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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인과 교부

성 루이지 오리오네 -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와 사회적 사랑의 실천자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5.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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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하느님의 일꾼

성 루이지 조반니 오리오네(Saint Luigi Giovanni Orione)는 1872년 6월 23일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 지방의 폰테쿠로네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도로 포장공으로 일했으며, 어머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루이지는 어린 시절부터 가난이 무엇인지, 노동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몸소 체험하며 자랐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통일 이후 급격한 산업화와 사회변혁을 겪고 있었으며, 교회와 국가의 갈등, 사회주의 사상의 확산, 극심한 빈부격차 등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루이지의 아버지는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노동자였지만, 어머니의 신앙심은 가정 안에서 깊은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어린 루이지는 열세 살이 될 때까지 아버지를 도와 도로 포장 일을 하며 가계에 보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사제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열망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열정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경험한 가난과 고통을 다른 이들이 겪지 않도록 돕고 싶다는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열세 살이 되던 해, 루이지는 보게라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입회했습니다. 그러나 건강 문제로 인해 오래 머물지 못하고 수도원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는 그에게 큰 좌절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위해 다른 길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곧 그는 성 요한 보스코의 토리노 오라토리오에 받아들여졌고, 그곳에서 돈 보스코 성인을 직접 만나 깊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성 루이지 오리오네 -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와 사회적 사랑의 실천자

돈 보스코의 제자에서 신의 섭리의 사도로

성 요한 보스코는 19세기 이탈리아에서 가장 위대한 교육자이자 청소년 사도였습니다. 루이지가 토리노에 머물던 1886년부터 1889년까지의 시기는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돈 보스코는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한 기술교육과 영성교육을 결합한 예방교육법으로 유명했으며, 루이지는 이러한 교육철학을 깊이 체득했습니다. 돈 보스코 성인은 젊은 루이지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그를 격려했으며,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와 신의 섭리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강조했습니다. 루이지는 스승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겼고, 평생 돈 보스코를 자신의 영적 아버지로 여겼습니다.

1889년, 루이지는 토르토나 교구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신학생 시절에도 그의 관심은 늘 가난한 사람들과 버림받은 이들에게 향해 있었습니다. 그는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가난한 청소년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기술을 교육하는 작은 오라토리오를 시작했습니다. 1892년, 불과 스무 살의 나이에 루이지는 자신의 첫 번째 학생 기숙사를 열었습니다. 이는 후일 신의 섭리의 작은 사업회로 발전할 씨앗이었습니다. 1895년 4월 13일, 루이지는 사제 서품을 받았고,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돈 오리오네(Don Orione)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사제가 된 그는 더욱 활발하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업을 펼쳐나갔으며, 특히 고아원과 장애인을 위한 시설, 직업학교 등을 세워나갔습니다.

신의 섭리의 작은 사업회와 자선 활동의 확장

1903년, 돈 오리오네는 공식적으로 신의 섭리의 작은 사업회(Little Work of Divine Providence)를 설립했습니다. 이 수도회는 신의 섭리의 아들회(Sons of Divine Providence)라는 남자 수도회와 사랑의 작은 선교 수녀회(Little Missionary Sisters of Charity)라는 여자 수도회로 구성되었습니다. 또한 관상 수도회인 신의 섭리의 은수자회와 맹인 성체 조배 수녀회도 창립했습니다. 돈 오리오네의 카리스마는 단순히 가난한 이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주는 것을 넘어, 그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 안에서 고통받는 그리스도를 보았으며, 그들을 섬기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돈 오리오네의 사업은 빠르게 확장되었습니다. 1908년 12월 28일, 이탈리아 남부 메시나와 레조 칼라브리아 지역에서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지진 중 하나가 발생했습니다. 이 지진으로 약 8만 명에서 20만 명이 사망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집과 가족을 잃었습니다. 돈 오리오네는 즉시 재난 현장으로 달려가 구호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는 고아가 된 아이들을 데려와 자신의 시설에서 돌보았으며,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전했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명성을 이탈리아 전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업에 동참하기 시작했습니다. 돈 오리오네는 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늘 가장 먼저 현장에 달려가는 사제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남미 선교와 교회 일치를 위한 노력

돈 오리오네의 시야는 이탈리아를 넘어 전 세계로 확장되었습니다. 1921년부터 그는 남미, 특히 아르헨티나와 브라질로 선교사들을 파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자신도 1921년부터 1922년까지, 그리고 1934년부터 1937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남미를 방문하여 선교 사업을 지도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했습니다. 남미의 이탈리아 이민자들과 가난한 원주민들은 돈 오리오네의 사랑과 헌신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단순히 종교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짓고 고아원을 운영하며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가톨릭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실천하는 모범적인 사례가 되었습니다.

