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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세계사와 함께 보는 가톨릭

성녀 카타리나 시에나와 교회 쇄신 - 여성의 목소리가 교회를 깨우다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6.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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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집안의 스물네 번째 딸

1347년 3월 25일,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작은 도시 시에나에서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염색공 야코포 베닌카사였고, 어머니 라파 디 피아첸테는 무려 스물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카타리나는 그중 스물네 번째였습니다.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언니는 곧 세상을 떠났고 카타리나만 살아남았죠. 평범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이 소녀가 훗날 교황의 친구가 되고, 유럽 정치에 영향을 미치며, 교회학자 칭호를 받는 위대한 성녀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어요. 카타리나가 태어난 해는 공교롭게도 흑사병이 유럽에 처음 상륙한 해였습니다. 그녀는 말 그대로 죽음과 고통의 시대에 태어난 거예요. 어린 시절 그녀는 이미 특별한 영적 체험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여섯 살 때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환시를 보았다고 하죠. 그 순간부터 카타리나의 마음은 오직 하느님을 향했어요.

성녀 카타리나 시에나와 교회 쇄신 - 여성의 목소리가 교회를 깨우다

세상과의 결별, 하느님과의 신비로운 일치

카타리나는 일곱 살 때 평생 동정을 지키기로 서원했어요. 하지만 부모님은 열여섯 살이 된 딸을 결혼시키려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죠. 카타리나는 단호하게 거부했어요. 자신은 그리스도와 영적 혼인을 맺었으니 다른 누구와도 결혼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부모를 설득한 그녀는 집 안에 작은 방을 얻어 그곳에서 기도와 고행의 생활을 시작했어요. 3년 동안 거의 침묵 속에서 지내며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추구했습니다. 먹는 것도 최소한으로 줄였고, 잠도 거의 자지 않았죠. 현대 의학적 관점에서는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당시 중세 영성 전통에서 이런 고행은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는 방식이었어요. 1366년, 열아홉 살이 되었을 때 카타리나는 도미니코 제3회에 입회했습니다. 제3회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이 세속에 살면서도 수도회 영성을 살아가는 모임이었죠. 그녀는 검은 옷과 흰 베일을 입고 '만텔라테'라 불리는 이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어요.

침묵에서 행동으로, 병자를 돌보다

1368년경 카타리나는 하느님으로부터 침묵의 방에서 나와 세상으로 들어가라는 영감을 받았어요. 그녀는 기도실에서 나와 시에나의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나병 환자들과 흑사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죠. 당시 나병은 가장 무서운 질병 중 하나였고, 나병 환자들은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되어 살았어요. 카타리나는 그들의 상처를 씻어주고, 먹을 것을 나눠주며, 무엇보다 인간적인 존엄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어떤 환자가 그녀에게 욕설을 퍼붓고 모욕을 주어도 그녀는 미소로 응답했다고 해요. 그녀의 사랑은 조건 없는 것이었죠. 이런 활동을 통해 카타리나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제자들이 모여들었어요. 남녀노소,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이 그녀의 가르침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카타리나를 '맘마' 즉 어머니라고 불렀어요. 글을 읽을 줄 몰랐던 카타리나는 구두로 가르쳤고, 제자들이 그녀의 말을 받아적었습니다.

교황에게 보낸 대담한 편지들

14세기 중반, 가톨릭 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어요. 1309년부터 교황청이 로마를 떠나 프랑스 아비뇽에 자리잡은 상태였습니다. 이를 '아비뇽 유수'라고 부르죠. 교황이 로마를 떠난 것은 이탈리아 정치의 혼란 때문이었지만, 많은 이들은 교황이 프랑스 왕의 영향 아래 있다고 비판했어요. 게다가 성직자들의 부패와 세속화가 심각했습니다. 사제들이 여러 본당의 수입을 겸직하면서도 사목은 제대로 하지 않는 일이 흔했죠. 카타리나는 이런 상황을 보며 깊은 슬픔을 느꼈어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인데, 어찌 이토록 타락할 수 있는가 하는 통탄이었죠. 놀랍게도 이 무학의 여성은 교황에게 직접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한두 통이 아니라 수십 통의 편지를 보냈어요.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카타리나는 대담하게 교회 쇄신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타락한 성직자들을 바로잡고, 교황은 로마로 돌아가야 한다고 촉구했죠. 평범한 평신도 여성이 교황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어요.

