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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인과 교부

성녀 페르페투아 순교자 - 귀족의 딸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로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5.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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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초 카르타고의 사회적 배경

3세기 초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는 로마 제국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버금가는 제3의 대도시였습니다.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이 고대 도시는 기원전 146년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 패배한 후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재건되어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카르타고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서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로마 문화와 그리스 철학이 융성한 학문의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는 라틴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고, 로마식 교육 제도가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1세기 말부터 이 지역에 전파되기 시작했으며, 2세기에는 이미 견고한 교회 조직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카르타고 교회는 초대 교회 신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는데, 위대한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와 성 치프리아노가 이곳 출신입니다. 그러나 193년부터 211년까지 통치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자신도 북아프리카 출신이었지만, 제국의 안정을 위해 전통 종교를 강조했습니다. 202년 그는 제국 전역에 칙령을 내려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로의 개종을 엄격히 금지했습니다. 이 칙령은 기존 신자들을 직접 박해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개종자와 예비 신자들,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을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확산을 근원적으로 차단하려는 전략이었습니다. 당시 카르타고의 총독 히라리아누스는 황제의 칙령을 충실히 집행하여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을 체포하고 처형했습니다.

성녀 페르페투아 순교자 - 귀족의 딸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로

페르페투아의 가문과 초기 생애

성녀 비비아 페르페투아는 181년경 카르타고의 명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부유한 인물이었고, 어머니는 그리스도교 신자였습니다. 페르페투아에게는 두 명의 남동생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어려서 세상을 떠났고, 다른 한 명은 예비 신자였습니다. 페르페투아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훌륭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라틴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글쓰기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젊은 나이에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지만, 남편에 대한 기록은 순교 사기에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남편이 이미 사망했거나, 아내의 그리스도교 개종을 반대하여 이혼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페르페투아가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머니의 영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사랑과 평등 정신에 깊이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로마 사회의 엄격한 계급 구조와 여성 차별 속에서, 그리스도교는 모든 이가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는 혁명적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페르페투아는 202년 초, 22세의 나이로 예비 신자 교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여종 펠리치타스, 노예 레보카투스, 사투르니누스, 세쿤둘루스와 함께 교리를 배우고 있었고, 그들의 교사는 사티루스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이들은 신분의 차이를 넘어 신앙 안에서 형제자매가 되었고, 함께 기도하며 세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체포와 아버지와의 갈등

202년 봄, 카르타고 총독의 명령으로 예비 신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습니다. 페르페투아와 동료들은 교리 교육을 받던 중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은 어둡고 더러웠으며, 많은 죄수들로 붐볐습니다. 페르페투아는 생후 몇 개월밖에 되지 않은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기 때문에, 아기와 떨어지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순교 사기에는 페르페투아 자신이 직접 기록한 부분이 있는데, 그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감옥의 어둠이 나를 두렵게 했습니다. 끔찍한 날이었습니다. 무더위와 군중들의 밀침, 그리고 군인들의 거친 대우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아기 걱정에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부제 테르티우스와 포미포니우스의 뇌물 덕분에 우리는 몇 시간 동안 감옥의 더 나은 곳으로 옮겨져 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후, 페르페투아의 가장 큰 시련은 아버지와의 갈등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딸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가 신앙 때문에 죽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감옥을 찾아와 딸에게 배교할 것을 간청했습니다. 페르페투아는 순교 사기에서 아버지와의 대화를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딸아, 나의 백발을 불쌍히 여겨라. 네 아버지를 불쌍히 여겨라. 내가 너를 이렇게 키운 것이 헛되지 않게 해다오. 네 어머니를, 네 고모를, 네 아기를 생각해라. 네가 죽으면 우리 중 누구도 자유롭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페르페투아는 아버지를 깊이 사랑했지만, 신앙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저 물병을 보십시오. 그것을 물병 외에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도 제가 실제로 그러한 것, 즉 그리스도인 외에 다른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대답에 분노한 아버지는 딸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결국 슬픔에 빠져 떠났습니다. 감옥에 갇힌 동안 페르페투아와 동료들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페르페투아는 세례를 받으면서 성령께 오직 한 가지, 육체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청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감옥에서 본 환시들

