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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인과 교부

성 필로메나의 발견과 공경: 신앙과 역사적 검증의 여정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5.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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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실라 카타콤바의 놀라운 발견

1802년 5월 25일, 로마의 살라리아 가도에 위치한 프리실라 카타콤바에서 역사적인 발견이 이루어졌습니다. 고고학자들이 지하 묘지를 발굴하던 중 세 개의 테라코타 석판으로 봉인된 벽감을 발견했는데, 석판에는 붉은 글씨로 비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석판의 순서가 뒤바뀌어 있었지만, 이를 재배열하자 라틴어로 평화가 당신과 함께하기를이라는 뜻의 글귀가 나타났고, 필로메나라는 이름이 확인되었습니다. 초대 교회 시대에는 순교자들을 급히 매장해야 했기 때문에 석판의 순서가 바뀌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무덤 안에는 약 12세에서 13세 정도로 추정되는 소녀의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피로 추정되는 물질이 담긴 작은 유리병도 함께 있었습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순교자를 매장할 때 순교자의 피를 담은 용기를 함께 넣는 관습이 있었기에, 이는 이 소녀가 순교자였음을 시사하는 중요한 증거였습니다.

성 필로메나의 발견과 공경: 신앙과 역사적 검증의 여정

순교의 상징들과 초기 해석

석판에는 여러 상징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는 매장된 이의 신분과 순교 방식을 알려주는 단서가 되었습니다. 두 개의 닻은 희망을 상징했으며, 세 개의 화살은 순교의 방식을 나타냈습니다. 창과 종려나무 가지는 순교자의 승리를, 백합 한 송이는 순결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상징들을 종합하여 당시 전문가들은 이 소녀가 동정 순교자였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의학 전문가들과 신학자들로 구성된 위원회는 유골을 면밀히 조사했고, 뼈에서 화살에 의한 부상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이 무덤은 5세기에 로마를 침략했던 고트족과 롬바르드족의 약탈 시기에도 훼손되지 않고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는데, 이는 매우 드문 경우였습니다. 1805년 8월 10일, 유해는 비단으로 안을 댄 흑단 상자에 담겨 이탈리아 무냐노의 은총의 성모 본당으로 옮겨졌고, 이곳에 성녀의 성역이 마련되었습니다.

19세기 기적의 성녀로 불리다

성 필로메나에 대한 공경은 19세기에 폭발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프랑스의 평신도 여성이었던 마리 폴린 쟈리코가 심장병으로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태였다가 필로메나 성녀의 유해가 있는 무냐노를 순례한 직후 완전히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치유 사건의 증인이었던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깊은 감동을 받아 필로메나 성녀를 19세기의 위대한 기적의 성녀로 명명했습니다. 쟈리코는 이 은총에 감사하여 세 개의 가톨릭 협회를 설립했는데, 살아있는 묵주기도 협회, 신앙 전파 협회, 성소 협회가 그것입니다. 이후 유럽 전역에서 필로메나 성녀를 통한 기적적인 치유와 은총의 사례들이 보고되었고, 많은 신자들이 그녀의 전구를 청하며 순례를 떠났습니다. 아르스의 본당 사제였던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도 필로메나 성녀를 열렬히 공경했으며, 자신이 경험한 기적들이 그녀의 전구를 통한 것이라고 증언했습니다.

교황들의 공경과 승인

필로메나 동정 순교자에 대한 공경은 여섯 명의 교황들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 레오 12세, 비오 9세, 성 비오 10세, 베네딕토 15세가 그들입니다. 교황 레오 12세는 필로메나 성녀를 위해 제단과 경당을 봉헌하는 것을 허락했으며, 이는 교회가 그녀를 공식적으로 공경할 수 있는 성인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교황 비오 9세는 필로메나 성녀의 축일을 8월 11일로 지정했는데, 8월 10일은 이미 성 라우렌시오 순교자의 축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교황들은 그들의 권위로 필로메나가 동정이었고, 순교자였으며, 기적을 일으키는 하늘의 전구자라는 것을 거듭 선언했습니다. 이러한 교황들의 지지는 19세기 가톨릭 교회에서 필로메나 성녀 공경이 널리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전 세계 여러 나라에 필로메나 성녀에게 봉헌된 성당들이 세워졌고, 특히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그녀에 대한 신심이 매우 깊었습니다.

