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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인과 교부

성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순교와 신앙 여정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5.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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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들의 목소리가 된 사제

오스카 아르눌포 로메로 가르다메스는 1917년 8월 15일 엘살바도르의 작은 산악 마을 시우닷바리오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며 성장했습니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로메로는 1942년 로마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이후 23년간 조용한 본당 사제로서 사목 활동에 헌신했습니다. 그의 초기 사제 생활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을 띠었으며,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온건한 사목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엘살바도르의 정치적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그의 신앙적 여정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찾아오게 됩니다.

성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순교와 신앙 여정

 

변화의 시작과 예수회 신부의 순교

1977년 2월 22일, 로메로는 산살바도르의 대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당시 엘살바도르 정부와 군부는 로메로가 온건하고 비정치적인 성향의 주교라고 판단하여 그의 임명을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게 됩니다. 대주교 임명 후 불과 3주 만에 일어난 사건이 로메로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1977년 3월 12일,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예수회 신부였던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가 농민들을 위한 미사를 집전하러 가던 중 군부 세력에 의해 총살당했습니다. 그란데 신부는 가난한 농민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토지 개혁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살해되었으며, 그와 함께 있던 두 명의 농민도 함께 희생되었습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로메로에게 깊은 영적 충격을 주었고, 그는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민중의 대주교로 거듭나다

그란데 신부의 순교 이후 로메로 대주교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모했습니다. 그는 엘살바도르 전역을 직접 방문하며 군부 독재 정권 하에서 고통받는 민중들의 이야기를 경청했습니다. 농민들은 토지를 빼앗기고, 노동자들은 정당한 임금을 받지 못했으며, 인권 운동가들과 사제들은 실종되거나 살해당하고 있었습니다. 로메로는 매주 일요일 대성당에서 집전하는 미사를 통해 그 주간에 일어난 인권 유린 사례들을 상세히 보고했습니다. 그의 미사는 단순한 종교 의식을 넘어서 진실을 전하는 언론의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당시 엘살바도르의 모든 언론이 군부의 검열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로메로의 일요일 미사 강론은 유일하게 진실을 들을 수 있는 통로였습니다. 그의 미사는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고, 수십만 명의 국민들이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복음과 사회정의의 통합

로메로 대주교의 신학적 입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1968년 메데인 회의, 1979년 푸에블라 회의의 정신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그는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가톨릭 사회교리를 실천했으며, 이는 라틴아메리카 교회의 핵심 가르침이었습니다. 로메로는 복음의 메시지가 단순히 개인의 영혼 구원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불의한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폭력을 반대했지만, 구조적 폭력과 억압에 맞서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설파했습니다. 로메로의 가르침은 가톨릭 교회의 정통 교리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민족들의 발전과 교황 요한 23세의 지상의 평화를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교의 길로 향하다

로메로 대주교의 용감한 증언은 군부 독재 정권과 기득권층의 분노를 샀습니다. 그는 수차례 암살 위협을 받았고, 극우 세력은 그를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로메로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1980년 3월 23일, 그는 역사적인 강론을 통해 군인들에게 직접 호소했습니다. 그는 신의 이름으로 명령하노니, 억압을 멈추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군인들에게 동족을 살해하는 명령에 복종하지 말 것을 당부하며, 신의 법이 인간의 부당한 명령보다 우선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이 강론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권력자들은 로메로를 제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로메로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내가 죽더라도 엘살바도르 민중 속에서 부활할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성찬의 제단에서 흘린 순교의 피

1980년 3월 24일 저녁, 로메로 대주교는 병원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강론에서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미사가 봉헌 기도에 이르렀을 때, 한 명의 저격수가 성당 입구에 나타나 로메로를 향해 총을 발사했습니다. 총알은 그의 심장을 관통했고, 로메로는 제단 앞에 쓰러졌습니다. 그는 성찬의 피를 봉헌하다가 자신의 피를 흘리며 순교했습니다. 63세의 나이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엘살바도르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장례식에는 10만 명 이상의 민중이 모였고, 장례 행렬 중에도 군부는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아 수십 명의 추가 희생자를 낳았습니다.

