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기 초 북아프리카의 박해 상황
3세기 초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를 강화하고 있었습니다. 193년부터 211년까지 통치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로마 제국의 안정을 위해 전통 종교를 강조했고, 202년에는 제국 전역에 칙령을 내려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로의 개종을 엄격히 금지했습니다. 이 칙령은 특히 새롭게 신자가 되려는 예비 신자들과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교사들을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으며, 그리스도교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카르타고 교회는 이미 견고한 조직을 갖추고 있었고, 순교자들의 피로 신앙이 더욱 견고해지고 있었습니다. 황제의 칙령이 반포되자 카르타고의 총독은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예비 신자 교육을 받고 있는 이들을 집중적으로 단속했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의 확산을 근원적으로 차단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는 엄격한 계급 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노예와 자유인, 귀족과 평민 사이의 차이가 극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신분이 의미를 잃었고,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평등 정신은 로마의 지배 계급에게 위협으로 여겨졌고, 박해를 더욱 강화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펠리치타스의 생애와 신분
성녀 펠리치타스는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노예 신분으로 살던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그녀의 이름 펠리치타스는 라틴어로 행복 또는 축복을 의미하며,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세상이 보기에 가장 불행한 신분인 노예였습니다. 펠리치타스는 결혼하여 임신 8개월의 몸으로 있었는데,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예비 신자 교육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22세의 귀족 여성 비비아 페르페투아를 비롯한 다른 예비 신자들과 함께 교리 교육을 받던 중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함께 체포된 이들은 페르페투아 외에 레보카투스, 세쿤둘루스, 사투르니누스, 그리고 그들의 교리 교사였던 사티루스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공동체였습니다. 펠리치타스는 비록 노예 신분이었지만, 신앙에 대한 열정과 확신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후, 그들은 재판을 받기 전 급히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당시 박해 시대에 흔한 일로, 순교 전에 세례의 은총을 받아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주님께 나아가기 위함이었습니다. 펠리치타스는 임신한 몸으로 감옥의 열악한 환경을 견뎌야 했지만, 동료 순교자들의 격려와 기도 속에서 신앙을 더욱 굳건히 했습니다.
감옥에서의 출산과 고통
감옥에 갇힌 채 펠리치타스는 순교의 날이 다가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로마법에 따르면 임신한 여성은 출산할 때까지 처형을 연기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인도적 배려라기보다는 태어나지 않은 생명까지 죽이는 것을 꺼린 로마 법의 원칙이었습니다. 펠리치타스는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만약 아기를 낳기 전에 다른 동료들이 순교한다면, 자신은 홀로 남아 나중에 일반 범죄자들과 함께 처형될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신앙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주님께 나아가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순교 사기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펠리치타스는 동료들과 함께 출산이 빨리 이루어지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응답되었고, 순교 예정일 이틀 전에 펠리치타스는 감옥에서 딸을 출산했습니다. 출산의 고통은 극심했고, 펠리치타스는 고통 속에서 신음했습니다. 간수들은 그녀를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데, 맹수들에게 던져질 때는 어떻게 하겠느냐? 펠리치타스는 담대하게 대답했습니다. 지금은 내가 혼자 고통을 겪지만, 그때는 다른 이가 나를 위해 고통을 함께 견뎌주실 것입니다. 나는 그분을 위해 고통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대답은 펠리치타스의 깊은 신앙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그녀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을 드러냈습니다. 갓 태어난 딸은 한 그리스도교 신자 여성이 맡아 입양하여 키우게 되었습니다. 펠리치타스는 아기와 헤어지는 슬픔도 컸지만, 딸이 신앙 안에서 자랄 수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았습니다. 출산 후 불과 이틀 만에 그녀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원형 경기장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원형 경기장에서의 순교