전승으로 전해진 순교 이야기

필로메나 성녀의 생애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1833년 세 명의 신심 깊은 신자들이 받았다는 발현과 환시를 통해 알려졌습니다. 이들은 서로 다른 나라에 살았고 서로를 알지 못했지만, 그들의 보고 내용은 놀랍게도 일치했습니다. 이 내용은 1833년 12월 21일 교황청의 허가를 받아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필로메나는 그리스의 왕족 출신으로, 부모와 함께 로마로 갔다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눈에 띄게 되었다고 합니다. 황제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결혼을 강요했지만, 필로메나는 자신이 하느님께 동정을 서원했다며 거절했습니다. 분노한 황제는 그녀에게 여러 차례 고문을 명령했지만, 매번 기적이 일어나 필로메나는 보호받았다고 합니다. 강물에 던져졌을 때는 천사들이 구해주었고, 화살로 쏘았을 때는 화살이 다 타버렸으며, 궁수들 중 여섯 명이 오히려 죽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기적을 보고 기독교로 개종했고, 최종적으로 필로메나는 참수형으로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20세기 역사적 검증과 전례력 변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가톨릭 교회는 성인들과 전례에 대한 역사적 검증 작업을 체계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부성성은 전례서와 성인표의 조사와 정정을 임무로 하는 역사과를 설치했고, 모든 성인들의 역사적 근거를 재검토했습니다. 필로메나 성녀의 경우, 1802년 카타콤바에서 발견된 유골이 정말로 필로메나라는 이름의 순교자인지, 그리고 전승으로 전해지는 생애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인지에 대해 확실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석판의 비문 해석에도 논란이 있었고, 순교 방식을 나타내는 상징들의 의미도 재해석될 여지가 있었습니다. 1961년, 교황청은 과거 150년 동안 공경받아온 필로메나 성녀의 축일을 전 세계 모든 전례력에서 삭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조치는 역사적 정확성에 기초한 것이었으며, 성인에 대한 공경을 가능한 한 오류로부터 보호하려는 교회의 노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교회의 공식 입장과 신심의 지속

중요한 것은 교황청이 필로메나가 성인이 아니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만 역사적으로 그녀가 성인이라는 것을 충분히 증명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는 가톨릭 교회가 신앙의 진리와 역사적 사실을 모두 중요하게 여기며, 신자들의 신심이 견고한 기초 위에 세워지기를 원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부성성 대변인은 신자들의 경건한 신념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보다 잘 설명하고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전례력에서 삭제되었다는 것은 보편 교회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축일을 지내지 않는다는 의미이지, 개인적인 신심이나 지역적 공경을 금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무냐노의 성역은 여전히 존재하며, 많은 신자들이 순례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신심을 존중하면서도, 역사적으로 확실하게 증명된 성인들을 중심으로 전례를 구성하려는 균형잡힌 접근을 취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전례 개혁

필로메나 성녀의 전례력 삭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후에 이루어진 광범위한 전례 개혁의 일부였습니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린 공의회는 교회의 쇄신과 현대화를 목표로 했으며, 전례 역시 역사적 근거가 확실한 기초 위에 재정립하고자 했습니다. 1969년 개정된 로마 미사 경본에서는 많은 성인들의 축일이 재검토되었고, 역사적 실존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부족한 경우 보편 전례력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이는 성인 공경 자체를 약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견고하고 신뢰할 수 있는 기초 위에 세우려는 시도였습니다. 같은 시기에 성 크리스토폴로와 같은 다른 성인들도 비슷한 이유로 보편 전례력에서 제외되었지만, 지역 교회에서는 여전히 공경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습니다. 이러한 개혁은 가톨릭 교회가 전통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역사적 진실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존중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앙과 역사 사이의 긴장

