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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인과 교부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 조선 교회를 위해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5.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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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선교사의 소명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Saint Antoine Daveluy, 1818-1866)는 1818년 3월 16일 프랑스 북부 아미앵(Amiens)에서 태어났습니다. 한국명은 안돈이(安敦伊)이며, 세례명 전체는 마리 니콜라 앙투안 다블뤼(Marie Nicolas Antoine Daveluy)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지역에서 공장을 경영하는 사업가이자 시 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는 유지였으며, 어머니는 깊은 신앙심을 지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다블뤼 가문은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신앙을 지킨 전통 있는 가톨릭 집안으로, 온 가족이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실천했습니다. 앙투안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신심이 깊은 아이였으며, 특히 미사와 기도에 열성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가정에서 받은 견고한 신앙 교육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사제 성소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1837년, 열아홉 살의 나이에 앙투안은 아미앵 교구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신학생 시절 그는 학업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으며, 특히 신학과 철학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동료 신학생들은 그의 깊은 신심과 겸손한 태도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앙투안은 파리외방전교회가 발행하는 선교 소식지를 접하게 되었고, 머나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의 이야기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편안한 프랑스에서 사제로 지내는 것보다 이교 땅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키워나갔습니다. 1841년 12월 18일, 스물세 살의 앙투안은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사제가 된 후 그는 곧바로 아미앵 교구에서 짧은 기간 사목 활동을 하다가, 평생의 꿈이었던 선교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습니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 조선 교회를 위해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

 

파리외방전교회 입회와 조선 선교의 시작

1843년 10월 4일, 다블뤼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Société des 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에 정식으로 입회했습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1658년에 설립된 해외 선교 전문 사제회로, 특히 아시아 지역 복음화에 헌신하고 있었습니다. 이 선교회는 조선 교회 설립에도 깊이 관여하여,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된 이후 수많은 선교사를 한반도로 파견했습니다. 다블뤼 신부는 입회 직후 극동 지역 선교사로 임명받았고, 1844년 2월 20일 브레스트(Brest) 항구에서 배에 올랐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아시아까지는 아프리카 대륙을 우회하는 긴 항해를 해야 했으며, 수개월이 걸리는 위험한 여정이었습니다. 다블뤼 신부는 1844년 8월 24일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에 도착했습니다.

마카오에서 다블뤼 신부는 중국어와 라틴어를 공부하며 동양 선교를 준비했습니다. 그는 처음에 중국 선교지로 배정받을 예정이었으나, 1845년 7월 마카오를 방문한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éol, 高) 주교의 간청으로 조선 선교를 자원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1839년 기해박해로 모방, 샤스탕, 앵베르 주교 등 세 명의 프랑스 선교사가 순교한 지 불과 6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조선 땅에 들어가는 것은 곧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선택이었지만, 다블뤼 신부는 주저하지 않고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1845년 10월, 그는 중국인 상인으로 변장하여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입국했습니다. 스물일곱 살의 젊은 프랑스 사제가 머나먼 동양의 한 나라에 발을 디딘 순간이었습니다. 그의 조선 땅에서의 21년간의 여정이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조선 선교사로서의 헌신과 학문적 업적

조선에 입국한 다블뤼 신부는 즉시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상류층 출신으로 성장한 그에게 조선의 생활 환경은 매우 낯설고 힘든 것이었습니다. 특히 음식 문화의 차이는 큰 어려움이었으며, 그는 위장병과 신경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다블뤼 신부는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한국어를 익혔고, 조선의 풍습과 문화를 배우려고 노력했습니다. 동료 선교사들과 한국 신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다블뤼 신부는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심지어 보신탕을 즐겨 먹을 정도로 한국 음식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는 양반들의 옷차림을 하고 다녔으며, 한국식 예절을 익혀 가장 한국적인 선교사로 불렸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적응은 선교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블뤼 신부는 단순히 사목 활동에만 그치지 않고 학문적으로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조선에 입국한 직후부터 한국어 연구에 몰두하여, 방대한 한한불(韓漢佛) 사전을 편찬했습니다. 이 사전은 한국어, 한문, 프랑스어를 대조한 최초의 체계적인 어학 사전으로, 후대 선교사들과 한국어 연구자들에게 귀중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교리서와 기도서를 번역하여 한국 신자들의 신앙 교육에 기여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업적은 약 10년에 걸쳐 수집하고 정리한 조선 순교자 비망기(備忘記)입니다. 이 책은 1839년 기해박해와 그 이전의 박해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이름과 행적을 상세히 기록한 것으로, 한국 교회사 연구의 기초 자료가 되었습니다. 다블뤼 신부는 순교자들의 증언을 직접 수집하고, 문서를 보존하며,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데 헌신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순교자들의 신앙 증거를 후세에 전하려는 사명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보좌주교 서임과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다블뤼 신부의 헌신적인 선교 활동과 탁월한 능력은 교회 지도부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1856년, 페레올 주교가 선종한 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신부가 제4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베르뇌 주교는 다블뤼 신부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고, 그를 보좌주교로 추천했습니다. 1857년 3월 8일, 다블뤼 신부는 서울 인근의 은신처에서 보좌주교로 성성되었습니다. 주교품을 받은 그의 나이는 서른아홉이었습니다. 보좌주교가 된 다블뤼 주교는 더욱 활발하게 사목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는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순회하며 견진성사를 집전하고, 신자들을 격려하고, 예비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당시 조선 천주교회는 박해의 위험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으며, 신자 수는 약 2만 명에 달했습니다.