교황을 만나러 아비뇽으로

1376년, 카타리나는 마침내 아비뇽으로 향했어요. 피렌체 공화국의 사절단 일원으로 교황을 만나러 간 것이죠. 당시 피렌체는 교황청과 전쟁 중이었고, 카타리나는 평화 중재자로 나섰습니다. 아비뇽에 도착한 그녀는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를 직접 알현했어요. 스물아홉 살의 무학한 여성이 교황 앞에 섰습니다. 하지만 카타리나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어요. 그녀는 교황에게 로마로 돌아갈 것을 간청했습니다. 교황좌는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로마에 있어야 한다고, 교회의 영적 쇄신을 위해서는 교황이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했죠. 놀랍게도 교황은 그녀의 말을 들었어요. 사실 그레고리오 11세도 이미 로마 귀환을 고려하고 있었지만, 추기경들과 프랑스 왕의 반대로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카타리나의 열정적인 호소는 교황의 결심에 힘을 실어주었어요. 1377년 1월 17일, 교황은 마침내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70년 가까이 계속된 아비뇽 유수가 끝난 것이죠. 물론 이것이 전적으로 카타리나 덕분만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역할이 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서방 대분열의 비극과 최후의 노력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어요. 1378년 그레고리오 11세가 선종하고 우르바노 6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는데, 일부 추기경들이 이를 무효라고 주장하며 클레멘스 7세를 대립교황으로 세웠습니다. 가톨릭 교회에 두 명의 교황이 존재하게 된 것이죠. 이를 '서방 대분열'이라고 불러요. 유럽은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으로 나뉘어 대립했습니다. 카타리나는 깊은 슬픔에 빠졌어요. 그토록 바라던 교회의 일치가 오히려 더 심한 분열로 이어진 것이니까요. 그녀는 우르바노 6세를 적법한 교황으로 인정하고 그를 지지했습니다. 교황의 요청으로 로마로 가서 교회 일치를 위해 기도하고 편지를 쓰며 노력했어요. 하지만 이미 그녀의 몸은 극심한 고행과 끊임없는 활동으로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1380년 초부터 그녀는 거의 음식을 먹지 못했고,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죠. 그해 4월 29일, 카타리나는 서른세 살의 나이로 로마에서 선종했습니다. 임종 직전까지 그녀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 기도했다고 해요. 죽음의 순간에도 그녀의 마음은 온통 교회를 향해 있었던 것이죠.

영원히 빛나는 유산, 대화와 편지

카타리나는 짧은 생애 동안 엄청난 양의 영적 저작을 남겼어요. 비록 글을 읽지 못했지만, 그녀는 제자들에게 구술하여 약 400통의 편지와 기도문, 그리고 '대화'라는 제목의 영성 저작을 남겼습니다. '대화'는 하느님 성부와 카타리나 사이의 대화 형식으로 쓰여진 신비신학 걸작이에요. 하느님의 섭리, 자유의지, 기도의 본질,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같은 깊은 신학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죠. 놀라운 것은 정식 신학 교육을 받지 않은 여성이 이토록 깊이 있는 신학적 통찰을 보여준다는 점이에요. 카타리나의 편지들은 교황, 추기경, 왕과 여왕, 정치가들뿐 아니라 평범한 신자들에게도 보내졌습니다. 그녀는 편지를 통해 교회 쇄신을 촉구하고, 평화를 권고하며, 영적 조언을 주었어요. 그녀의 문체는 직설적이고 열정적이었습니다. 때로는 거침없이 비판했고, 때로는 넘치는 사랑으로 격려했죠. 이 편지들은 중세 이탈리아어 문학의 걸작으로도 평가받고 있어요.

