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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와 순교 – 신앙의 증거와 교회의 승리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5.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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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의 신학적 의미와 가치

순교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마르티리아에서 유래했으며, 원래 증언 또는 증거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순교자는 단순히 신앙 때문에 죽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바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증거한 증인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에서 예수님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순교자들은 바로 이 최고의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전통에서 순교는 신앙의 최고 표현이자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순교자들은 자신의 피를 흘림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구원의 피에 결합됩니다. 교부 키프리아누스는 순교를 두 번째 세례라고 불렀는데, 이는 순교가 모든 죄를 씻어주고 순교자를 즉시 하늘나라로 인도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초기 교회는 순교자들을 특별히 공경했고, 그들의 무덤은 거룩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순교자의 유해는 성유물로 보존되었고, 그들의 축일에는 신자들이 무덤 앞에서 성찬례를 거행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성당의 제대 안에는 순교자나 성인의 유해를 모시는 관습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생애와 죽음을 기록한 순교록은 후대 신자들에게 신앙의 모범을 제시하는 중요한 영적 자료가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박해 배경과 원인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이유는 복합적이었습니다. 우선 종교적 차원에서, 로마는 다신교 사회였고 황제 숭배가 제국 통합의 핵심 요소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일신 신앙을 고백했고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로마 당국은 이를 국가에 대한 불경죄로 간주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전통 신들을 섬기지 않으면 신들의 노여움을 사서 재난이 닥친다고 믿었기에, 그리스도인들을 무신론자이자 공공의 적으로 여겼습니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인 사회 활동에서 분리되어 있었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검투사 경기나 극장 공연을 피했고, 이교 신전에서의 제사나 길드 모임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비사교성은 의심과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들이 비밀 모임을 갖고 형제 자매라고 부르며 사랑의 식사를 나눈다는 소문은 근친상간이나 식인 풍습 같은 터무없는 비난으로 왜곡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제국의 위기 시기에 희생양이 필요했던 권력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이용했습니다. 네로가 로마 대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떠넘긴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3세기 중반 제국이 외부 침입과 내부 혼란으로 흔들릴 때, 데키우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 같은 황제들은 전통 종교로의 회귀를 통해 제국을 재건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습니다. 이러한 다층적인 원인들이 결합하여 3세기에 걸친 간헐적이지만 지속적인 박해가 이어졌습니다.

박해와 순교 – 신앙의 증거와 교회의 승리

순교자들의 증언과 신앙 고백

초기 교회의 순교록들은 순교자들이 어떻게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지켰는지를 생생하게 전합니다.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오 주교는 로마로 호송되는 도중 여러 교회에 편지를 썼는데, 그는 자신이 맹수들의 이빨로 갈려서 그리스도의 순수한 빵이 되기를 갈망한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로마 교회에 자신을 구출하려는 시도를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면서, 순교를 통해 비로소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포 주교는 체포되었을 때 총독이 맹세하고 그리스도를 저주하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86년 동안 그리스도를 섬겨왔는데 그분이 나에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으셨는데 어떻게 나의 왕이시며 구세주이신 분을 모독할 수 있겠느냐고 대답했습니다. 화형대에 묶였을 때도 평온한 표정으로 기도를 드렸고, 불길이 그를 감쌌을 때 빵이 구워지는 것 같은 향기가 났다고 전해집니다. 리옹의 순교자들 중 여종 브랑디나는 가장 연약해 보였지만 가장 강인한 신앙을 보여주었습니다. 온갖 고문을 받으면서도 그녀는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악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라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십자가에 매달려 맹수들에게 던져졌지만, 다른 신자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그녀의 모습에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카르타고의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스는 젊은 어머니였지만 갓난아기를 두고 순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페르페투아는 감옥에서 쓴 일기에 아버지가 배교를 권유했지만 거부한 이야기를 기록했고, 환시 속에서 천국의 아름다움을 미리 맛보았다고 적었습니다.