186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선의 정치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습니다. 1863년 철종이 승하하고 어린 고종이 즉위하면서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섭정으로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항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쇄국정책을 강력히 추진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천주교는 서양 세력의 앞잡이로 간주되어 탄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1866년 초, 대왕대비의 명으로 천주교 대대적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박해인 병인박해(丙寅迫害)입니다. 수천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고 처형되었으며, 프랑스 선교사들에 대한 수색도 시작되었습니다.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은신처를 옮기며 체포를 피하려 했으나, 밀고와 수색으로 인해 한 명씩 붙잡히기 시작했습니다. 다블뤼 주교도 충청도 지역에서 피신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체포와 갈매못에서의 장렬한 순교

1866년 3월 9일, 다블뤼 주교는 충청도 덕산의 한 신자 집에서 오메트르(Aumaître, 吳) 신부, 위앵(Huin, 玄) 신부와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포졸들은 밀고를 받고 그곳을 급습했으며, 세 명의 프랑스 선교사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곧 홍주(현재 충남 홍성) 관아로 끌려갔습니다. 홍주 관아에서 세 신부는 문초를 받았지만, 배교를 거부하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관리들은 그들을 고문했지만, 신부들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처형 명령이 내려졌고, 1866년 3월 30일 성 토요일 정오, 세 신부는 홍주 앞바다의 갈매못(현재 충남 보령시 오천면)으로 끌려갔습니다. 갈매못은 바닷가의 모래사장으로, 그곳에서 참수형이 집행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다블뤼 주교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평온한 모습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동료 신부들과 함께 기도하고,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형장에 도착했을 때, 다블뤼 주교는 무릎을 꿇고 마지막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는 조선 교회와 신자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망나니의 칼이 그의 목을 내리쳤고, 다블뤼 주교는 순교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의 나이 48세였습니다.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순교했습니다. 그들의 시신은 처음에 바닷가에 버려졌으나, 며칠 후 용감한 신자들이 몰래 수습하여 근처에 묻었습니다. 다블뤼 주교의 순교 소식은 조선 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지만, 동시에 신자들의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습니다. 병인박해로 베르뇌 주교를 포함한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약 8천 명의 조선 신자들이 순교했습니다.

시성과 현대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

다블뤼 주교와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신앙 증거는 한국 교회의 귀중한 유산이 되었습니다. 박해가 끝난 후 교회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고 기록했으며, 시복 시성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는 로마에서 병인박해 순교자 24위를 시복했습니다. 이는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교황이 집전한 역사적인 시복식이었습니다. 다블뤼 주교도 이때 복자품에 올랐습니다.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서울 여의도에서 한국 103위 순교자 시성식을 거행했습니다. 이는 교황이 로마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시성식을 거행한 최초의 사례였으며, 한국 교회사에 길이 남을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다블뤼 주교는 103위 성인 중 한 분으로 시성되었으며, 그의 축일은 9월 20일(한국 103위 성인 대축일)로 정해졌습니다.

현재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에는 갈매못 순교성지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곳에는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의 순교를 기념하는 순교기념관과 성당이 세워져 있으며, 매년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와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신앙을 다집니다. 2018년에는 다블뤼 주교 탄생 200주년을 맞아 그의 고향 프랑스 아미앵 교구 신자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갈매못 성지를 순례했으며, 아미앵 교구장은 다블뤼 주교가 생전에 입었던 중백의를 성지에 기증했습니다. 이는 프랑스와 한국 교회의 아름다운 유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다블뤼 주교의 삶은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이국땅에서 헌신한 진정한 선교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단순히 신앙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의 문화와 언어를 배우고 사랑하며, 한국인과 진정으로 하나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의 학문적 업적, 특히 조선 순교자 비망기는 한국 교회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남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가 순교로써 증거한 신앙은 오늘날 한국 교회의 튼튼한 초석이 되었습니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생애의 주요 사건 연대표

연도 사건 역사적 배경
1818년 3월 16일 프랑스 아미앵에서 출생 나폴레옹 전쟁 종결 후 부르봉 왕정 복고기
1837년 아미앵 교구 신학교 입학 루이 필립 7월 왕정 시기
1841년 12월 18일 사제 서품 프랑스 산업혁명 진행기
1843년 10월 4일 파리외방전교회 입회 유럽 해외 선교 활동 확대 시기
1844년 2월 20일 브레스트 항구에서 극동 선교 출발 서구 제국주의 아시아 진출 본격화
1844년 8월 24일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 도착 청나라 아편전쟁 이후 개항기
1845년 10월 조선 입국 헌종 11년, 기해박해 후 6년
1857년 3월 8일 조선교구 보좌주교 성성 철종 8년, 조선 천주교회 회복기
1860년대 한한불 사전 편찬 및 순교자 비망기 집필 서양 열강의 조선 접근 시도 증가
1863년 고종 즉위, 흥선대원군 집권 조선 쇄국정책 강화기
1866년 초 병인박해 시작 대왕대비 조씨의 천주교 탄압 명령
1866년 3월 9일 충청도 덕산에서 체포 프랑스 선교사 9명 차례로 체포됨
1866년 3월 30일 갈매못에서 참수 순교 (48세) 성 토요일, 약 8천 명 순교한 병인박해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황 첫 한국 방문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여의도 103위 성인 시성식, 해외 최초 시성

참고문헌 및 참고자료

1. 가톨릭 교회의 교리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3. 바티칸 공식 웹사이트 - www.vatican.va (시성 관련 자료)

4. 한국천주교주교회의 - www.cbck.or.kr (순교자 자료)

5. 갈매못 순교성지 - galmaemot.or.kr

6. 가톨릭 백과사전(Catholic Encyclopedia), 온라인 에디션

7. 교황청 시성성 공식 문서 및 자료

8. 조선 순교사 비망기,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저

9.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선교사 자료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0.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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