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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시우스 황제와 기독교 국교화: 로마제국의 영적 대전환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5.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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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의 시대에 등장한 황제

347년 히스파니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는 군인 집안 출신으로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보였습니다. 4세기 후반의 로마제국은 내부적으로는 권력 투쟁과 경제 위기로, 외부적으로는 게르만족의 압박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동방 황제 발렌스가 고트족에게 패배하여 전사하자, 제국은 전례없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 위기의 순간에 서방 황제 그라티아누스는 379년 테오도시우스를 동방 황제로 임명했습니다. 당시 32세였던 테오도시우스는 신속하게 군대를 재편하고 고트족과의 협상을 통해 제국의 안정을 회복했습니다. 그는 단순한 무력보다는 외교적 해결을 선호했으며, 382년 고트족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그들을 제국 내에 정착시켰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성공적이었으나 장기적으로는 게르만족의 로마 침투를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테오도시우스는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니케아 신경을 따르는 정통 신앙을 확고하게 지켰습니다. 그의 개인적 신앙은 이후 제국 전체의 종교 정책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와 기독교 국교화: 로마제국의 영적 대전환

380년 테살로니카 칙령과 기독교 국교화

380년 2월 27일,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테살로니카에서 역사적인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이 칙령은 니케아 공의회의 신앙을 따르는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유일한 합법적 종교로 선포했습니다. 칙령의 핵심 내용은 모든 제국 신민이 사도 베드로가 로마인들에게 전한 신앙을 따라야 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동등한 위엄과 삼위일체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기독교를 인정하는 수준을 넘어서 국가가 특정 신학적 입장을 공식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지 67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여러 종교 중 하나로 인정했지만, 테오도시우스는 이를 유일한 정통 신앙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결정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습니다. 천년 동안 다신교를 숭배해온 로마제국이 유일신 신앙을 국가 이념으로 채택한 것입니다. 칙령은 또한 아리우스파를 비롯한 모든 이단을 단죄했습니다. 아리우스파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거나 축소하는 입장으로,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미 정죄되었지만 여전히 제국 내에서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테오도시우스는 이단에 대해 매우 강경한 태도를 취했으며, 이단 신봉자들에게서 교회 건물을 몰수하고 공직 취임을 금지했습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와 신앙의 확립

380년의 칙령을 뒷받침하기 위해 테오도시우스는 381년 5월 콘스탄티노플에서 제2차 세계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이 공의회에는 동방교회의 150명의 주교들이 참석했으며, 니케아 신경을 재확인하고 보완했습니다. 공의회는 성령의 신성을 부정하는 마케도니우스파를 정죄했고, 성령이 성부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신다는 교리를 명확히 했습니다. 오늘날 미사에서 낭송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은 바로 이 공의회에서 완성된 것입니다. 공의회는 또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의 지위를 로마 다음으로 격상시켰는데, 이는 훗날 동서교회 분열의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테오도시우스는 공의회 결정을 제국법으로 강제했으며, 이단 주교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교회를 정통파에게 넘겨주도록 명령했습니다. 특히 콘스탄티노플의 아리우스파 교회들을 몰수하여 정통 주교들에게 주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교회의 통합에는 기여했지만, 동시에 종교적 불관용의 선례를 남겼습니다. 가톨릭 전통은 이 공의회를 신앙의 순수성을 지킨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하지만, 강압적 방법에 대해서는 역사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이교 숭배의 금지와 신전의 폐쇄

테오도시우스는 기독교를 확립하는 동시에 전통적인 로마 다신교를 체계적으로 억압했습니다. 391년과 392년 사이에 일련의 칙령을 통해 모든 이교 숭배 행위를 금지했습니다. 동물 희생제사, 점술, 신탁 등 이교 의식이 불법화되었고, 위반자에게는 무거운 벌금과 처벌이 가해졌습니다. 수백 년 동안 로마 종교의 중심이었던 신전들이 폐쇄되거나 교회로 개조되었습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세라페움 신전은 391년 기독교 군중에 의해 파괴되었는데, 당시 총대주교 테오필루스가 이를 묵인하거나 심지어 부추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로마의 전통주의 원로원 의원들은 이러한 조치에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특히 원로원의 승리 여신상 제거 문제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원로원 의원 심마쿠스는 전통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는 유명한 연설을 했지만,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오가 이에 반박하며 황제를 설득했습니다. 결국 승리 여신상은 제거되었고, 이는 로마 전통 종교의 상징적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제국 내 문화적 갈등을 심화시켰으며, 일부 지식인들은 은밀히 이교 신앙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민중은 점차 기독교로 개종했고, 5세기 초에 이르러 이교는 사실상 소멸했습니다.

