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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교회를 뒤흔든 핵인싸, 성 프란치스코 이야기! (feat. 청빈과 사랑)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5.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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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잣집 아들에서 성인까지, 프란치스코의 놀라운 변화

중세 이탈리아 아시시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난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성 프란치스코(1181-1226)인데요. 이 사람이야말로 13세기 가톨릭교회에 혁신적 변화를 가져온 진정한 혁명가였답니다.

오늘은 부유한 상인의 아들에서 청빈과 사랑의 성인이 된 프란치스코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그의 삶과 가르침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어떤 의미를 주는지 알아보시죠.

성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의 젊은 시절과 회심

화려했던 청춘 시절

프란치스코 베르나르도네는 아시시의 부유한 직물상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젊은 시절의 그는 요즘으로 치면 완전한 '금수저'였죠. 좋은 옷을 입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어요.

하지만 1202년 아시시와 페루자 사이의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면서 그의 인생에 큰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1년간의 감옥 생활은 그에게 인생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를 주었답니다.

운명을 바꾼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의 체험

석방된 후에도 프란치스코의 마음은 평안하지 않았어요. 그러던 중 1205년 무너져가는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하던 중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온 것이죠. "프란치스코야, 가서 내 집을 고쳐라. 보다시피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있지 않느냐." 이 말씀을 듣고 그는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꾸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버지와의 결별, 새로운 삶의 시작

모든 것을 포기한 극적인 결단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의 재산을 성당 수리에 사용했다가 큰 갈등을 겪게 됩니다. 결국 1206년 아시시 주교 앞에서 아버지에게 모든 옷을 벗어 돌려주며 완전한 결별을 선언했어요.

"지금까지는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를 아버지라고 불렀지만, 이제부터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을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다." 이 말과 함께 그는 세속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절대적 청빈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나환자들과의 만남이 가져온 변화

프란치스코의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는 나환자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원래 나병을 극도로 혐오했던 그가 어느 날 길에서 만난 나환자를 끌어안고 키스한 사건은 그의 완전한 회심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어요.

이후 그는 나환자들을 돌보며 가장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프란치스코회 창립과 새로운 수도 운동

동료들의 합류와 공동체 형성

프란치스코의 삶에 감동받은 사람들이 하나둘 그에게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베르나르도, 피에트로, 질레스 등이 초기 동반자들이었죠.

1209년 복음서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듣고 감동받은 프란치스코는 동료들과 함께 완전한 청빈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코회의 시작이었어요.

 

교황 인노첸시우스 3세의 승인

1210년 프란치스코는 11명의 동료들과 함께 로마로 가서 교황 인노첸시우스 3세에게 자신들의 수도 규칙을 승인받고자 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극단적이라며 주저했던 교황도 결국 구두로 승인해 주었어요.

이는 당시 교회가 안고 있던 부패 문제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을 교황도 인정했기 때문이었답니다.

 

 

프란치스코의 혁신적인 영성과 가르침

절대적 청빈의 실천

**"가장 완전한 기쁨"**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은 정말 인상적입니다. 그는 물질적 소유나 명예가 아닌, 고난 속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기쁨이라고 말했어요.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은:

  • 개인 소유 완전 금지
  • 노동을 통한 생계유지
  • 돈 대신 음식으로만 보상받기
  • 가난한 이들과 함께 생활하기

 

자연과 모든 피조물에 대한 사랑

프란치스코는 모든 피조물을 형제자매로 여기는 독특한 영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유명한 **"태양의 찬가"**에서 그는 태양을 형제, 달을 자매, 물과 불과 바람을 형제자매라고 불렀어요.

이런 자연 친화적 영성은 현대 생태 영성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답니다.

 

 

십자군 시대의 평화주의자

이슬람 세계와의 만남

1219년 제5차 십자군 전쟁 중에 프란치스코는 놀라운 행동을 보였습니다. 전쟁터를 가로질러 이집트 술탄 알 카밀을 직접 만나러 간 것이죠.

그는 무력이 아닌 대화와 사랑으로 이슬람교도들을 개종시키려 했어요. 비록 개종에는 실패했지만, 술탄과 평화롭게 대화하며 서로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비폭력과 평화의 메시지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시대에 프란치스코는 **"평화를 빕니다"**라는 인사말을 사용했어요.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평화 메시지였답니다.

그의 평화주의 사상은 후에 많은 평화 운동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어요.

여성 수도 운동의 개척자, 성녀 클라라

클라라와의 만남과 여성 수도회 창립

1212년 아시시의 귀족 가문 출신인 클라라 파바로네가 프란치스코의 설교에 감동받아 세속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녀를 도와 가난한 클라라 수녀회(클라라회)를 창립했어요.

클라라회는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완전한 청빈 서원을 하는 수도회가 되었답니다. 이는 당시 여성 수도 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었어요.

 

평생의 영적 동반자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의 가장 충실한 협력자이자 영적 동반자였습니다. 그녀는 42년간 엄격한 은둔 생활을 하면서도 프란치스코회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어요.

 

 

오상 신비와 프란치스코의 마지막

라 베르나 산에서의 오상 체험

1224년 라 베르나 산에서 40일간 금식기도를 하던 중 프란치스코는 놀라운 체험을 합니다. 6개 날개를 가진 세라핌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의 못 자국을 그의 손과 발, 옆구리에 새겨준 것이죠.

오상(五傷) 신비는 가톨릭 역사상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오상 사례가 되었어요.

1226년 선종과 시성

온몸이 쇠약해진 프란치스코는 1226년 10월 3일 45세의 나이로 선종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자매인 죽음을 환영합니다"**였다고 전해져요.

놀랍게도 그는 선종한 지 불과 2년 후인 1228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에 의해 시성 되었답니다.

 

 

현대에도 살아있는 프란치스코의 정신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연결점

2013년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에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 환경 보호, 평화 추구 등 성 프란치스코의 가치들을 현대에 실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죠.

 

현대 사회에 주는 메시지

성 프란치스코의 삶과 가르침은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 물질주의를 넘어선 진정한 행복
  • 환경과 생명에 대한 존중
  •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
  • 종교와 문화를 초월한 평화와 대화

13세기 이탈리아의 한 젊은이가 시작한 청빈과 사랑의 혁명은 8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진정한 행복이 소유에 있지 않고 나눔과 사랑에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분이에요.

그의 이야기는 오늘날 물질만능주의와 환경 파괴, 갈등과 분열로 고통받는 우리 사회에 소중한 통찰과 희망을 선사합니다. 작은 것에서 시작된 그의 변화가 온 세상을 바꾼 것처럼,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사랑을 실천해 나간다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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