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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인과 교부

성녀 클라라 - 용감한 여성 성인, 시련을 극복한 신앙의 전사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5.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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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가문의 특권을 버리고 완전한 가난 속에서 여성 수도생활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위대한 성녀

 

 

13세기 아시시, 귀족 가문의 딸로 태어나다

1194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명문 귀족 가문 오프레두치오 집안에서 태어난 클라라는 처음부터 특별한 운명을 타고났어요. 아버지 파보리노 디 오프레두치오는 아시시에서 손꼽히는 기사 가문의 수장이었고, 어머니 오르툴라나는 독실한 신앙심으로 유명한 여성이었습니다. 클라라라는 이름 자체가 '밝은, 빛나는'이라는 뜻으로, 그녀의 삶을 미리 예언하는 것 같았어요.

당시 13세기 초 아시시는 정치적으로 매우 복잡한 상황이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파(기벨린)와 교황파(겔프) 사이의 갈등이 치열했고, 귀족들과 신흥 상인 계층 간의 대립도 심각했어요. 클라라의 가문은 전통적인 귀족 계층으로서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클라라는 남다른 신앙심을 보였어요. 어머니 오르툴라나의 영향을 받아 자주 기도하고 가난한 이들을 도왔습니다. 귀족 가문의 딸로서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클라라는 언제나 소박하고 겸손한 모습을 유지했다고 해요.

 

프란치스코의 설교, 인생을 바꾼 만남

1210년경, 16세의 클라라는 산 죠르죠 성당에서 프란치스코의 설교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프란치스코는 부와 명예를 버리고 완전한 가난을 선택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진정한 복음적 삶이 무엇인지 열정적으로 설교했습니다. 클라라는 이 설교를 듣고 자신도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을 품게 되었어요.

하지만 당시 여성이 종교적 소명을 따르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여성 수도원은 귀족층의 여성들이 편안하게 지내는 곳이었고, 진정한 복음적 가난을 실천하는 곳은 거의 없었어요. 클라라는 이런 현실에 만족할 수 없었고, 프란치스코에게 직접 조언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밀리에 만난 자리에서 프란치스코는 클라라의 진정성을 알아보았어요. 그녀가 정말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한 프란치스코는 클라라를 격려했습니다. 하지만 둘 다 이것이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지는 예상하지 못했을 거예요.

1212년 부활 전 주간, 운명적인 결단

1212년 3월 18일 밤, 18세의 클라라는 인생에서 가장 용감한 결단을 내렸어요. 가족들이 모두 잠든 사이 몰래 집을 빠져나와 포르지운쿨라로 향했습니다. 이날은 부활 전 주간의 종려 주일이었는데, 마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처럼 클라라도 새로운 삶으로의 여정을 시작한 거죠.

포르지운쿨라에서 기다리고 있던 프란치스코와 형제들 앞에서 클라라는 자신의 긴 머리를 자르고 화려한 옷을 벗어 버렸어요. 그리고 거친 회색 수도복을 입으며 가난과 정결, 순명을 서원했습니다. 이 장면은 정말 극적이고 감동적이었을 것 같아요. 귀족 가문의 아름다운 딸이 모든 세속적 특권을 포기하는 순간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어요. 클라라의 선택은 곧 온 아시시를 뒤흔드는 대사건이 되었습니다. 가문의 명예를 걸고 클라라를 되찾으려는 가족들과의 치열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가족의 맹렬한 반대와 불굴의 의지

클라라의 도피 소식을 들은 오프레두치오 가문은 경악했어요. 가문의 자존심에 큰 타격이었을 뿐만 아니라, 클라라가 지닌 상당한 지참금도 문제였습니다. 아버지와 삼촌들은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클라라를 집으로 데려오려 했어요.

가족들은 먼저 클라라가 머물고 있던 산 파올로 수녀원으로 몰려갔습니다. 검을 들고 위협하며 당장 집으로 돌아오라고 강요했지만, 클라라는 제단을 붙잡고 절대 굽히지 않았어요. "저는 이미 하늘의 신랑에게 약혼했습니다. 다른 누구와도 결혼할 수 없어요"라고 당당히 맞섰습니다.