박해 시기의 교회 내부 갈등과 배교자 문제

박해는 교회 공동체에 외부적 위협뿐만 아니라 내부적 시련도 가져왔습니다. 모든 신자가 순교자의 용기를 가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때는 제국 전역의 모든 주민이 황제에게 제사를 드리고 증명서를 받도록 강요받았습니다. 이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문과 죽음의 두려움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일부는 실제로 제사를 드렸고, 일부는 뇌물을 주고 제사를 드린 것처럼 증명서만 받았습니다. 박해가 끝난 후 이들 배교자들이 교회로 돌아오고자 했을 때, 교회는 심각한 딜레마에 직면했습니다. 엄격한 입장을 취한 사람들은 배교자들을 용서할 수 없으며 다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온건한 입장은 진정한 회개를 한다면 교회의 품으로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로마의 주교 칼리스투스는 회개하는 배교자들에게 참회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사제 노바티아누스는 이를 반대하며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첨예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 때 성경을 당국에 넘겨준 주교들의 서품이 유효한가 하는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도나투스파는 배교한 주교가 집전한 성사는 무효라고 주장했지만, 정통 교회는 성사의 유효성은 집전자의 거룩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능에 달려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는 도나투스파를 반박하며,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이며 최종 심판 때까지 가라지와 밀이 함께 자라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논쟁들은 고통스러웠지만, 교회가 자신의 본성과 성사의 신학을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순교자 공경과 영성의 발전

순교자들에 대한 공경은 초기 교회부터 자연스럽게 발전한 전통입니다. 신자들은 순교자들의 죽음을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천국 탄생일로 기념했습니다. 순교자가 처형당한 날을 디에스 나탈리스, 즉 탄생일이라 부른 것은 그날이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난 날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순교자의 무덤은 거룩한 장소가 되었고, 매년 순교 기념일에 신자들이 모여 성찬례를 거행했습니다. 이러한 모임은 현재의 성인 축일 전통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유해는 소중히 보존되었고, 분할되어 여러 지역으로 전해졌습니다. 이는 성유물 공경의 시작이었으며, 나중에 성당을 건축할 때 제대 안에 순교자의 유해를 모시는 관습으로 이어졌습니다. 순교록의 낭독은 전례의 일부가 되었고, 순교자들의 생애는 설교와 교리교육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은 하늘나라에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 중재한다고 믿어졌기에, 신자들은 순교자들의 전구를 청했습니다. 이는 성인 공경과 전구 기도 전통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용기와 신앙은 그리스도를 닮은 삶의 모범으로 제시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을 자신의 생명을 통해 재현했기에, 완전한 그리스도인의 표상으로 여겨졌습니다. 수도원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수도자들은 순교자들을 자신들의 영적 선조로 보았습니다. 피를 흘리는 붉은 순교는 불가능해졌지만, 세상을 포기하고 금욕적 삶을 사는 흰 순교를 통해 순교자들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했습니다. 이처럼 순교자 공경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앙 전통으로 발전하여 가톨릭 영성의 핵심 요소가 되었습니다.

박해의 종식과 교회의 승리

311년 갈레리우스 황제가 임종을 앞두고 관용 칙령을 발표하면서 대박해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그는 칙령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모이게 하되 국가 질서를 어지럽히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흥미롭게도 갈레리우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과 국가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이는 박해자조차 그리스도인들의 기도 능력을 인정했음을 보여줍니다. 313년 밀라노 칙령은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를 합법적 종교로 인정하고 신앙의 자유를 보장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몰수된 교회 재산을 반환하고 교회 건축을 지원했습니다. 3세기에 걸친 박해와 순교의 시대가 마침내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승리는 단순히 법적 인정이나 물질적 번영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승리는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킨 수많은 신자들의 증언이었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2세기에 이미 예언했듯이,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박해가 교회를 파괴하기는커녕 오히려 신앙을 순수하게 하고 공동체를 강화시켰습니다. 순교자들의 용기는 비신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고, 많은 이들이 이들의 증언을 보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습니다. 4세기 초가 되면 로마 제국 인구의 상당 부분이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380년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선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박해 시대가 끝나면서 교회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더 이상 순교의 위협이 없어지자 일부 신자들의 신앙이 느슨해지는 경향이 나타났고, 세속 권력과의 긴밀한 관계는 새로운 유혹을 가져왔습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수도원 운동이 발전했고, 교회는 계속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성찰하며 복음의 본질을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현대 신앙인에게 주는 교훈과 도전

