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7월 6일, 이탈리아의 한 작은 농가에서 12세 소녀가 성폭행을 거부하다 14번의 칼에 찔려 순교했습니다. 죽어가면서도 그녀는 자신을 죽인 가해자를 용서했고, 그 용서는 훗날 기적 같은 회개를 이끌어냈습니다. 성 마리아 고레티, 20세기 가톨릭교회가 세상에 증거하는 순결과 용서의 성인입니다.

폰티네 습지대의 가난한 소작농 가정
마리아 고레티는 1890년 10월 16일 이탈리아 중부 안코나 근처의 코리날도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소작농이었고, 아버지 루이지 고레티와 어머니 아순타는 여섯 명의 자녀를 키우며 극심한 가난과 싸워야 했습니다. 19세기 말 이탈리아 통일 이후에도 남부 지역의 농민들은 봉건적 토지 소유 체제 아래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땅을 소유하지 못하고 지주의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농으로 살아갔으며, 수확의 대부분을 소작료로 바쳐야 했습니다. 고레티 가족도 더 나은 삶을 찾아 1899년 로마 남쪽의 폰티네 습지대로 이주했습니다. 폰티네 지역은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늪지대였지만, 정부의 간척사업으로 새로운 경작지가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고레티 가족은 페리에리에 디 콘카라는 농장의 작은 건물에 정착했고, 같은 건물에 세레넬리 가족이 함께 살았습니다. 두 가족은 공동으로 농사를 짓고 수입을 나누었지만, 가난은 여전히 그들을 짓눌렀습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가족의 생계를 떠맡은 소녀
1900년 마리아가 열 살이 되던 해, 아버지 루이지가 말라리아에 걸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은 가족에게 엄청난 타격이었고, 어머니 아순타는 홀로 여섯 자녀를 키우며 농사일까지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맏딸로서 자연스럽게 집안일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어린 동생들을 돌보고, 요리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며 어머니가 밖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농촌에서는 여성의 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마리아 역시 학교에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본당 신부로부터 교리를 배웠고, 성경 이야기를 들으며 깊은 신앙심을 키워갔습니다. 마리아는 특히 성모 마리아를 공경했고,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쳤습니다. 1902년 6월에는 첫영성체를 받았는데, 이는 그녀에게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가난 때문에 흰 드레스조차 마련하지 못했지만,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영하는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첫영성체를 받으며 그녀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알레산드로 세레넬리의 집요한 유혹과 위협
같은 건물에 살던 세레넬리 가족의 아들 알레산드로는 마리아보다 8살 많은 20세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제 행동을 보였고, 외설적인 잡지를 탐독하며 성적 환상에 빠져 있었습니다. 알레산드로는 어린 마리아에게 점점 부적절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여러 차례 그녀를 성적으로 추행하려 했습니다. 마리아는 이러한 시도를 단호히 거부했고, 어머니에게 알리려 했지만 알레산드로의 위협 때문에 말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농촌 사회는 매우 보수적이었고, 성적 수치는 여성 본인과 가족 전체의 명예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알레산드로는 만약 마리아가 이 일을 알리면 자신도 그녀도 명예를 잃게 될 것이라며 협박했습니다. 또한 그는 마리아가 거부하면 그녀의 어머니를 죽이겠다고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열두 살 소녀 마리아는 극심한 공포와 불안 속에서도 기도로 힘을 얻었고, 하느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알레산드로의 집착은 점점 더 위험한 수준으로 치달았습니다.
1902년 7월 6일, 운명의 날 순교
1902년 7월 6일 오후, 더위를 피해 대부분의 가족들이 밖에 나가 있을 때 마리아는 집에서 동생들을 돌보며 바느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알레산드로는 이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리아를 방으로 끌고 가려 했고, 마리아가 저항하자 성폭행을 시도했습니다. 마리아는 온 힘을 다해 저항하며 소리쳤습니다. "안 돼요! 그건 죄예요! 당신은 지옥에 갈 거예요!" 분노한 알레산드로는 주머니에서 송곳을 꺼내 마리아의 몸을 무차별적으로 찔렀습니다. 그는 그녀의 등, 가슴, 복부를 14번이나 찔렀습니다.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온 알레산드로의 아버지 조반니는 피투성이가 된 마리아를 발견했습니다. 마리아는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의사들은 상처가 너무 심각하여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수술을 받는 동안에도 마취 없이 고통을 참아냈고, 의사들은 그녀의 용기에 놀라워했습니다. 마리아는 의식이 있는 동안 본당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성체를 영했습니다. 신부가 알레산드로를 용서하느냐고 묻자, 마리아는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예, 그를 위해서도 예수님께서 그를 용서하시길 저도 용서합니다. 천국에서 제 곁에 있기를 바랍니다."