순교 이후의 유산과 시성

로메로의 순교는 엘살바도르 내전의 도화선이 되었고, 이후 12년간 지속된 내전으로 7만 5천 명 이상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메로의 정신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 교회의 양심이자 정의와 평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의 시성 과정은 정치적 이유로 오랫동안 지연되었지만, 교황 프란치스코가 즉위한 후 급물살을 타게 되었습니다. 2015년 5월 23일, 로메로는 순교자로 시복되었고, 2018년 10월 14일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로메로를 20세기 가톨릭 교회의 위대한 순교자 중 한 명으로 평가하며, 그가 복음의 증인이자 가난한 이들의 목자였다고 선언했습니다. 성 오스카 로메로의 축일은 그가 순교한 3월 24일로 지정되었습니다.

현대 교회에 주는 메시지

성 오스카 로메로의 삶과 순교는 오늘날 가톨릭 교회에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는 교회가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 곁에 서야 하며, 불의한 권력 앞에서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로메로는 신앙과 사회 참여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의 신학은 정통 가톨릭 교리에 충실하면서도 현실의 고통에 응답하는 살아있는 신앙이었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강조하는 주변부로 나아가는 교회,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의 정신은 바로 로메로의 유산입니다. 오늘날에도 전 세계 곳곳에서 불의와 억압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로메로 성인은 우리에게 침묵하지 말고, 진실을 증언하며, 정의를 위해 기꺼이 대가를 치를 용기를 가지라고 촉구합니다. 그의 삶은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시대적 배경과 역사적 의미

로메로 대주교가 활동했던 1970년대 후반의 엘살바도르는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과 정치적 억압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전체 인구의 2퍼센트가 국가 부의 60퍼센트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대다수 농민들은 토지 없이 가난에 허덕였습니다. 1932년 마티 반란 이후 군부 독재가 지속되었고, 정부는 사회 개혁을 요구하는 모든 움직임을 공산주의로 낙인찍어 탄압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메로의 목소리는 민중에게 희망의 등불이었습니다. 그의 순교는 단순히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20세기 라틴아메리카 역사에서 교회가 민중의 편에 섰던 결정적 순간을 상징합니다. 로메로는 식민지 시대 이후 지배 계급과 결탁해온 라틴아메리카 교회의 전통을 깨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교회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유산은 오늘날에도 전 세계 교회가 사회정의와 인권 옹호에 앞장서도록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역사적 연대표

연도 역사적 사건
1917년 8월 15일 오스카 아르눌포 로메로, 엘살바도르 시우닷바리오스에서 출생
1942년 4월 4일 로마에서 사제 서품 받음
1962-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최, 교회 쇄신의 전환점
1968년 메데인 회의, 라틴아메리카 주교들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선언
1970년 로메로, 산살바도르 보좌 주교로 임명됨
1974년 산티아고 데 마리아 교구장 주교로 임명됨
1977년 2월 22일 산살바도르 대주교로 임명됨
1977년 3월 12일 절친한 친구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가 군부에 의해 살해됨, 로메로의 회심의 계기
1979년 푸에블라 회의 개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재확인
1980년 2월 벨기에 루뱅 가톨릭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 받음
1980년 3월 23일 군인들에게 억압을 멈추라는 역사적 강론
1980년 3월 24일 미사 중 암살당해 순교함
1980년 3월 30일 10만 명 이상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 미사, 군부의 총격으로 수십 명 추가 희생
1980-1992년 엘살바도르 내전, 약 75,000명 사망
1997년 시복 시성 절차 공식 시작
2015년 5월 23일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시복됨
2018년 10월 14일 성인품에 오름, 축일 3월 24일로 지정

참고 자료

  • 바티칸 공식 웹사이트 (vatican.va) - 성 오스카 로메로 시성 관련 공식 문서
  • 가톨릭 평화신문 - 성 오스카 로메로 관련 기사 및 해설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홈페이지 (cbck.or.kr) - 성인 전기 자료
  • 주교회의 시성시복주교특별위원회 발간 자료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 사목헌장
  •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 메데인 회의 문헌 (1968)
  • 교황 프란치스코 시성 미사 강론문 (2018년 10월 14일)
  • 가톨릭 신문 - 라틴아메리카 교회사 특집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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