 학교를 세웠어요. 셋째, 공동체 청빈을 실천했어요. 개인은 물론 공동체도 고정 수입을 가질 수 없었고, 노동과 구걸로 생활했죠. 넷째, 민주적인 조직 구조를 가졌어요. 총장을 선출로 뽑았고, 각 지역의 대표들이 모여 총회를 열어 중요한 결정을 내렸답니다. 도미니코는 자신의 수도회가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지기를 원했어요. 그래서 1217년, 공동체가 아직 작았는데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회원들을 파견하기 시작했어요. 파리, 볼로냐, 로마, 스페인 등 유럽의 주요 도시와 대학 도시로 형제들을 보냈죠.
묵주기도의 수호자
성 도미니코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묵주기도예요. 전통에 따르면 1214년 프루유에서 도미니코가 알비파 이단과 씨름하며 기도하고 있을 때, 성모님께서 발현하셔서 묵주기도를 가르쳐주셨다고 해요. 성모님은 이 기도가 이단을 물리치고 죄인들을 회개시키는 강력한 영적 무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역사적으로 묵주기도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도미니코가 묵주기도를 널리 보급하고 발전시킨 것은 분명해요. 그는 설교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묵주기도를 가르쳤고,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이 이 기도를 전파했답니다. 묵주기도는 단순하면서도 깊은 기도예요.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반복하며, 예수님과 성모님의 삶의 신비를 묵상하는 거죠. 글을 모르는 평신도들도 쉽게 할 수 있으면서,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을 묵상할 수 있게 해줘요. 도미니코는 묵주기도를 통해 평신도들도 깊은 영성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는 기도와 관상을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거죠. 오늘날까지도 묵주기도는 가톨릭 신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기도 중 하나이고, 도미니코회는 "묵주기도의 수도회"로도 불려요.
- 도미니코회 좌우명
지칠 줄 모르는 여행자
도미니코의 생애 마지막 10년은 끊임없는 여행의 연속이었어요. 그는 유럽 전역을 도보로 여행하며 수도회를 확장하고, 설교하고, 회원들을 격려했죠.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다시 파리와 볼로냐로 쉴 새 없이 움직였어요. 한 추산에 따르면 그는 평생 약 25,000킬로미터를 걸었다고 해요. 대부분 맨발로 걸었고, 겨울에도 여름에도 여행을 멈추지 않았답니다. 왜 그렇게 서둘렀을까요? 도미니코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는 복음을 전해야 할 곳이 너무 많고, 가르쳐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느꼈죠. 그래서 한시도 쉬지 않고 일했어요. 하지만 여행 중에도 그의 첫 번째 우선순위는 기도였어요. 그는 밤에는 성당에서 기도했고, 낮에는 길을 걸으며 묵상했어요. 동료들은 그가 항상 하느님과 하느님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증언해요. 도미니코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했어요. 여행 중에 만나는 모든 사람과 대화를 나눴고, 특히 죄인들과 방황하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졌죠. 그의 동료들은 이렇게 말했어요. "그는 의인보다 죄인에게 더 큰 연민을 보였다. 마치 예수님께서 병자를 찾아가셨듯이." 도미니코는 판단하지 않고 이해하려 했고, 정죄하지 않고 도우려 했어요.
공동체의 아버지
도미니코는 뛰어난 조직가이자 리더였어요. 그는 수도회를 창립하면서 매우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규칙들을 만들었죠. 하지만 그의 리더십 스타일은 권위적이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는 형제들에게 큰 자유를 주었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했어요. 도미니코회 헌장을 보면 놀라운 조항이 있어요. "공부하는 형제들은 성무일도의 일부를 면제받을 수 있다." 다른 수도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하지만 도미니코는 학문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공부를 위해서라면 기도 시간도 조정할 수 있게 한 거예요. 그는 형제들을 깊이 사랑했어요. 한 형제가 수도회를 떠나고 싶다고 하자, 도미니코는 강요하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했어요. 또 다른 형제가 실수를 했을 때도 부드럽게 타이르며 용기를 북돋아줬죠. 그는 자주 이렇게 말했어요. "사랑으로 이끌어라. 강요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도미니코는 형제들과 함께 있을 때 항상 기쁨에 차 있었어요. 그는 유머 감각이 있었고,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죠. 엄격한 금욕 생활 속에서도 그는 공동체가 기쁨의 장소가 되기를 원했어요. 그의 초기 동료 중 한 명은 이렇게 증언했어요. "낮에는 누구보다 다정했지만, 밤에는 누구보다 엄격하게 기도했다."