필로메나 성녀의 사례는 가톨릭 교회가 직면하는 신앙과 역사적 검증 사이의 긴장을 잘 보여줍니다. 한편으로는 19세기 동안 수많은 기적과 치유가 보고되었고, 여섯 명의 교황이 그녀를 공경했으며, 무수한 신자들이 그녀의 전구를 통해 은총을 받았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러한 영적 열매들은 부인할 수 없는 실재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 고고학과 역사학의 방법론으로 볼 때, 1802년에 발견된 유골이 정확히 누구의 것인지, 그리고 전승으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인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교회는 이 두 측면을 모두 존중하면서, 보편 전례에서는 역사적으로 확실한 성인들을 기념하되, 개인적 신심의 영역에서는 필로메나 성녀에 대한 공경을 계속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지혜로운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교회가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을 따르는 것도 아니고, 검증되지 않은 전승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현대 신자들에게 주는 교훈

필로메나 성녀의 이야기는 현대를 살아가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여러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첫째, 진정한 신앙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직함과 양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필로메나 성녀의 축일을 전례력에서 삭제한 것은 과거의 신심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진실한 기초 위에 신앙을 세우려는 노력이었습니다. 둘째, 성인 공경의 본질은 역사적 세부사항보다는 그 영적 의미에 있다는 것입니다. 필로메나 성녀를 공경했던 신자들이 경험한 치유와 은총은 실제적이었으며,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신앙에 응답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셋째, 교회는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계속 성장하고 발전하며, 때로는 과거의 실천을 재검토하고 수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전례 개혁은 이러한 교회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마지막으로, 개인적 신심과 공적 전례 사이에는 구분이 있으며, 둘 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균형을 지혜롭게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 연표

4세기 추정필로메나 순교전승에 따르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순교
1802년 5월 25일유골 발견로마 프리실라 카타콤바에서 소녀의 유골과 비문 발견
1805년 8월 10일유해 이장이탈리아 무냐노의 은총의 성모 본당으로 유해 이장
1830년대기적적 치유 보고마리 폴린 쟈리코의 치유 등 여러 기적 사례 보고
1833년 12월 21일전승 내용 출판발현 내용을 담은 책이 교황청 허가를 받아 출판
19세기 중반교황들의 승인그레고리오 16세 등 여러 교황이 공경 승인
19세기 후반전 세계 확산유럽과 미주 대륙에 필로메나 성녀 성당들 건립
20세기 초역사적 검증 시작예부성성 역사과 설치, 성인들에 대한 체계적 연구
1961년전례력 삭제역사적 증거 부족으로 보편 전례력에서 축일 삭제
1962-1965년제2차 바티칸 공의회전례 개혁과 역사적 근거 강화 결정
1969년로마 미사 경본 개정새로운 전례력 공포, 필로메나 축일 미포함
현대개인 신심 지속무냐노 성역 유지, 개인적 공경은 계속 허용

참고문헌 및 참고사이트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홈페이지 - 성인자료실 (https://www.cbck.or.kr)
  • 가톨릭신문 - 성녀 필로메나 사거 없어 (1961년 기사)
  • 가톨릭 백과사전 - 필로메나 및 전례 개혁 항목
  • 로마 순교록(Martyrologium Romanum) - 역대 개정판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 바티칸 공식 홈페이지 - 전례와 성인 공경 지침 (https://www.vatican.va)
  • 초대교회 카타콤바 연구 - 프리실라 카타콤바 발굴 기록
  • 19세기 가톨릭 교회사 - 성인 공경 운동 연구
  • 살아있는 묵주기도 협회 역사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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