가족의 압력이 계속되자 클라라는 산트'안젤로 디 판조 수녀원으로 피신해야 했어요. 하지만 여기서도 가족들의 추격은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삼촌 모날도는 클라라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가려 했는데, 그 순간 클라라의 머리에서 수건이 떨어져 삭발한 모습이 드러났어요. 이를 본 가족들은 충격을 받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산 다미아노, 새로운 수도 공동체의 시작

1212년 이른 봄, 클라라는 드디어 안식처를 찾았어요. 프란치스코가 처음 십자가의 음성을 들었던 산 다미아노 성당이었습니다. 이곳은 프란치스코가 직접 수리한 작고 소박한 성당이었는데, 클라라에게는 완벽한 장소였어요. 세상의 화려함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었거든요.

놀랍게도 클라라의 결단은 다른 여성들에게도 큰 영감을 주었어요. 불과 몇 주 후 클라라의 여동생 아녜스가 언니를 따라 세상을 버리고 산 다미아노로 왔습니다. 겨우 15세였던 아녜스의 합류는 가족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어요. 이번에는 12명의 무장한 기사들이 몰려와서 아녜스를 강제로 끌고 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아녜스를 끌고 가려던 기사들이 갑자기 아녜스를 들어올릴 수 없게 된 거예요. 아녜스의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고 해요. 이를 본 삼촌 모날도가 아녜스를 때리려 하자 그의 손이 마비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가족들은 포기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완전한 가난, 프란치스코보다 더 엄격한 청빈

산 다미아노에서 클라라는 프란치스코보다도 더 엄격한 가난을 실천했어요.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생활했고, 하루에 한 끼만 먹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침대 대신 맨바닥에서 잠을 잤고, 베개는 돌이나 나무 토막을 사용했어요. 이런 극단적인 금욕은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너무 심해 보일 수도 있지만, 당시 클라라에게는 진정한 자유였습니다.

클라라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절대 가난'이었어요. 개인뿐만 아니라 수도원 공동체 전체가 어떤 재산도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당시 다른 수도원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어요. 대부분의 수도원은 토지나 건물을 소유하고 있었거든요.

특히 클라라는 교황청의 경제적 지원도 거부했어요.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경제적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재산 소유를 허가하겠다고 했을 때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저는 가난으로부터 면제받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죠. 이런 철저한 신념은 당시로서는 정말 놀라운 것이었어요.

영적 지도자로서의 클라라

시간이 흐르면서 클라라의 명성은 유럽 전역에 퍼졌어요. 많은 여성들이 클라라의 삶에 감동받아 산 다미아노를 찾아왔고, 공동체는 점점 커져갔습니다. 클라라는 이들을 어머니의 마음으로 돌보며 영적으로 지도했어요. 그녀의 지혜와 덕행은 교황과 추기경들마저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클라라의 기도 생활은 특히 유명했어요. 하루 종일 기도에 잠겨 있는 경우가 많았고, 때로는 신비 체험을 하기도 했답니다. 특히 프란치스코가 베들레헴의 구유를 재현했을 때, 클라라는 멀리 떨어진 산 다미아노에서도 그 장면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고 해요. 이 때문에 클라라는 후에 텔레비전의 수호성인이 되었답니다.

또한 클라라는 뛰어난 치유 능력으로도 유명했어요. 많은 병자들이 클라라의 기도를 받고 치유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클라라 자신은 이런 기적들을 자신의 공로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항상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말했어요.