테살로니카 학살과 황제의 참회

테오도시우스의 통치에서 가장 어두운 사건은 390년의 테살로니카 학살입니다. 이 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나 주둔 장군이 살해되자, 분노한 황제는 무차별적인 보복을 명령했습니다. 군대는 경기장에 모인 시민들을 공격하여 약 7천 명을 학살했습니다. 이 잔혹한 사건은 제국 전역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오는 황제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죄를 고백하고 참회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암브로시오는 황제가 참회하기 전까지는 성찬례에 참여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하던 테오도시우스였지만, 결국 암브로시오의 권위 앞에 굴복했습니다. 390년 성탄절, 황제는 밀라노 대성당에서 공개적으로 참회했고, 여러 달간 보속을 행했습니다. 이 사건은 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세속 권력의 최고 정점인 황제조차도 교회의 도덕적 권위 아래 있다는 원칙이 확립된 것입니다. 중세 유럽에서 교황권이 세속 군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신학적 근거가 바로 여기에서 마련되었습니다. 암브로시오와 테오도시우스의 관계는 이후 교회와 국가의 이상적 관계 모델로 자주 언급되었습니다. 황제는 교회의 아들이지 주인이 아니라는 암브로시오의 말은 가톨릭 정치신학의 핵심 원리가 되었습니다.

제국의 최후 통일과 역사적 유산

394년 테오도시우스는 서방의 찬탈자 에우게니우스를 프리기두스 강 전투에서 격파하고 로마제국을 마지막으로 통일했습니다. 이 전투는 기독교와 이교의 상징적 대결로도 해석되었는데, 에우게니우스가 이교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승리 후 테오도시우스는 제국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동방은 장남 아르카디우스에게, 서방은 차남 호노리우스에게 맡겼습니다. 이 분할은 사실상 영구적인 것이 되어 로마제국의 동서 분열을 확정지었습니다. 395년 1월 17일, 테오도시우스는 밀라노에서 48세의 나이로 선종했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암브로시오 주교가 집전했으며, 추도사에서 암브로시오는 황제를 기독교 신앙의 수호자로 찬양했습니다. 테오도시우스는 가톨릭교회에서 성인으로 공경받지는 않지만, 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의 국교화 정책은 기독교가 유럽 문명의 토대가 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중세 가톨릭 교회의 세력은 테오도시우스가 닦은 기초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유산은 양면적입니다. 한편으로는 교회의 발전과 신앙의 확립에 기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 불관용과 강압의 선례를 남겼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종교자유선언을 통해 강제 개종을 거부하고 양심의 자유를 인정했는데, 이는 테오도시우스 시대의 정책에 대한 역사적 반성이기도 합니다.

주요 역사적 사건 연표

연도 사건
347년 히스파니아에서 테오도시우스 출생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발렌스 황제 전사
379년 1월 19일 테오도시우스 동방 황제로 즉위
380년 2월 27일 테살로니카 칙령 발표 (기독교 국교화)
381년 5월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제2차 세계 공의회)
382년 고트족과 평화조약 체결
390년 테살로니카 학살 사건 및 황제의 공개 참회
391-392년 이교 숭배 금지 칙령들 발표
394년 프리기두스 강 전투 승리, 제국 최후 통일
395년 1월 17일 밀라노에서 선종 (향년 48세), 제국 동서 분할

참고문헌 및 추가 정보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8
  • 켈리 J.N.D., 『초기 그리스도교 교리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2
  • 에반스 G.R., 『중세 교회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6
  •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위원회, 『한국가톨릭대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1997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종교자유선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65
  • 카메론 아베릴, 『후기 로마제국사』, 이론과실천, 2007
  • 브라운 피터, 『고대 말기의 세계』, 새물결플러스, 2009
  • 바티칸 공식 웹사이트 (vatican.va) - 공의회 문헌 자료
  • Catholic Encyclopedia (newadvent.org) - Theodosius I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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