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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인과 교부

성 다미안 드 베스테르 - 몰로카이의 성자와 한센병 환자의 수호성인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5.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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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깊은 벨기에 농가에서 태어나다

성 다미안 드 베스테르(Saint Damien de Veuster, 1840-1889)는 1840년 1월 3일 벨기에 루뱅 근교의 작은 농촌 마을 트레멜로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요제프 드 베스테르(Jozef De Veuster)였으며, 수도회에 입회하면서 다미안이라는 수도명을 받았습니다. 그의 아버지 프랑수아 드 베스테르는 성실한 농부였고, 어머니 카타리나는 깊은 신앙심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이 가정은 가톨릭 신앙이 생활의 중심이었으며, 여덟 남매 중 네 명이 수도자의 길을 걸을 정도로 영성이 충만한 환경이었습니다. 두 누나는 수녀가 되었고, 형 오귀스탱은 예수와 마리아 성심회에 입회하여 사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정 분위기는 어린 요제프의 신앙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린 시절 요제프는 호기심이 많고 활동적인 아이였습니다. 그는 학업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손재주가 뛰어나 지역 건축업자를 따라다니며 건축 기술을 배웠습니다. 이 경험은 훗날 몰로카이 섬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집과 성당, 병원을 짓는 데 귀중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청년기에 들어선 요제프는 처음에는 가업을 이어 농부가 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형 오귀스탱이 사제가 되어 선교사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의 마음속에도 하느님을 섬기고자 하는 열망이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1858년, 열여덟 살의 나이에 요제프는 형이 소속된 예수와 마리아 성심회에 입회했습니다. 이 수도회는 프랑스에서 설립된 선교 수도회로, 특히 태평양 지역의 선교에 헌신하고 있었습니다.

성 다미안 드 베스테르 - 몰로카이의 성자와 한센병 환자의 수호성인

하와이 선교사로서의 시작

예수와 마리아 성심회에 입회한 요제프는 다미안이라는 수도명을 받았습니다. 이는 초대 교회의 순교자였던 성인의 이름으로, 앞으로 그가 걸어갈 희생의 길을 예고하는 듯했습니다. 다미안은 벨기에 뢰번과 프랑스 파리에서 신학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형 오귀스탱이 하와이 선교를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출발 직전 심한 병에 걸려 떠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다미안이 형을 대신해 하와이로 가겠다고 자원했습니다. 비록 신학 과정을 완전히 마치지 못했지만, 수도회는 그의 열정과 헌신을 인정하여 하와이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1863년 10월, 스물세 살의 젊은 수도자 다미안은 벨기에를 떠나 머나먼 태평양의 하와이로 향하는 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하와이에 도착한 다미안은 1864년 5월 21일 호놀룰루 대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당시 하와이는 카메하메하 왕조가 통치하는 독립 왕국이었으며, 영국과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습니다. 19세기 중반 하와이는 급격한 서구화와 근대화를 겪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하와이 문화와 생활방식이 큰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사제가 된 다미안 신부는 처음 9년 동안 하와이 빅 아일랜드의 여러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는 현지인들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며, 가톨릭 신앙을 전하는 데 헌신했습니다. 그는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으며, 그들을 위해 성당을 짓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이 시기의 경험은 그가 앞으로 마주하게 될 더 큰 도전을 준비하는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몰로카이 섬으로의 자원과 헌신적 봉사

1865년, 하와이 왕국은 한센병 환자의 급증으로 인해 격리 수용법을 제정했습니다. 당시 한센병은 전염성이 강하고 치료법이 없는 무서운 질병으로 여겨졌으며, 환자들은 사회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어야 한다고 믿어졌습니다. 하와이 정부는 오아후 섬 북쪽에 위치한 몰로카이 섬의 칼라우파파 반도를 한센병 환자 격리 수용소로 지정했습니다. 이곳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한쪽은 가파른 절벽으로 막혀 있어 자연적인 감옥과 같았습니다. 하와이 전역에서 한센병에 걸린 사람들이 강제로 이곳으로 보내졌으며, 일단 이 섬에 들어오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가족과 강제로 이별당한 환자들은 절망과 고통 속에서 방치되었고, 기본적인 의료 시설이나 생활 필수품조차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습니다.