203년 3월 7일, 카르타고의 원형 경기장에서 황제 게타의 생일을 기념하는 검투사 경기가 열렸습니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공개 행사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맹수에게 던지는 것을 구경거리로 삼았습니다. 펠리치타스와 페르페투아, 그리고 다른 동료 순교자들은 경기장으로 끌려갔습니다. 로마 관헌들은 그들에게 이교 신들의 제사장 복장을 입히려 했지만, 순교자들은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페르페투아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유 의지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의 자유를 존중해 주십시오. 우리는 우리 생명을 바치기로 약속했지만, 그것은 우상 숭배를 하지 않겠다는 조건에서입니다. 놀랍게도 집행관은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순교자들은 찬미가를 부르며 경기장으로 걸어들어갔습니다. 남성 순교자들에게는 표범과 곰이 풀려났고, 여성 순교자인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스에게는 광포한 암소가 풀려났습니다. 펠리치타스는 출산한 지 불과 이틀밖에 지나지 않아 몸이 매우 허약한 상태였지만, 동료 페르페투아와 함께 용감하게 맞섰습니다. 암소가 덤벼들어 두 여성을 공격했고, 펠리치타스는 땅에 내던져졌습니다. 그녀의 옷이 찢어져 몸이 드러나자, 펠리치타스는 옷을 바로잡았습니다. 순교 사기는 이것을 정숙함에 대한 배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여성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려 한 것입니다. 페르페투아는 쓰러진 펠리치타스를 일으켜 세웠고, 두 사람은 함께 서로를 지탱했습니다. 맹수들의 공격으로 중상을 입었지만 즉사하지 않자, 군중들은 그들을 경기장 중앙으로 끌고 나와 검으로 최후를 맞게 했습니다. 순교자들은 서로에게 평화의 입맞춤을 나눈 후 칼을 받아들였습니다. 펠리치타스는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평화롭게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습니다. 출산의 고통과 맹수의 공격, 그리고 칼의 고통을 모두 견딘 그녀의 신앙은 초대 교회에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스 순교 사기의 가치
성녀 펠리치타스와 페르페투아의 순교는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스 순교 사기라는 귀중한 문헌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문헌은 초대 교회 순교 문학 중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문헌의 상당 부분은 페르페투아 자신이 감옥에서 직접 기록한 것으로, 순교자 본인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매우 드문 사례입니다. 페르페투아는 자신이 본 환시와 감옥 생활, 아버지와의 대화 등을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펠리치타스에 대한 기록은 다른 동료 순교자나 목격자가 추가한 것으로 보이며, 특히 그녀의 출산과 순교 장면은 매우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순교 사기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널리 유포되었고, 4세기의 위대한 교부 성 아우구스티노도 자신의 설교에서 자주 인용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 두 여성 순교자의 용기를 찬양하며, 귀족과 노예라는 사회적 차이가 신앙 안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순교 사기에는 페르페투아가 본 여러 환시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천국으로 오르는 사다리를 보는 환시였습니다. 사다리 양옆에는 칼과 창이 있어 조심하지 않으면 다칠 수 있었고, 사다리 아래에는 거대한 용이 있었습니다. 페르페투아는 용의 머리를 밟고 사다리를 올라가 아름다운 동산에 도달했는데, 그곳에서 양치기가 그녀를 맞이하며 우유를 주었습니다. 이 환시는 순교를 통해 천국에 이르는 영적 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펠리치타스에 대한 구체적인 환시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녀 역시 동료들과 함께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적 위안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순교 사기는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널리 읽혔고, 박해 시대 동안 신앙을 지키려는 이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두 성녀의 공경과 전례적 의미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스는 순교 직후부터 카르타고 교회에서 깊이 공경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유해는 카르타고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거두어져 장례가 치러졌고, 그들의 무덤은 순례지가 되었습니다. 4세기부터는 로마에서도 이 두 성녀에 대한 공경이 시작되었고, 고대 로마 미사 경본에 그들의 이름이 포함되었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감사 기도 제1양식인 로마 전례 경본에는 성인 호칭 기도문이 있는데, 여기에 펠리치타스와 페르페투아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미사 때마다 이 두 성녀를 기억하고 그들의 전구를 청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전례적 위치는 초대 교회 여성 순교자 중에서도 매우 특별한 것입니다. 두 성녀의 축일은 3월 7일이며, 전 세계 가톨릭 교회에서 함께 기념됩니다. 이들은 따로따로가 아니라 항상 함께 공경받는데, 이는 그들이 함께 순교했을 뿐만 아니라 귀족과 노예라는 서로 다른 신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성녀 펠리치타스는 특히 임산부와 산모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그녀가 출산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신앙을 지켰고, 갓 태어난 아기와 헤어지는 아픔을 견뎌냈기 때문입니다. 많은 어머니들이 출산과 양육의 어려움 속에서 펠리치타스에게 기도하며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또한 두 성녀는 사회적 차별을 극복하는 신앙의 힘을 보여주는 모범으로도 기억됩니다. 페르페투아는 교육받은 귀족 여성이었고, 펠리치타스는 글을 읽지 못하는 노예였지만, 둘 다 동등하게 순교자의 영광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인간의 평등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현대 신자들에게 주는 메시지
