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와 명예를 버리고 극한의 가난 속에서 진정한 복음을 살아낸 위대한 성인
12세기 말,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다
1181년 이탈리아 중부 아시시에서 태어난 조반니 디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성 프란치스코의 본명이에요.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는 포목상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한 상인이었죠. 당시 아시시는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청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지역이었고, 상인들은 이런 정치적 변화 속에서도 상업을 통해 부를 쌓아가고 있었어요.
어린 프란치스코는 전형적인 부유층 자제의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프랑스와 거래를 많이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프랑스 문화에 익숙해졌고, 그래서 '프란체스코(작은 프랑스인)'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어요. 젊은 시절의 프란치스코는 화려한 옷을 입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12-13세기 전환기는 유럽 전체가 격변의 시기였어요. 십자군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고, 교황과 황제 간의 권력 다툼이 치열했습니다. 아시시도 이런 큰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었죠. 1202년 아시시와 페루자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고, 21세의 프란치스코도 기사로 출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1년간 감옥살이를 해야 했어요.
감옥에서의 깨달음과 영적 위기
페루자 감옥에서의 1년은 프란치스코에게 인생의 첫 번째 큰 시련이었어요. 화려한 궁정 생활을 꿈꾸던 젊은이가 갑자기 어둡고 비좁은 감옥에 갇히게 된 거죠. 이때부터 프란치스코는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부와 명예가 과연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어요.
1203년 석방된 후에도 프란치스코의 내적 고민은 계속되었습니다. 1204년에는 남부 이탈리아 원정에 나섰다가 중간에 되돌아오기도 했어요. 친구들은 그의 변화를 이상하게 여겼지만, 프란치스코 자신은 뭔가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는 그에게 정말 혼란스러운 때였을 거예요.
특히 이 무렵 프란치스코는 자주 혼자 기도하며 명상에 잠겼다고 해요. 아시시 근교의 작은 성당들, 특히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당시 이런 작은 성당들은 대부분 낡고 방치되어 있었는데, 프란치스코는 이런 곳에서 오히려 평안을 찾았던 것 같아요.
십자가의 음성과 극적인 회심
1205년 어느 날,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하던 프란치스코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서 "프란치스코야, 가서 내 집을 다시 세워라. 보다시피 완전히 무너져가고 있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해집니다. 처음에 프란치스코는 이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 낡은 성당들을 수리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이 신비 체험은 프란치스코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상점에서 비싼 천을 가져다 팔아서 성당 수리비를 마련했는데, 이를 안 아버지 피에트로는 크게 분노했어요. 아들이 갑자기 이상한 종교적 열정에 빠져 가업을 포기하려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1206년 아버지는 아들을 아시시 주교 앞으로 끌고 가서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프란치스코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옷을 모두 벗고 아버지에게 돌려주며 "이제 저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뿐입니다"라고 선언했어요. 이는 중세 사회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극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나병환자와의 만남, 진정한 사랑의 발견
가족과 완전히 결별한 프란치스코는 이제 정말 혼자가 되었어요. 하지만 그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에 없던 자유로움을 느꼈죠. 그는 아시시 근교를 돌아다니며 성당들을 수리하고, 구걸을 하면서 생활했어요. 당시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 취급했지만, 프란치스코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 시기 프란치스코에게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나병환자들과의 만남이었어요. 당시 나병은 가장 무서운 병이었고, 나병환자들은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프란치스코도 처음에는 나병환자들을 보면 역겨워했다고 스스로 고백했어요. 하지만 어느 날 길에서 만난 나병환자를 껴안고 입맞춤한 순간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나병환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프란치스코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았어요. 사회에서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한 거죠. 이런 경험을 통해 프란치스코는 '완전한 기쁨'이란 세상의 명예나 권력이 아니라 가장 작은 이들과 함께할 때 얻어지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동료들의 합류와 프란치스코회 창립
1208년 프란치스코가 미사 중에 들은 복음 말씀은 그의 삶을 더욱 분명한 방향으로 이끌었어요. "금도, 은도, 동전도 허리띠에 지니지 말고, 여행용 자루도, 두 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 10,9-10)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프란치스코는 완전한 복음적 가난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놀랍게도 프란치스코의 이런 삶에 감동받은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어요. 베르나르도 디 퀸타발레, 피에트로 카타니 같은 동료들이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프란치스코와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정식 수도회도 아니었고, 그냥 복음을 따라 살려는 평신도들의 모임이었어요.