사라센족의 침입과 기적적인 구원

1240년과 1244년, 클라라와 산 다미아노 공동체에게 큰 위기가 찾아왔어요.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용병들인 사라센족 군대가 아시시를 침공한 거예요. 이들은 특히 수도원들을 약탈하고 수도자들을 해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사라센족 군사들이 산 다미아노 성벽을 넘어 침입했을 때, 클라라는 병상에 누워있는 상태였어요. 하지만 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성체가 담긴 성합을 들고 성당 문 앞에 나가 무릎을 꿇고 기도했어요. "주님, 주님의 종들을 보호해 주소서. 저는 지킬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지키실 수 있습니다"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사라센족 군사들이 갑자기 공포에 질려 도망치기 시작한 거예요.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쫓겨나는 것 같았다고 해요. 이 기적적인 사건은 온 이탈리아에 널리 알려졌고, 클라라의 영적 권위를 더욱 높여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와의 마지막 만남

1226년 프란치스코가 세상을 떠날 무렵, 클라라는 깊은 슬픔에 잠겼어요. 자신의 영적 아버지이자 가장 소중한 친구를 잃는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도 임종을 앞두고 클라라에게 마지막 축복과 격려의 편지를 보냈어요.

"나의 작은 식물이여, 그리스도의 가난한 신부여"라고 시작되는 이 편지에서 프란치스코는 클라라의 신앙과 용기를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가난을 지키며 복음의 길을 걸어가라고 당부했어요. 이 편지는 클라라에게 평생 힘이 되는 보물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세상을 떠난 후 클라라는 더욱 깊은 영성 생활에 잠겼어요. 스승 없이도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야 했거든요. 하지만 클라라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프란치스코로부터 배운 정신을 더욱 순수하게 실천해 나갔어요.

클라라 수도규칙의 승인을 위한 긴 싸움

클라라가 평생 동안 가장 힘들어한 것은 자신만의 수도규칙을 승인받는 일이었어요. 교황청은 여성들이 완전한 가난을 실천하는 것을 우려했고, 기존의 베네딕토 규칙을 따르라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하지만 클라라는 절대 양보하지 않았어요.

40여 년 동안 클라라는 여러 교황들과 끈질긴 협상을 벌였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 인노첸시오 4세 등이 차례로 클라라의 규칙을 완화하려 했지만, 클라라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어요. 특히 '절대 가난'의 원칙만큼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클라라의 의지는 정말 대단한 거였어요. 중세 시대 여성이 교황청과 맞서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거든요. 하지만 클라라는 진리 앞에서는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임종 직전, 마침내 얻은 승인

1253년 8월, 클라라는 중병에 걸려 임종을 앞두고 있었어요. 59세의 나이였는데, 평생의 극심한 금욕생활로 몸이 많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클라라에게는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어요. 바로 자신의 수도규칙 승인이었습니다.

마침내 8월 9일, 교황 인노첸시오 4세로부터 '클라라 규칙'의 정식 승인서가 도착했어요. 40년 넘게 기다려온 꿈이 드디어 이루어진 거죠. 클라라는 승인서를 받아들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이제 여성들도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복음적 가난을 살 수 있게 된 것이에요.

승인서를 받은 다음 날인 8월 11일, 클라라는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임종 직전 "주님, 제 영혼을 당신께 맡깁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해요. 마치 모든 임무를 완수하고 안심하는 것 같았습니다.

결론: 용기 있는 여성 개혁가의 유산

성 클라라의 생애를 돌아보면, 그녀는 정말 많은 시련과 역경을 이겨낸 놀라운 여성이었어요. 가족의 격렬한 반대, 사회의 편견, 교회 당국의 압력, 극한의 가난과 질병까지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클라라는 결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클라라의 가장 큰 업적은 여성들에게도 완전한 복음적 삶의 길을 열어준 것이에요. 중세 시대 여성들은 대부분 결혼하거나 편안한 수도원에서 지내는 것이 전부였는데, 클라라는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영적 완성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클라라의 '절대 가난' 정신은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현대 사회에도 큰 울림을 줍니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얻어진다는 그녀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해요. 1958년 교황 비오 12세가 클라라를 텔레비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한 것도, 그녀가 멀리 떨어진 곳의 일도 볼 수 있는 신비로운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더 깊은 의미에서는 클라라의 명확한 영적 시야가 현대 미디어 시대에도 필요하다는 뜻일 거예요.