기적보다 더 큰 기적, 회심
성인들의 전기에는 흔히 기적 이야기들이 가득하죠. 도미니코의 경우도 여러 기적 이야기가 전해져요. 죽은 사람을 살렸다는 이야기, 물을 포도주로 바꿨다는 이야기, 불에 타지 않는 책 이야기 등이 있어요. 하지만 도미니코 자신은 이런 외적인 기적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가 추구한 진짜 기적은 영혼의 회심이었죠. 한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이 물리적 기적보다 훨씬 더 중요했어요. 그래서 그는 밤새 기도하며 영혼들을 위해 눈물을 흘렸답니다. 도미니코의 기도 방식은 매우 독특했어요. 그는 온몸으로 기도했어요. 때로는 팔을 벌리고 십자가 자세로, 때로는 엎드려, 때로는 일어서서 두 손을 들고 기도했죠. 그의 동료들이 밤에 몰래 그를 관찰했는데, 그가 여러 가지 자세로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받았다고 해요. 도미니코는 특히 죄인들을 위해 기도했어요. 그는 자주 이렇게 외쳤어요. "주님, 죄인들은 어찌하오리까?" 그의 마음은 언제나 잃어버린 양들을 걱정하는 선한 목자의 마음이었죠. 그는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고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했어요. 이런 열정이 그로 하여금 평생을 설교와 가르침에 바치게 만든 원동력이었답니다.
평화로운 죽음
1221년 여름, 도미니코는 볼로냐에 있었어요. 그는 51세였지만 끊임없는 여행과 극심한 금욕 생활로 건강이 매우 악화된 상태였죠. 열병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형제들을 걱정했어요. 임종이 가까워지자 형제들이 모여들었고, 도미니코는 그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어요. "나의 사랑하는 아들들이여, 세 가지를 기억하라. 겸손을 지키고, 청빈을 지키며, 사랑을 실천하라." 그는 또 이렇게 말했어요. "걱정하지 마라. 나는 죽어서도 살아있을 때보다 너희에게 더 유익할 것이다." 도미니코는 형제들에게 자신을 교회 제단 아래 묻어달라고 부탁했어요. 자신이 죽어서도 사람들의 발걸음 아래 있기를 원한 거죠. 이것은 그의 겸손함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에요. 1221년 8월 6일 저녁, 도미니코는 형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선종했어요. 그의 마지막 말은 "거룩한 형제들이여, 기쁨을 지니라"였다고 해요. 그의 죽음 소식은 빠르게 퍼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애도했어요. 기적들이 보고되기 시작했고, 1234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답니다. 놀랍게도 도미니코가 수도회를 창립한 지 겨우 15년 만에, 그가 선종한 지 13년 만에 성인으로 선포된 거예요. 이것은 그의 삶이 얼마나 거룩했고 영향력이 컸는지를 보여줘요.
성 프란치스코와 성 도미니코: 두 친구, 두 영성
성 프란치스코와 성 도미니코는 같은 시대를 살았고, 서로를 존경했어요. 전설에 따르면 두 사람은 로마에서 만나 깊은 우정을 나눴다고 해요. 하지만 그들의 접근 방식은 달랐죠. 프란치스코는 가난을 강조했고, 도미니코는 진리를 강조했어요. 프란치스코는 감성적이고 시적이었고, 도미니코는 지성적이고 논리적이었어요. 프란치스코는 피조물을 사랑했고, 도미니코는 영혼을 사랑했어요.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복음적 삶을 살았고, 청빈을 실천했으며, 교회 쇄신에 헌신했어요. 어떤 의미에서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는 상호 보완적이에요. 프란치스코가 마음으로 하느님을 만난다면, 도미니코는 지성으로 하느님을 만나요. 교회는 이 두 가지 접근이 모두 필요하고, 둘 다 거룩함으로 이끈다는 것을 두 성인을 통해 보여줘요.