스무 시간의 고통 끝에 맞이한 죽음
마리아는 20시간 동안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놀라운 평화를 보였습니다. 그녀는 성모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고, 어머니와 가족들을 위로했습니다. 어머니 아순타가 울면서 그녀를 붙잡자, 마리아는 "엄마, 저를 붙잡지 마세요. 하느님께서 부르고 계세요"라고 말했습니다. 1902년 7월 6일 오후 3시 15분, 마리아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녀의 나이 겨우 열한 살 아홉 개월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장례식에는 마을 사람들이 대거 참석했고, 많은 이들이 그녀를 벌써 성인으로 여겼습니다. 알레산드로 세레넬리는 체포되어 살인죄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는 30년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알레산드로는 아무런 회개의 빛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했습니다. 감옥에서도 그는 반항적이고 폭력적인 죄수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기도는 계속되고 있었고, 그녀의 용서는 결국 기적을 이루어냈습니다.
꿈에 나타난 마리아, 알레산드로의 회개
수감된 지 8년이 지난 1910년 어느 날 밤, 알레산드로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정원이 나타났고, 흰 옷을 입은 마리아가 백합꽃을 들고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마리아는 그에게 백합꽃 14송이를 건네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순간 알레산드로는 자신이 마리아에게 가한 14번의 칼질을 깨달았고, 그녀가 자신을 진정으로 용서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꿈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진심으로 회개했고, 감옥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청했습니다. 이후 알레산드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모범수가 되었고, 다른 죄수들에게도 선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929년 모범적인 행실로 3년 일찍 석방된 알레산드로는 곧장 마리아의 어머니 아순타를 찾아갔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는 아순타의 집 문을 두드리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고레티 부인, 마리아가 저를 용서했습니다. 부인도 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아순타는 눈물을 흘리며 그를 받아들였고, 둘은 함께 성탄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이 장면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고, 용서의 기적이 실현되었음을 증언했습니다.
시복과 시성, 20세기 순결의 모범
마리아 고레티의 순교는 빠르게 알려졌고, 많은 이들이 그녀의 무덤을 찾아 기도했습니다. 수많은 기적들이 그녀의 전구로 일어났다고 보고되었습니다. 1947년 교황 비오 12세는 마리아를 복자품에 올렸고, 1950년 6월 24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50만 명이 참석한 가운데 그녀를 성인품에 올렸습니다. 이는 가톨릭 역사상 가장 많은 인파가 모인 시성식 중 하나였습니다. 시성식에는 83세의 어머니 아순타가 참석했는데, 이는 교회 역사상 성인의 어머니가 직접 자녀의 시성식에 참여한 최초의 사례였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알레산드로 세레넬리도 시성식에 참석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군중 속에서 조용히 무릎 꿇고 기도하며 마리아의 성덕을 증언했습니다. 교황 비오 12세는 시성 칙서에서 마리아를 현대의 아녜스라고 칭하며, 순결의 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로 선포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녀 아녜스도 13세에 순결을 지키다 순교한 성인이었습니다. 마리아 고레티의 축일은 7월 6일로 정해졌으며, 그녀는 청소년, 순결, 성폭력 피해자, 강간 피해자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알레산드로의 남은 생애, 참회의 삶