페르페투아는 감옥에서 여러 차례 환시를 보았고, 이를 자세히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첫 번째 환시에서 그녀는 하늘까지 닿는 황금 사다리를 보았습니다. 사다리는 매우 좁아서 한 번에 한 사람만 오를 수 있었고, 양옆에는 칼, 창, 갈고리, 단검 등이 붙어 있어서 조심하지 않으면 살이 찢어질 수 있었습니다. 사다리 밑에는 거대한 용이 누워 있어서 오르려는 사람들을 위협했습니다. 환시에서 그녀의 교사 사티루스가 먼저 올라가며 페르페투아를 부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페르페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이 자신을 해치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며 용의 머리를 첫 발판으로 삼아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다리 끝에 도달하자 거대하고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졌고, 그곳에는 흰 머리의 목자가 앉아 양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목자는 페르페투아를 환영하며 그녀에게 우유로 만든 치즈를 주었고, 주변에 있던 수천 명의 흰옷 입은 사람들이 아멘이라고 화답했습니다. 페르페투아는 그 달콤함에 깨어났고, 여전히 입안에 달콤한 맛이 남아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녀는 이 환시를 통해 자신이 순교할 것이며, 그것이 하늘나라로 가는 길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환시에서는 어린 나이에 암으로 죽은 남동생 디노크라테스를 보았습니다. 그는 더럽고 창백했으며, 얼굴에는 죽을 때 있었던 암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물웅덩이 옆에 있었지만 키가 작아서 물에 닿을 수 없었고, 목이 말라 고통스러워했습니다. 페르페투아는 깨어나서 동생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후 다시 환시를 보았을 때, 동생은 깨끗하고 잘 차려입은 모습이었고, 상처는 흉터만 남아 있었습니다. 물웅덩이는 낮아져서 동생이 마음껏 물을 마실 수 있었고, 기쁘게 놀고 있었습니다. 페르페투아는 이것을 동생이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표징으로 이해했습니다. 이 환시는 초대 교회가 연옥 교리를 이해하고 있었으며, 산 자들의 기도가 죽은 이들을 도울 수 있다고 믿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증거입니다.

재판과 최후의 선택

예심을 거친 후 페르페투아와 동료들은 총독 히라리아누스 앞에서 공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장으로 가는 도중, 아버지가 다시 한 번 나타나 페르페투아를 설득하려 했습니다. 그는 손자를 안고 와서 딸에게 애원했습니다. 아기를 불쌍히 여겨라. 황제를 위해 희생 제사를 드려라. 그러나 페르페투아는 거부했습니다. 재판장에서 총독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네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고 네 아들의 어린 나이를 생각하여, 황제들의 건강을 위해 제사를 드려라. 페르페투아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총독이 물었습니다. 너는 그리스도인이냐? 페르페투아는 명확하게 선언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버지는 딸을 설득하려고 계속 시도했지만, 총독은 그를 끌어내도록 명령했고, 그 과정에서 늙은 아버지가 매를 맞았습니다. 페르페투아는 순교 사기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버지가 맞으시는 것이 마치 내가 맞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습니다. 나는 그의 비참한 노년을 슬퍼했습니다. 결국 총독은 페르페투아와 모든 동료들에게 맹수들과 싸우는 형벌을 선고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기쁘게 감옥으로 돌아왔습니다. 페르페투아는 즉시 아기를 데려오게 했고, 감옥에서 아기에게 젖을 먹였습니다. 그러나 처형일이 가까워지자 페르페투아는 어머니와 남동생에게 아기를 맡겼습니다. 놀랍게도 그 순간부터 아기는 더 이상 젖을 찾지 않았고, 페르페투아도 유방의 통증이 사라졌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녀는 이것을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여겼습니다.