도미니코회의 위대한 유산
도미니코가 세운 수도회는 가톨릭 교회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수도회 중 하나가 되었어요. 특히 지성사와 신학 발전에 엄청난 공헌을 했죠. 도미니코회가 배출한 위대한 인물들을 보면 정말 놀라워요. 우선 중세 최고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도미니코회 수도자였어요. 그의 『신학대전』은 가톨릭 신학의 초석이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핵심 교재죠. 성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자연과학과 신학을 통합한 위대한 학자였고, 복자 요한 타울러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신비신학의 대가들이었어요. 성녀 카타리나는 중세 최고의 여성 신비가이자 교회박사로, 교황을 로마로 돌아오게 만든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죠. 근현대에 들어와서도 도미니코회는 계속 빛을 발했어요. 라코르데르 신부는 19세기 프랑스에서 도미니코회를 부흥시켰고, 이브 콩가르 추기경과 마리 도미니크 슈느 신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핵심 신학자들이었어요. 20세기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은 성경학, 교부학, 전례학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답니다. 도미니코회는 또한 예술과 건축에도 공헌했어요. 프라 안젤리코는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화가였고, 그의 프레스코화들은 오늘날까지 사람들을 감동시켜요. 이 모든 것이 도미니코가 심은 작은 씨앗에서 자라난 거대한 나무의 열매들이에요.
진리와 자비의 균형
도미니코의 영성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는 진리와 자비의 완벽한 균형이에요. 그는 진리를 타협 없이 추구했지만, 동시에 오류에 빠진 사람들을 깊이 사랑했어요. 이단과 싸웠지만 이단자를 미워하지 않았죠. 이것은 정말 어려운 균형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강조하다가 냉혹해지거나, 자비를 강조하다가 원칙을 잃어버리잖아요. 하지만 도미니코는 둘을 함께 유지했어요. 그는 논쟁에서는 날카로웠지만, 사람들에게는 온화했어요. 알비파 이단과 논쟁할 때도 그는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했고, 그들의 진지함을 인정했어요. 단지 그들이 진리에서 벗어났기에 바로잡으려 했을 뿐이죠. 도미니코는 자주 이렇게 말했어요.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 이것은 기독교 윤리의 핵심이지만 실천하기는 정말 어려운 원칙이에요. 도미니코는 이를 일관되게 살아낸 사람이었답니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힘이 있었어요. 사람들은 그가 자신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고, 동시에 그가 말하는 진리가 확고하다는 것도 알았죠. 사랑 없는 진리는 공허하고, 진리 없는 사랑은 연약해요. 도미니코는 둘을 결합시켰어요.
현대 사회와 도미니코 정신
오늘날 우리는 "탈진리" 시대라고 불리는 세상에 살고 있어요. 객관적 진리의 존재를 의심하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죠. 가짜 뉴스가 넘쳐나고,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어요. 이런 시대에 도미니코의 진리 수호 정신은 더욱 절실해요. 하지만 진리를 추구한다는 명분으로 독단적이 되거나 타인을 억압해서는 안 돼요. 도미니코가 보여준 것처럼 진리 추구는 겸손과 대화, 사랑과 함께 가야 해요. 현대 사회는 또한 학문의 전문화와 세분화로 인해 통합적 시각을 잃어가고 있어요. 과학, 철학, 신학, 예술이 서로 단절되어 있죠. 도미니코회가 추구한 지성과 신앙의 통합, 이성과 계시의 조화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요한 비전이에요. 특히 과학과 종교의 대화, 세속 학문과 신학의 대화가 중요한 시대에, 도미니코의 개방적이고 탐구적인 태도는 좋은 모델이 돼요. 도미니코는 진리를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그는 진리는 하나이고, 모든 진리는 결국 하느님께로 이끈다고 믿었죠. 그래서 그는 당시 새롭게 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받아들였고, 이것이 나중에 토마스 아퀴나스의 종합 신학으로 꽃피었답니다.