석방 후 알레산드로 세레넬리는 카푸친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도원에서 평신도 수사로 살았습니다. 그는 정원사와 문지기로 일하며 평생 속죄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마리아의 용서가 자신의 영혼을 구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알레산드로는 1970년 5월 6일 88세의 나이로 선종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곧 마리아를 만나게 될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마리아가 첫영성체 때 받았던 작은 성화를 평생 간직했고, 임종 시에도 그것을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알레산드로의 회개는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용서와 회개의 신학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는 악의 극한까지 갔던 사람이 은총을 통해 변화될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알레산드로를 언급하며 "그 어떤 죄도 하느님의 자비보다 클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마리아와 알레산드로의 이야기는 피해자의 용서와 가해자의 진실한 회개가 만났을 때 일어나는 구원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현대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 순결과 용서
성 마리아 고레티의 삶은 현대 사회에 두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첫째는 순결의 가치입니다. 오늘날 성적 자유가 지나치게 강조되고 순결이 구시대적 개념으로 치부되는 시대에, 마리아는 인간의 몸과 성이 존중받아야 할 하느님의 선물임을 상기시킵니다. 그녀의 순교는 단순히 육체적 순결만이 아니라,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순결을 억압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을 위한 준비로 가르칩니다. 둘째는 용서의 힘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했고, 그 용서는 한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현대 사회는 복수와 처벌을 강조하지만, 마리아의 이야기는 용서가 얼마나 강력한 치유의 힘을 가지는지 보여줍니다. 특히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마리아는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교회는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요하지 않지만, 용서가 가능할 때 그것이 피해자 자신에게도 치유를 가져온다는 것을 마리아를 통해 보여줍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는 여성의 존엄성과 권리를 더욱 강조하고 있으며, 마리아 고레티는 여성이 자신의 몸과 영혼에 대한 주인임을 용감하게 증거한 성인입니다. 현대의 미투 운동과 여성 인권 신장의 맥락에서도, 마리아의 저항과 순교는 새로운 의미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20세기 초 이탈리아 사회와 역사적 배경
연도 | 역사적 사건 | 마리아 고레티의 생애 |
---|---|---|
1890년 | 이탈리아 통일 완성 후 남부 빈곤 심화 | 10월 16일 코리날도에서 출생 |
1891년 | 교황 레오 13세 회칙 레룸 노바룸 반포 | 유아기, 가난한 소작농 가정 |
1899년 | 이탈리아 농업 개혁, 폰티네 습지 간척 | 가족과 함께 페리에리에 디 콘카 이주 |
1900년 | 산업혁명으로 도시 인구 증가 | 아버지 루이지 말라리아로 사망 |
1901년 | 이탈리아 노동운동 활성화 | 집안일과 동생 돌보기 책임 |
1902년 6월 | 교황 레오 13세 재위 말기 | 첫영성체, 순결 서약 |
1902년 7월 6일 | 20세기 초 이탈리아 농촌 빈곤 극심 | 성폭행 거부하다 순교 (11세) |
1902-1910년 | 제1차 세계대전 전 유럽 긴장 고조 | 알레산드로 투옥, 마리아 무덤 순례 시작 |
1910년 | 이탈리아 세속화 심화 | 알레산드로 꿈에서 회개 체험 |
1929년 | 라테란 조약, 교황청과 이탈리아 화해 | 알레산드로 석방, 아순타에게 용서 구함 |
1947년 |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재건 시기 | 교황 비오 12세 시복 |
1950년 | 성년 선포, 냉전 시대 | 6월 24일 시성, 어머니와 알레산드로 참석 |
1970년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 교회 쇄신 | 알레산드로 세레넬리 선종 (88세) |
1972년 | 여성 인권 운동 활성화 | 어머니 아순타 선종 (90세) |
참고문헌 및 참고자료
1. 바티칸 공식 홈페이지 성인 전기 자료 (www.vatican.va)
2. 가톨릭 백과사전 (Catholic Encyclopedia Online)
3. 『성 마리아 고레티 전기』, 교황청 시성성 공식 문서
4. 『순결의 백합 마리아 고레티』, 가톨릭출판사
5. 알레산드로 세레넬리 회개 증언록 (1950년 시성식 자료)
6. 아순타 고레티 증언록, 시성 조사 공식 기록
7. 『20세기 순교자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8. 『이탈리아 농촌 사회사』, 학술논문 자료
9. 네투노 성 마리아 고레티 성당 아카이브
10. 『용서와 회개의 신학』, 가톨릭신학 연구서
본 글은 가톨릭교회의 공식 문헌, 시성 조사 기록, 역사적 증언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모든 사실은 검증된 자료에 근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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