교회학자로 인정받은 여성

카타리나는 선종 후 81년이 지난 1461년 교황 비오 2세에 의해 시성되었어요. 1970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가 그녀를 교회학자로 선포했습니다. 교회학자라는 칭호는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신학적 인정이에요. 2천 년 가톨릭 역사에서 교회학자로 선포된 사람은 37명뿐이고, 카타리나는 그 중 첫 번째 여성이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여성 최초로 이 영예를 안은 거죠. 199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카타리나를 유럽의 공동 수호성인 중 한 명으로 선포했어요.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그녀를 통해 평신도, 특히 여성들도 교회 쇄신과 신학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어요. 카타리나의 삶은 신분, 성별, 학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과 교회에 대한 열정이 진정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오늘날에도 그녀는 영성가, 신학자, 사회활동가, 평화운동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인물이에요.

카타리나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성녀 카타리나 시에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까요? 첫째, 하느님께서는 세상이 무시하는 이들을 통해 놀라운 일을 하신다는 것이에요. 무학한 여성, 평범한 집안 출신의 소녀가 교황을 움직이고 역사를 바꿨습니다. 둘째, 진정한 용기는 지위나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확신에서 나온다는 것이죠. 카타리나는 교황이나 왕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진리를 말했어요. 셋째, 관상과 활동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카타리나는 깊은 기도 생활을 하면서도 동시에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교회 쇄신을 위해 헌신했죠. 넷째,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교회의 잘못까지 눈감아주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지도록 촉구하는 것이라는 점이에요. 카타리나는 교회의 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그것은 교회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현대 교회도 여전히 쇄신이 필요해요. 카타리나의 용기와 열정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성녀 카타리나 시에나 생애 연표

연도 카타리나의 생애 교회사적 배경
1347년 3월 25일 시에나에서 출생 흑사병 유럽 도래, 아비뇽 유수 진행 중
1353년경 첫 환시 체험, 평생 동정 서원 교황 인노첸시오 6세 재위
1363년 집안에서 은둔 생활 시작 교황 우르바노 5세 선출
1366년 도미니코 제3회 입회 우르바노 5세 잠시 로마 방문
1368년 병자 돌봄 시작, 제자들 모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선출
1370년 신비 체험 심화, 구술 저술 시작 아비뇽 유수 계속
1374년 흑사병 환자 돌봄, 고해신부 지정받음 도미니코회 총회 참석 허가
1375년 성흔 체험, 피렌체 방문 피렌체와 교황청 전쟁
1376년 여름 아비뇽 방문, 교황 알현 교황에게 로마 귀환 촉구
1377년 1월 교황의 로마 귀환 성공 아비뇽 유수 종식
1378년 초 대화 집필 완성 그레고리오 11세 선종, 우르바노 6세 선출
1378년 가을 서방 대분열의 슬픔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 등장
1379년 로마로 이주, 교회 일치 위해 활동 서방 대분열 심화
1380년 4월 29일 로마에서 선종, 향년 33세 대분열 계속 (1417년까지)
1461년 교황 비오 2세에 의해 시성 르네상스 시대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 교회학자 선포 여성 최초 교회학자
199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유럽 수호성인 선포 유럽 통합 시대

참고자료

  • 한국가톨릭대사전 - 한국교회사연구소
  • 가톨릭 성인전 자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www.cbck.or.kr)
  • 바티칸 홈페이지 성인 자료실 (www.vatican.va)
  • 가톨릭 평화신문 성인전 (www.cpbc.co.kr)
  •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 (www.causeway.or.kr)
  • 도미니코회 한국관구 성인 자료 (www.op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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