설교의 현대적 의미
도미니코의 핵심 사명은 설교였어요. 하지만 설교는 단순히 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가르치고,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거죠. 오늘날 설교의 형태는 다양해졌어요. 전통적인 강론도 있지만, 글쓰기, 방송, 소셜 미디어, 예술, 봉사 활동 등 모든 것이 설교의 수단이 될 수 있어요. 도미니코가 강조한 것은 "말씀과 모범으로" 가르치는 거예요. 말만 하는 게 아니라 삶으로 증거해야 한다는 거죠. 오늘날 사람들은 설교를 듣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들은 진정성을 보고 싶어 해요. 말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 자신이 가르치는 것을 실제로 사는 사람에게 끌리죠. 도미니코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는 청빈을 설교했고 청빈하게 살았어요. 사랑을 가르쳤고 사랑으로 살았어요. 기도를 강조했고 밤새 기도했어요. 그의 설교가 힘이 있었던 이유는 그의 삶이 설교를 뒷받침했기 때문이에요. 또한 도미니코는 철저한 준비를 강조했어요. 그는 설교하기 전에 깊이 공부했고, 성경을 묵상했으며, 청중을 이해하려 했어요. 즉흥적이거나 피상적인 설교를 경계했죠. 오늘날 복음을 전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것은 중요한 교훈이에요. 열정만으로는 부족해요. 준비와 공부, 기도가 뒷받침되어야 하죠.
도미니코의 기도 영성
도미니코는 관상가이자 활동가였어요. 낮에는 쉬지 않고 일했지만, 밤에는 오랜 시간 기도했죠. 그에게 기도는 모든 활동의 원천이었어요. 설교의 능력도,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힘도 모두 기도에서 나왔답니다. 도미니코의 기도는 매우 구체적이었어요. 그는 특정 사람들, 특정 상황을 위해 기도했어요. 죄인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의 회심을 위해 울었고, 어려움에 처한 형제들을 위해 간구했죠. 그의 기도는 추상적이거나 형식적이지 않았어요.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이었답니다. 도미니코는 또한 성경적 기도를 강조했어요. 그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했어요. 특히 시편과 바오로 서간을 사랑했죠. 성경 말씀이 그의 기도를 형성했고, 그의 기도가 성경 이해를 깊게 만들었어요. 이것은 "렉시오 디비나"라고 불리는 거룩한 독서의 전통이에요. 오늘날 우리도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요. 성경을 천천히 읽고, 한 구절에 머물며, 그 말씀이 내게 무엇을 말하는지 듣고, 그것을 기도로 바꾸는 거예요. 도미니코는 묵주기도도 열심히 했어요. 묵주기도는 단순하지만 깊은 관상적 기도예요. 반복되는 기도문은 마음을 평화롭게 하고, 복음의 신비를 묵상하게 해줘요. 바쁜 현대인들에게 묵주기도는 훌륭한 영적 수련이 될 수 있어요.