성녀 펠리치타스의 삶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러 중요한 교훈을 전합니다. 첫째,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임신 8개월의 몸으로 감옥에 갇히고, 출산 후 이틀 만에 맹수 앞에 던져지는 극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현대 신자들도 질병, 경제적 어려움, 관계의 갈등 등 다양한 고난을 겪지만, 펠리치타스의 모범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둘째, 그녀는 어머니로서의 사랑과 신앙인으로서의 책임 사이에서 깊은 고민을 했지만, 결국 하느님의 뜻을 우선시했습니다. 갓 태어난 딸과 헤어지는 것은 어머니로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녀는 딸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자랄 것을 믿으며 순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은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끄실 것이라는 깊은 신뢰였습니다. 현대의 부모들도 자녀에 대한 사랑과 신앙적 가치 사이에서 갈등할 때가 있는데, 펠리치타스의 선택은 궁극적으로 무엇이 자녀를 위한 최선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셋째, 펠리치타스는 노예라는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신분이었지만, 신앙 안에서는 누구와도 동등한 하느님의 자녀였습니다. 그녀는 귀족 여성 페르페투아와 동등하게 순교자의 영광을 받았고, 교회사에 영원히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세상의 기준이 아닌 신앙의 순수함으로 사람을 보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현대 사회도 여전히 빈부, 학력, 직업 등으로 사람을 평가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이가 동등한 존엄성을 지닙니다. 넷째, 펠리치타스의 출산과 순교 이야기는 고통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합니다. 그녀는 출산의 고통과 순교의 고통을 모두 겪었지만, 그 고통을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현대인들은 고통을 피하려 하고 모든 불편함을 제거하려 하지만, 펠리치타스는 고통도 하느님과 일치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펠리치타스와 페르페투아의 우정은 신앙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서로 다른 신분과 배경을 가진 두 여성이 신앙 안에서 참된 자매가 되어 서로를 격려하고 지탱하며 함께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진정한 코이노니아, 즉 영적 친교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역사적 시간표
| 연도 | 역사적 사건 | 의미 |
|---|---|---|
| 146 BC | 로마의 카르타고 정복 | 제3차 포에니 전쟁 후 카르타고가 로마 속주가 됨 |
| 1세기 | 카르타고에 그리스도교 전파 | 북아프리카에 교회 공동체 형성 |
| 193-211년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통치 | 북아프리카 출신 황제, 후에 그리스도교 박해 |
| 202년 | 개종 금지 칙령 반포 |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개종을 엄격히 금지 |
| 203년 초 | 펠리치타스와 동료들 체포 | 예비 신자 교육 중 체포되어 감옥에 갇힘 |
| 203년 3월 5일경 | 펠리치타스 감옥에서 출산 | 순교 이틀 전 딸을 출산 |
| 203년 3월 7일 | 카르타고 원형 경기장에서 순교 | 펠리치타스, 페르페투아 및 동료들 순교 |
| 203년 직후 | 순교 사기 기록 | 페르페투아의 직접 기록과 목격자 증언 결합 |
| 4세기 | 로마에서 두 성녀 공경 시작 | 전 교회적 공경으로 확대 |
| 5세기 | 로마 전례 경본에 이름 포함 | 감사 기도 성인 호칭에 영구히 기록됨 |
참고문헌 및 추가 정보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 가톨릭 성인 자료실 (www.cbck.or.kr)
-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스 순교 사기(Passio Perpetuae et Felicitatis) - 초대 교회 순교 문헌
- Butler's Lives of the Saints - 3월 7일 성녀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스 항목
- 가톨릭 백과사전 - 북아프리카 초대 교회 순교자 항목
- 로마 순교록(Martyrologium Romanum) - 공식 가톨릭 순교자 기록
- 한국 가톨릭 대사전 - 초대 교회 여성 순교자 관련 항목
- 성 아우구스티노 설교집 -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스에 관한 설교
- Catholic Encyclopedia - Saints Perpetua and Felicity
'1. 성인과 교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박해 속에서 빛난 신앙의 증인, 성 도나토 (0) | 2025.11.09 |
|---|---|
| 성녀 페르페투아 순교자 - 귀족의 딸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로 (2) | 2025.11.08 |
| 성녀 모니카 - 기도의 힘을 증명한 어머니의 신앙 (0) | 2025.11.06 |
| 성녀 테클라 순교자 - 초대 교회 여성 신앙의 빛 (0) | 2025.11.05 |
| 성 아드리안 순교자 - 박해자에서 순교자가 된 로마 군인 (0) | 2025.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