초기 교회의 박해와 순교 역사는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여전히 살아있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우선 신앙은 단순한 지적 동의나 종교 의식 참여가 아니라 전 생애를 바치는 헌신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생명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자신의 죽음으로 증명했습니다. 이는 현대의 편안함과 안전을 추구하는 문화 속에서 신앙의 진정한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되묻게 합니다. 또한 박해 시대의 교회는 신앙 공동체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순교자들은 고립된 개인으로 순교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기도와 격려 속에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오늘날 개인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교회 공동체의 연대와 상호 지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줍니다. 순교자들의 용서와 사랑의 정신도 주목할 만합니다. 많은 순교자들이 죽음의 순간에도 박해자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용서의 사랑을 실천한 것이며, 현대의 갈등과 증오가 넘치는 세상에 절실히 필요한 덕목입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받고 있습니다. 중동과 아프리카, 아시아의 일부 지역에서는 신앙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이들이 많습니다. 초기 교회 순교자들의 증언은 이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며, 자유로운 나라의 신자들에게는 박해받는 형제자매들을 위해 기도하고 연대할 책임을 상기시킵니다. 또한 서구 사회의 세속화와 그리스도교 가치에 대한 거부는 새로운 형태의 박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리적 폭력은 없지만 조롱과 배척, 차별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초기 교회와는 다른 형태지만 역시 증언이 필요합니다. 순교자들의 유산은 우리에게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충실함을 잃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주요 박해와 순교 사건 연표

연도 사건 주요 순교자 및 의미
64년 네로 황제의 박해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 순교, 로마 최초의 대규모 박해
95년경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사도 요한 파트모스 섬 유배, 황제 숭배 거부자 탄압
107년 트라야누스 치세 이그나티오 안티오키아 주교 순교, 주교 중심 교회론 강조
156년 스미르나 박해 폴리카르포 주교 순교, 최초의 순교록 작성
177년 리옹과 비엔나 박해 브랑디나 등 48명 순교, 갈리아 지역 교회 시련
202년 세베루스 황제의 박해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스 순교, 여성 순교자의 증언
250년 데키우스의 체계적 박해 전 제국 황제 숭배 강요, 배교자 문제 발생
258년 발레리아누스의 박해 교황 식스투스 2세와 부제 라우렌시오 순교, 성직자 집중 탄압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대박해 시작 교회 건물 파괴, 성경 소각, 성직자 체포
304년 대박해 심화 아녜스, 세바스티아누스 등 수많은 순교자 발생
311년 갈레리우스의 관용 칙령 박해 공식 종료, 그리스도인 모임 허용
313년 밀라노 칙령 그리스도교 공인, 신앙의 자유 보장

참고 자료

참고 문헌 및 웹사이트

1. 순교자 행전 및 순교록 모음 - 초기 교회의 순교자 기록

2.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 - 박해 시대 역사 기록

3.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 순교자 및 교회사 자료

4. 가톨릭 백과사전 - 순교와 박해 관련 항목

5. 교부 문헌 - 키프리아누스, 테르툴리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저작

6. 바티칸 순교자 성성 공식 자료

7. 타키투스, 플리니우스 등 로마 역사 문헌

본 글은 역사적 사료와 교회 전승, 순교록에 기초하여 작성되었으며, 저작권이 있는 특정 저작물의 내용을 직접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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