돈 오리오네는 또한 교회 일치 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당시는 가톨릭과 정교회가 오랜 분열 속에 있던 시기였는데, 그는 이 두 교회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고 노력했습니다. 특히 러시아 정교회와의 대화에 관심을 보였으며, 교회의 일치가 그리스도의 뜻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시기에는 매우 진보적인 것이었으며,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의 선구자적 모습을 보여줍니다. 돈 오리오네는 하느님의 사랑이 모든 경계를 넘어선다고 믿었으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성인의 영성과 현대 가톨릭 교회에 미친 영향

돈 오리오네의 영성은 신의 섭리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기반으로 합니다. 그는 자주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우리의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은 채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달릴 때도 영적으로는 하느님 앞에 무릎 꿇고 있어야 합니다. 그는 활동적인 삶과 관상적인 삶을 완벽하게 통합한 성인이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가난한 이들을 섬기면서도, 매일 긴 시간을 기도와 묵상에 할애했습니다. 성체조배는 그의 영성생활의 중심이었으며,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모든 힘과 영감을 얻었습니다.

1940년 3월 12일, 돈 오리오네는 산레모에서 68세의 나이로 선종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신의 섭리의 작은 사업회는 이미 전 세계로 확장되어 있었으며, 수백 개의 학교, 고아원, 병원, 장애인 시설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0년 10월 26일 그를 시복했고, 2004년 5월 16일 시성했습니다. 그의 축일은 3월 12일로 정해졌습니다. 현재 신의 섭리의 작은 사업회는 전 세계 30여 개국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수천 명의 수도자와 평신도들이 돈 오리오네의 카리스마를 계승하여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그를 사회복지사와 가난한 이들, 고아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돈 오리오네의 삶과 가르침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큰 도전과 영감을 줍니다. 현대 사회는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소외된 이들이 증가하는 가운데, 그의 메시지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가톨릭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개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사회 정의와 공동선의 추구를 강조합니다. 돈 오리오네는 이러한 가르침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이론이 아닌 실천으로 보여준 성인입니다. 그는 신앙과 사회 참여가 분리될 수 없으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가난한 이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강조하는 가난한 교회,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의 이상은 바로 돈 오리오네가 평생 실천한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성 루이지 오리오네 생애의 주요 사건 연대표

연도 사건 역사적 배경
1872년 6월 23일 이탈리아 폰테쿠로네에서 출생 이탈리아 통일 완성 직후, 산업화 초기
1885년 보게라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입회 이탈리아 산업혁명과 사회주의 운동 확산
1886-1889년 토리노 돈 보스코 오라토리오에서 수학 교황 레오 13세의 사회 교리 발전 시기
1889년 토르토나 교구 신학교 입학 레오 13세 회칙 레룸 노바룸 발표 2년 전
1892년 최초의 학생 기숙사 개설 이탈리아 노동운동과 사회개혁 운동 성장기
1895년 4월 13일 사제 서품 교황 레오 13세 재위 시기
1903년 신의 섭리의 작은 사업회 공식 설립 교황 비오 10세 즉위, 현대주의 논쟁 시기
1908년 12월 28일 메시나 대지진 구호활동 참여 이탈리아 역사상 최악의 자연재해 중 하나
1913년 사랑의 작은 선교 수녀회 설립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년 전
1921-1922년 첫 번째 남미 선교 여행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재건기
1934-1937년 두 번째 남미 선교 여행 대공황 이후 전 세계 경제 위기 시기
1940년 3월 12일 산레모에서 선종 제2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 파시즘 시기
1980년 10월 2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 쇄신기
2004년 5월 1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21세기 초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확산기

참고문헌 및 참고자료

1. 가톨릭 교회의 교리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 가톨릭 성인 전기집,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3. 바티칸 공식 웹사이트 - www.vatican.va (시성 관련 자료)

4. 한국천주교주교회의 - www.cbck.or.kr (전례력과 성인 자료)

5. 신의 섭리의 작은 사업회 공식 웹사이트 - www.sonsofdivineprovidence.org

6. 가톨릭 백과사전(Catholic Encyclopedia), 온라인 에디션

7. 교황청 시성성 공식 문서 및 자료

8. 레오 13세 회칙 레룸 노바룸(Rerum Novarum), 1891

9. 요한 바오로 2세 시복식 강론문, 1980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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