하지만 동료들이 늘어나면서 교회의 공식적인 인준이 필요해졌습니다. 1209년 프란치스코는 11명의 동료와 함께 로마로 가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를 만났어요. 처음에 교황은 이들의 극단적인 가난 서원을 우려했지만, 프란치스코의 진정성에 감동받아 구두로나마 승인을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프란치스코 수도회(작은 형제회)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어요.
클라라와의 만남, 여성 수도회의 탄생
1212년 프란치스코에게 또 다른 중요한 만남이 있었어요. 아시시의 귀족 집안 딸인 클라라 디 오프레두치오가 프란치스코의 설교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아 자신도 복음적 가난의 길을 가고 싶다고 찾아온 거예요. 당시 18세였던 클라라는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프란치스코를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클라라의 결단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어요. 중세 귀족 여성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선택이었거든요. 가족들은 당연히 반대했고, 심지어 무력으로라도 클라라를 되돌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클라라는 굽히지 않았고, 결국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여성들만의 수도공동체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클라라 수녀회(가난한 클라라 수녀회)의 탄생은 중세 교회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여성들도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복음적 가난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거죠. 클라라는 프란치스코보다도 더 엄격하게 가난을 지켰고, 평생 신발도 신지 않고 살았다고 해요.
십자군과 술탄, 평화를 향한 도전
1219년 프란치스코는 놀라운 결단을 내렸어요. 제5차 십자군 전쟁이 한창인 이집트로 가서 술탄 알-카밀과 직접 만나 평화를 호소하기로 한 거죠. 당시로서는 정말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인이 이슬람 진영에 들어간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었거든요.
다미에타 포위전이 한창인 전장에 도착한 프란치스코는 십자군 지휘관들에게 먼저 평화적 해결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어요. 그러자 그는 직접 이슬람군 진영으로 걸어가서 술탄과의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술탄 알-카밀은 이 이상한 그리스도교 수도자의 용기에 감동받아 며칠간 머물게 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해요.
비록 즉각적인 평화 성과는 없었지만, 프란치스코의 이 시도는 종교간 대화의 새로운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무력이 아닌 사랑과 대화로 평화를 추구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몸소 실천한 거죠. 이런 프란치스코의 정신은 오늘날 종교간 대화에도 큰 영감을 주고 있어요.
성흔 체험과 인생의 마지막 시련
1224년 프란치스코에게는 생애 가장 신비로운 체험이 일어났어요. 알베르니아 산에서 기도하던 중 십자가에 못 박힌 여섯 날개 천사가 나타나면서, 프란치스코의 손과 발, 옆구리에 예수님의 못 자국과 창자국이 생겼다는 거예요. 이는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성흔(스티그마타) 현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신비로운 체험과 함께 프란치스코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되었어요. 젊은 시절부터 극도로 절제된 생활을 해왔던 데다가, 이집트 여행에서 얻은 눈병도 계속 악화되어 거의 실명 상태가 되었습니다. 성흔의 상처도 계속 아팠을 거예요. 육체적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텐데도 프란치스코는 여전히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더 큰 고통은 자신이 창립한 수도회의 변화였어요. 프란치스코가 원했던 완전한 가난과 단순함보다는 조직적이고 학문적인 방향으로 수도회가 변해가고 있었거든요. 이는 프란치스코에게 정말 마음 아픈 일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는 이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순종했습니다.
태양의 찬가와 누이 죽음의 맞이
1225년 거의 실명 상태에서 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 문학사상 가장 아름다운 작품 중 하나인 『태양의 찬가』를 지었어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모든 피조물을 형제자매로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 시는 프란치스코의 영성이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지 보여줍니다.
