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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회와 세계사의 만남13

북한 지역 천주교의 몰락: 광복후 평양교구의 비극적 역사 북한 천주교의 잃어버린 역사북한 지역의 천주교 역사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아픈 상처 중 하나입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의 기쁨을 맞았던 북한 천주교회는 불과 몇 년 만에 철저한 탄압과 소멸의 길을 걸었습니다. 평양교구를 중심으로 한 북한 지역 천주교의 몰락 과정을 살펴보면, 종교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하고 취약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광복 직후 북한 천주교의 짧은 부흥기 (1945-1948)해방의 기쁨과 새로운 희망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북한 지역의 천주교회는 새로운 희망을 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동안 억압받았던 종교 활동이 다시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았습니다. 평양교구를 비롯해 함흥, 원산 등지의 성당들에서는 신자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고, 중단되었던 종교 교육과 전례 활동이.. 2025. 7. 31.
한국 가톨릭이 어떻게 체계적으로 발전했을까? 교구 설립의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혹시 우리나라 천주교가 어떻게 지금처럼 체계적으로 조직되었는지 궁금하신 적 있으세요? 오늘날 전국 각지에서 볼 수 있는 성당들과 교구 체계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건 아니에요. 특히 1911년 경성교구가 설립된 이후 평양, 대구, 전주 등으로 교구가 나뉘면서 현대적인 교회 체계가 구축되는 과정은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가득해요.오늘은 한국 천주교가 어떻게 체계적으로 발전해 왔는지, 그 역사적 여정을 함께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복잡해 보이는 교구 체계의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드릴게요!교구가 뭐고, 왜 필요했을까요?교구 시스템의 기본 개념먼저 '교구'가 뭔지부터 알아볼까요? 교구는 쉽게 말해서 천주교회의 '행정구역'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마치 우리나라가 서울특별시, 경기도, 충청도 등으로 나뉘는 것.. 2025. 7. 30.
명동성당 이야기: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와 함께한 특별한 공간 명동 한복판에 우뚝 선 붉은 벽돌 성당, 한 번쯤은 보셨을 거예요. 바로 명동성당입니다. 쇼핑하러 명동에 갔다가 우연히 마주친 분들도 많으실 텐데요, 이 아름다운 건물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명동성당은 1898년에 완공된 이후 지금까지 12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나라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함께해온 특별한 공간입니다. 오늘은 이 성당이 어떻게 우리 역사 속에서 그토록 소중한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 그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해요. 명동성당이 태어난 배경힘든 시절을 견뎌낸 한국 천주교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온 건 1784년이었어요. 하지만 처음 100년 동안은 정말 힘든 시절이었죠. 조선시대에는 천주교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거든요. 1866년 병인박해까.. 2025. 7. 30.
거대한 전환점: 강화도조약과 한불수호조약, 조선 천주교의 운명을 바꾸다 19세기말, 잠겨 있던 조선의 문이 거친 파도처럼 밀려오는 근대화의 물결 앞에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물결 속에서, 오랜 박해의 그림자에 갇혀 있던 조선 천주교는 생존의 몸부림을 넘어 새로운 변화의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1876년 강화도조약과 1886년 한불수호조약을 기점으로 조선 천주교의 지형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 역사적 맥락과 의미를 심층적으로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 닫힌 문을 부수는 소리: 1876년 강화도조약과 미지의 미래조선은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정책 아래, 서구 열강의 통상 요구와 천주교 유입에 결연히 저항해 왔습니다. 병인박해(1866년)와 병인양요, 신미양요(1871년)는 그 치열했던 저항의 역사적 증거였죠. 그러나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거스를 수.. 2025. 7. 30.
조선의 새로운 전환점: 주문모 신부 밀입국 (1795년) 1795년, 조선 천주교사에 또 다른 중요한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중국에서 파견된 최초의 외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 1752-1801)가 조선 땅에 발을 디딘 것입니다. 세례명 야고보(Jacobus)를 가진 이 중국인 신부의 밀입국은 이승훈의 영세로 시작된 조선 천주교가 비로소 완전한 교회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조선 천주교의 절실한 필요이승훈의 베이징 영세(1784년) 이후 11년 동안 조선 천주교는 평신도들만으로 운영되어 왔습니다. 윤유일, 정약종, 이기양 등의 지도자들이 교회를 이끌어왔지만, 성사 집행 권한이 없는 평신도로서는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특히 1791년 진산사건으로 촉발된 정부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조선 천주교도들은 정식으로 서품 받은 성직자의 필요성을.. 2025. 7. 27.
조선의 출발점: 이승훈의 베이징 영세 (1784년) 1784년, 조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사건이 베이징에서 일어났습니다. 바로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이 조선인 최초로 천주교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 역사적 순간은 단순한 개인의 종교적 선택을 넘어서 조선 땅에 천주교가 뿌리내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베이징으로 향한 특별한 여행이승훈은 진산 출신의 양반으로, 1783년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 동지사 일행으로 베이징에 갔습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그에게 단순한 사신 수행이 아니었습니다. 출발 전 그는 이미 서학(西學), 즉 서양 학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형제들과 함께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고 있었습니다.당시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비롯한 서학서들이 은밀히 유통되.. 2025.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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