역사적 사건 연표
| 연도 | 역사적 사건 | 의미 |
|---|---|---|
| 1170년 | 도미니코 탄생 | 스페인 칼레루에가에서 귀족 가문에 출생 |
| 1184년 | 팔렌시아 대학 입학 | 10년간 인문학과 신학 공부 |
| 1195년 | 오스마 대성당 참사회원 | 공동체 생활과 사도적 영성의 기초 형성 |
| 1203년 | 덴마크 외교 사절단 동행 | 여행 중 알비파 이단 문제를 목격 |
| 1206년 | 프루유 논쟁 | 알비파와의 신학 논쟁, 사도적 설교 시작 |
| 1214년 | 프루유에서 성모 발현 | 전통에 따르면 성모님께서 묵주기도를 가르침 |
| 1215년 | 툴루즈에 최초 공동체 설립 | 설교자 수도회의 시작 |
| 1216년 12월 | 교황 호노리오 3세의 수도회 인준 | 설교자 수도회 공식 승인 |
| 1217년 | 형제들의 첫 파견 | 파리, 볼로냐, 로마, 스페인으로 선교사 파견 |
| 1218년 | 로마에 산타 사비나 수도원 설립 | 수도회 총본부 마련 |
| 1220년 | 볼로냐에서 첫 총회 | 수도회 헌장 확정, 민주적 조직 구조 확립 |
| 1221년 | 도미니코 3회 창설 | 평신도를 위한 도미니코 영성 단체 |
| 1221년 8월 6일 | 도미니코 선종 | 볼로냐에서 51세로 선종 |
| 1234년 |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 | 선종 13년 만에 성인으로 선포 |
| 1267년 |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집필 시작 | 도미니코회 신학의 정점 |
| 1370년 |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활동 | 도미니코 3회원으로 교회 쇄신 기여 |
| 1571년 | 레판토 해전 승리 | 교황 성 비오 5세(도미니코회)가 묵주기도로 승리 기도 |
| 1844년 | 라코르데르의 도미니코회 재건 | 프랑스 혁명 후 수도회 부흥 |
| 1962-1965년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 도미니코회 신학자들의 중요한 기여 |
| 2002년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서한 |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 발표, 빛의 신비 추가 |
참고문헌 및 더 읽어볼 자료
- 조르당 드 삭스, 『성 도미니코의 소전기』, 도미니코 수도회 역, 분도출판사, 2005.
- 베다 자렛, 『성 도미니코의 생애』, 이봉우 역, 성바오로, 2008.
- M.H. 비쇼, 『성 도미니코: 빛의 전달자』, 한명수 역, 가톨릭출판사, 2000.
- W.A. 하인브론트, 『도미니코회의 역사』, 도미니코 수도회 역, 서강대학교출판부, 1995.
- 시몬 투가스웰, 『도미니코 성인: 전기 문헌』, 도미니코회 한국관구 역, 도미니코 출판사, 2012.
- 베네딕토 애슐리, 『도미니코 영성』, 조영수 역, 도미니코 출판사, 2004.
- 토마스 맥그린, 『도미니코회 성인들』, 최영철 역, 성바오로, 1999.
- 이브 콩가르, 『진정한 개혁과 거짓 개혁』, 박종구 역, 분도출판사, 2007.
- 『도미니코회 헌장』, 도미니코 수도회 한국관구, 2010.
- 로버트 로열, 『가톨릭 순교자들』 중 도미니코회 편, 박문재 역, 가톨릭출판사, 2015.
- 피에르 마네동, 『설교자 수도회의 역사』, 도미니코회 역, 2001.
- 요한 테츨라프, 『성 도미니코의 영성 신학』, 김윤주 역,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8.
- 마리 한리엥 시몽, 『도미니코와 그의 설교자들』, 허영엽 역, 바오로딸, 2003.
- 실비안 토시, 『묵주기도의 역사와 영성』, 정의철 역, 성바오로, 2011.
- G.K. 체스터턴, 『성 토마스 아퀴나스』, 김유형 역, 가톨릭출판사, 2014.
'6. 세계사와 함께 보는 가톨릭'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카타리파와 알비 십자군 (0) | 2026.01.28 |
|---|---|
| 인노첸시오 3세와 교황권 전성기 (0) | 2026.01.27 |
| 성 프란치스코: 가난과 창조 신학의 아름다운 만남 (0) | 2026.01.25 |
| 기사도 정신과 가톨릭 영성: 신앙과 용맹이 만나다 (1) | 2026.01.24 |
| 십자군과 동서 교회 관계의 역사적 전개 (1) | 2026.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