"지극히 높으신 전능하신 좋으신 주님, 찬양과 영광과 존귀와 모든 축복이 주님께 돌아가나이다"로 시작하는 이 찬가에서 프란치스코는 태양을 '형제', 달을 '자매', 바람과 공기와 구름을 '형제', 물을 '자매'라고 불렀어요. 이런 생태적 영성은 오늘날에도 매우 현대적으로 느껴집니다.
1226년 10월 3일, 프란치스코는 포르지운쿨라에서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요. 임종 직전에는 『태양의 찬가』에 죽음에 대한 구절을 추가했습니다. "누이 육신의 죽음을 찬양하소서. 어떤 산 사람도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나이다." 죽음마저도 '누이'로 부르며 평화롭게 받아들인 거죠.
결론: 가난 속에서 발견한 참된 부
성 프란치스코 아시시의 생애를 돌아보면, 그는 정말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었어요. 가족의 반대, 사회의 조롱, 육체적 고통, 그리고 자신이 세운 수도회의 변화까지. 하지만 그는 이 모든 어려움을 사랑과 기쁨으로 이겨냈습니다. 그 비결은 바로 완전한 가난 속에서 진정한 부를 발견했기 때문이에요.
프란치스코가 추구한 가난은 단순히 물질적 궁핍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완전한 신뢰였어요. 이런 영적 가난을 통해 그는 진정한 자유를 얻었고, 모든 피조물과 하나 됨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든, 이슬람 술탄이든, 새든, 늑대든 모든 존재를 형제자매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거죠.
800년이 지난 지금도 프란치스코의 영성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어요. 물질만능주의와 환경 파괴로 고통받는 현대 사회에 프란치스코의 청빈과 생태 영성은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2013년 즉위한 교황 프란치스코가 아시시의 성인 이름을 택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어요.
성 프란치스코 아시시 관련 주요 역사적 사건 연표
연도 | 프란치스코 관련 사건 | 동시대 역사적 배경 |
---|---|---|
1181 | 프란치스코 아시시에서 출생 | 교황 루치오 3세 재위, 제3차 십자군 준비 |
1189 | 프란치스코 어린 시절 (부유한 생활) | 제3차 십자군 전쟁 시작 |
1198 | 청년기, 기사 꿈 키움 |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즉위 |
1202-1203 | 페루자 전쟁 참전, 1년간 포로 생활 | 제4차 십자군, 콘스탄티노플 함락 |
1204-1205 | 영적 위기와 성찰의 시기 | 라틴 제국 건설 |
1205 |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십자가 음성 | 알비 십자군 시작 |
1206 | 아버지와 결별, 주교 앞에서 의복 반납 | 몽골 제국 테무진 통합 시작 |
1208 | 복음서 말씀 체험, 사명 확신 | 알비 십자군 본격화 |
1209 | 교황 인노첸시오 3세 만남, 수도회 구두 승인 | 케임브리지 대학 설립 |
1212 | 성 클라라와 만남, 여성 수도회 시작 | 소년 십자군 사건 |
1215 | 프란치스코회 정식 승인 추진 | 제4차 라테란 공의회 |
1219 | 이집트 여행, 술탄 알-카밀과 만남 | 제5차 십자군, 다미에타 포위전 |
1221 | 프란치스코회 제2규칙 작성 | 몽골의 서진 시작 |
1223 | 교황 호노리오 3세로부터 최종 규칙 승인 | 제6차 십자군 계획 |
1224 | 알베르니아 산에서 성흔 체험 | 프리드리히 2세 십자군 서약 |
1225 | 『태양의 찬가』 작성 | 루이 8세 프랑스 왕 즉위 |
1226 | 10월 3일 포르지운쿨라에서 선종 | 루이 9세 프랑스 왕 즉위 |
1228 |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한 시성 | 프리드리히 2세 제6차 십자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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