원형 경기장에서의 순교

203년 3월 7일, 카르타고의 대형 원형 경기장에서 황제 게타의 생일을 기념하는 검투사 경기가 열렸습니다. 페르페투아와 동료들은 그날 맹수들 앞에 던져지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처형 전날 밤, 그들에게는 자유로운 마지막 식사가 제공되었지만, 그들은 이것을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만찬으로 바꾸었습니다. 구경꾼들이 그들을 보기 위해 몰려왔을 때, 순교자들은 관중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너희가 우리를 심판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다. 처형 당일, 집행관들은 순교자들에게 이교 신들의 제사장 복장을 입히려 했습니다. 남자들에게는 사투르누스 신의 복장을, 여자들에게는 케레스 여신의 복장을 입히려 했습니다. 그러나 페르페투아는 단호하게 거부하며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유 의지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바치기로 한 것은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에서입니다. 우리는 너희와 이런 협약을 맺었습니다. 집행관은 그녀의 정의로운 요구를 인정하고 그들이 평상복을 입도록 허락했습니다. 페르페투아와 동료들은 환한 얼굴로 경기장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페르페투아는 찬송가를 부르며 걸었고, 눈빛은 위엄이 넘쳤습니다. 남성 순교자들에게는 표범, 곰, 멧돼지가 풀려났습니다.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스에게는 야생 암소가 풀려났는데, 이것은 여성들을 조롱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암소가 페르페투아를 들이받아 땅에 내동댕이쳤습니다. 그녀는 일어나 찢어진 옷을 고쳐 입었습니다. 순교 사기는 그녀가 고통보다 정숙함을 더 생각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녀는 떨어진 머리핀을 찾아 머리를 다시 묶었는데, 이는 풀어헤친 머리가 애도의 표시였기 때문입니다. 페르페투아는 슬픔이 아니라 기쁨으로 순교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녀는 쓰러진 펠리치타스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고, 두 사람은 함께 서 있었습니다. 맹수들의 공격으로 중상을 입었지만 즉사하지 않자, 집행관들은 그들을 경기장 중앙으로 모아 검으로 마무리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순교자들은 서로에게 평화의 입맞춤을 나누었습니다. 페르페투아에게 차례가 왔을 때, 젊은 검투사가 그녀를 찔렀지만 뼈를 맞추어 그녀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러자 페르페투아는 떨리는 검투사의 손을 잡아 자신의 목으로 이끌었습니다. 순교 사기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마도 그처럼 위대한 여인은 스스로 원하지 않는 한 죽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순교 사기의 문학적 역사적 가치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스의 순교 사기는 초대 교회 문헌 중 가장 귀중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문헌의 특별한 점은 순교자 본인이 직접 기록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페르페투아는 체포부터 재판까지의 과정, 아버지와의 대화, 감옥 생활, 그리고 자신이 본 환시들을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순교자의 내면 세계를 직접 들여다볼 수 있는 매우 드문 기회를 제공합니다. 페르페투아의 글쓰기는 단순하면서도 감동적이며, 교육받은 로마 여성의 세련된 문체를 보여줍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연민, 아기와 떨어지는 고통, 순교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확신 등이 모두 드러납니다. 이러한 인간적 솔직함이 오히려 그녀의 신앙을 더욱 감동적으로 만듭니다. 순교 사기의 나머지 부분은 익명의 편집자가 기록한 것으로 보이며, 일부 학자들은 이 사람이 위대한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편집자는 페르페투아의 기록에 서론과 결론을 추가했고, 순교 당일의 장면을 목격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서술했습니다. 또한 사티루스가 본 환시도 포함시켰는데, 그 환시에서는 순교자들이 천국에 도착하여 천사들의 환영을 받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순교 사기는 라틴어 원본과 그리스어 번역본이 모두 전해지며, 초대 교회에서 널리 읽혔습니다. 4세기의 성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여러 설교에서 이 순교 사기를 인용했고,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스를 신앙의 영웅으로 찬양했습니다. 중세 시대에도 이 문헌은 계속 필사되고 읽혔으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현대 학자들은 이 문헌을 초대 교회의 신앙생활, 순교 신학, 여성의 역할, 사회 구조 등을 연구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1차 사료로 평가합니다.