성 클라라 관련 주요 역사적 사건 연표

연도 클라라 관련 사건 동시대 역사적 배경
1194 클라라 아시시에서 출생 (오프레두치오 가문)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6세 재위
1198 클라라 유년시절 (독실한 신앙교육)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즉위
1202 아시시 내전 시기 (클라라 8세) 제4차 십자군 시작
1206 프란치스코의 회심 목격 프란치스코 아버지와 결별
1210 프란치스코 설교 듣고 깊은 감동 프란치스코회 교황 구두 승인
1212 3월 18일 가출, 수도생활 시작 소년 십자군 사건
1212 여동생 아녜스 합류 알비 십자군 지속
1215 산 다미아노 공동체 확장 제4차 라테란 공의회
1218 어머니 오르툴라나 공동체 합류 제5차 십자군 준비
1219 교황 호노리오 3세 산 다미아노 방문 프란치스코 이집트 십자군 참여
1224 프란치스코 성흔 체험 소식 접함 프리드리히 2세 십자군 서약
1226 프란치스코 선종, 깊은 슬픔 루이 9세 프랑스 왕 즉위
1228 프란치스코 시성, 클라라도 참석 프리드리히 2세 제6차 십자군
1230 교황 그레고리오 9세와 규칙 논의 몽골 제국 서진 시작
1240 사라센족 침입 저지 기적 프리드리히 2세-교황 갈등 절정
1244 아시시 재침입 시도 저지 예루살렘 최종 함락
1247 교황 인노첸시오 4세와 규칙 협상 제7차 십자군 준비 (루이 9세)
1250 프리드리히 2세 선종, 정치적 안정 루이 9세 십자군 실패
1252 클라라 규칙 최종 작성 몽골의 유럽 침입 종료
1253 8월 9일 규칙 승인, 8월 11일 선종 잉글랜드 헨리 3세 재위
1255 교황 알렉산데르 4세에 의한 시성 몽골 제국 내전 시작
1260 클라라 대성당 건축 시작 쿠빌라이 칸 즉위
1958 교황 비오 12세, 텔레비전 수호성인 선포 텔레비전 대중화 시대

클라라의 현대적 의미와 영향

성 클라라의 영향은 중세에만 머물지 않았어요. 오늘날 전 세계에는 가난한 클라라 수녀회를 비롯해 수십 개의 클라라 계열 수도회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클라라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면서 교육, 의료, 사회복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봉사하고 있어요.

특히 페미니즘 관점에서도 클라라는 매우 의미 있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3세기에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독립적인 길을 걸어간 선구자적 여성이었거든요. 현대의 많은 여성들이 클라라의 용기와 의지력에서 영감을 받고 있어요.

또한 환경 보호와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도 클라라의 '절대 가난' 정신은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무한 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 필요한 것만 소유하며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제시하고 있어요.

참고문헌 및 참고 사이트

  • 바르톨리, 마르코. 『아시시의 성 클라라』. 서울: 성바오로출판사, 2016.
  • 포르티니, 아르날도. 『클라라, 빛의 여인』. 서울: 프란치스코출판사, 2010.
  • 클라라 자서전 연구회. 『성 클라라의 편지와 유언』. 서울: 분도출판사, 2012.
  • 오세르, 레지날드. 『중세 여성 수도자들』. 서울: 가톨릭출판사, 2008.
  • 첼라노, 토마스. 『성 클라라 전기』. 서울: 프란치스코출판사, 2015.
  • 가톨릭 대사전 온라인: http://catholic-dictionary.catholic.or.kr
  • 바티칸 공식 홈페이지: https://www.vatican.va
  • 가난한 클라라회 한국관구: https://www.clarisse.or.kr
  • 아시시 성 클라라 대성당: https://www.basilicasantachiara.it
  • Catholic Encyclopedia: https://www.newadvent.org/cathen/

* 본 글은 가톨릭 교회의 공식 자료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개인적 견해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 참고문헌의 저작권은 각각의 저자 및 출판사에 있습니다.
* 클라라 성인의 편지와 유언 인용 부분은 공개 번역본을 참고하였습니다.
* 이 글은 교육 및 정보 제공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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