현대 신자들에게 주는 영적 메시지

성녀 페르페투아의 삶은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여러 중요한 교훈을 전합니다. 첫째, 그녀는 신앙이 단순한 감정이나 지적 동의가 아니라 전 존재를 거는 결단임을 보여주었습니다. 페르페투아는 귀족의 딸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 아버지의 사랑, 어린 아들과의 삶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선택했습니다. 현대 신자들도 신앙과 세속적 가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순간을 마주합니다. 페르페투아의 모범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게 합니다. 둘째, 그녀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 사이의 갈등을 겪었습니다. 아버지를 깊이 사랑했지만, 신앙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냉정함이 아니라 우선순위에 대한 명확한 이해였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도 가족의 기대와 신앙적 가치 사이에서 갈등할 때가 있는데, 페르페투아는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두는 것이 궁극적으로 모두를 위한 최선임을 보여줍니다. 셋째, 페르페투아는 교육받은 여성으로서 자신의 신앙 체험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이것은 여성도 신학적 성찰과 영적 지도에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초기 사례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모든 신자가 각자의 은사를 활용하여 복음 전파에 참여하도록 초대하며, 페르페투아는 이러한 평신도 사도직의 선구자입니다. 넷째, 그녀가 본 환시들은 내세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천국의 기쁨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현세의 고통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현대인들은 물질적 현실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지만, 페르페투아는 영원한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다섯째, 연옥에 있는 동생을 위한 기도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영적 연대를 보여줍니다. 가톨릭 교회는 성인들의 통공을 믿으며, 우리의 기도가 연옥 영혼들을 도울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페르페투아의 환시는 이러한 교리의 초대 교회적 근거를 제공합니다. 마지막으로 페르페투아는 죽음 앞에서도 품위와 정숙함을 지켰습니다. 찢어진 옷을 고쳐 입고 머리를 다시 묶는 그녀의 모습은, 순교가 절망적 자포자기가 아니라 의식적이고 품위 있는 선택임을 보여줍니다. 성녀 페르페투아는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용기, 신앙, 사랑, 그리고 희망의 삶을 살도록 초대합니다.

역사적 시간표

연도 역사적 사건 의미
146 BC 제3차 포에니 전쟁, 카르타고 파괴 로마가 카르타고를 정복하고 완전히 파괴
44 BC-14 AD 카르타고 재건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도시 재건
1세기 말 카르타고에 그리스도교 전파 북아프리카에 강력한 교회 공동체 형성
181년경 페르페투아 출생 카르타고 명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남
193-211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통치 북아프리카 출신 황제, 그리스도교 박해
202년 개종 금지 칙령 반포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개종 엄격 금지
202년 봄 페르페투아와 동료들 체포 예비 신자 교육 중 체포되어 감옥에 갇힘
202년 감옥에서 세례 받음 순교 전 세례성사를 받음
203년 3월 초 총독 히라리아누스 앞에서 재판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 맹수형 선고
203년 3월 7일 카르타고 원형 경기장에서 순교 페르페투아, 펠리치타스 및 동료들 순교
203년 직후 순교 사기 완성 페르페투아의 직접 기록과 목격자 증언 결합
4세기 성 아우구스티노가 설교에서 인용 순교 사기가 교회 전체에 널리 퍼짐
5세기 로마 전례 경본에 이름 포함 감사 기도 성인 호칭에 영구히 기록됨

참고문헌 및 추가 정보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 가톨릭 성인 자료실 (www.cbck.or.kr)
  •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스 순교 사기(Passio Perpetuae et Felicitatis) - 초대 교회 순교 문헌
  • Butler's Lives of the Saints - 3월 7일 성녀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스 항목
  • 가톨릭 백과사전 - 북아프리카 초대 교회 항목
  • 로마 순교록(Martyrologium Romanum) - 공식 가톨릭 순교자 기록
  • 한국 가톨릭 대사전 - 초대 교회 순교자 관련 항목
  • 성 아우구스티노 설교집 -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스에 관한 설교
  • Catholic Encyclopedia - Saint Perpetua
  • Musurillo, Herbert - The Acts of the Christian Marty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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