1873년 5월, 하와이 주교는 몰로카이 섬의 참상을 알리며 자원하는 사제가 있으면 그곳으로 가서 환자들을 돌보아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선택이었습니다. 당시 서른세 살이었던 다미안 신부는 주저하지 않고 자원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섬에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가장 버림받고 고통받는 이들 곁에 머물러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습니다. 1873년 5월 10일, 다미안 신부는 몰로카이 섬의 칼라우파파에 도착했습니다. 그가 본 광경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약 800명의 한센병 환자들이 비참한 환경에서 살고 있었고, 많은 이들이 제대로 된 집도 없이 동굴이나 허름한 오두막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의료 지원은 거의 전무했고, 식량과 의복도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환자들은 절망과 자포자기 속에서 살고 있었으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16년의 여정

다미안 신부는 도착하자마자 환자들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들의 상처를 직접 치료했으며, 그들과 식사를 함께하고, 담배 파이프까지 나누어 사용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했지만, 다미안 신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들의 사제이며, 이들의 형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병 환자를 만지시고 치유하셨듯이, 저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는 환자들을 위해 집을 짓고, 성당을 세우고, 학교를 만들었습니다. 손수 목재를 다듬고 못을 박으며 수백 채의 집을 지었습니다. 또한 농사를 가르쳐 환자들이 스스로 식량을 생산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음악과 기도를 통해 그들의 영혼에 위안을 주었습니다.

다미안 신부의 가장 큰 업적은 물질적 개선뿐만 아니라, 환자들이 잃어버렸던 인간의 존엄성과 희망을 되찾도록 도운 것입니다. 그는 환자들을 병든 사람이 아닌,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귀한 존재로 대했습니다. 장례조차 제대로 치러지지 않던 섬에서 그는 죽은 환자들을 위해 관을 만들고, 장례 미사를 집전하며, 그들을 존엄하게 묻어주었습니다. 그는 환자들의 이름을 외우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과 함께 웃고 울었습니다. 점차 칼라우파파는 절망의 땅에서 희망의 공동체로 변화했습니다. 다미안 신부의 헌신적인 활동은 하와이를 넘어 유럽과 미국에까지 알려졌고, 많은 사람들이 몰로카이 섬을 돕기 위해 기부금과 물품을 보냈습니다. 또한 간호사들과 자원봉사자들이 다미안 신부를 도우려 섬을 찾아왔습니다.

자신도 한센병에 걸려 환자와 하나되다

1885년, 다미안 신부는 자신이 한센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발에 뜨거운 물을 쏟았는데 통증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 첫 징후였습니다. 의사의 진단 결과 그는 이미 한센병에 감염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듣고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제 자신이 진정으로 환자들의 형제가 되었다고 기뻐했습니다. 그는 미사 강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께 우리 나병 환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 그는 환자들을 돕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들과 완전히 같은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시어 우리와 같은 처지에 서신 강생의 신비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였습니다.

병이 진행되면서 다미안 신부의 몸은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그의 얼굴과 손은 병으로 인해 변형되었고,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집을 지을 힘은 없었지만, 환자들과 함께 기도하고, 성사를 집전하고, 위로의 말을 전했습니다. 1889년 4월 15일, 성주간의 월요일, 다미안 신부는 49세의 나이로 몰로카이 섬에서 선종했습니다. 그가 죽기 직전 남긴 말은 이렇습니다. 저는 평화롭게 죽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부르시니 기쁩니다. 그의 장례식에는 수백 명의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그들이 가장 사랑했던 아버지를 애도했습니다. 다미안 신부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가 시작한 사업은 계속되었고, 칼라우파파는 세계에서 가장 잘 조직된 한센병 환자 공동체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시성과 현대 교회에 미친 영향

다미안 신부의 선종 후 그의 명성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기 시작했으며,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개신교와 성공회에서도 그의 삶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다미안 신부를 비난하는 글을 읽고 분노하여, 그를 옹호하는 공개 서한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는 다미안 신부의 삶에 깊은 감명을 받아 자신의 비폭력 운동에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1936년, 다미안 신부의 유해는 몰로카이 섬에서 그의 고향 벨기에로 옮겨져 트레멜로의 성당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러나 2005년, 하와이 주민들의 오랜 요청으로 그의 오른손만은 다시 몰로카이 섬으로 돌아와 그가 사랑했던 땅에 묻혔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오랜 조사와 심의를 거쳐 1995년 다미안 신부를 시복했고, 2009년 10월 11일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그의 축일은 5월 10일로, 그가 몰로카이 섬에 도착한 날을 기념합니다. 교회는 그를 한센병 환자와 소외된 이들, 그리고 에이즈 환자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다미안 신부의 삶은 가톨릭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 특히 우선적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과 인간 존엄성의 존중이라는 원칙을 완벽하게 실천한 모범입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그의 메시지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새로운 형태의 나병 환자들, 즉 에이즈 환자, 노숙자, 난민, 정신질환자 등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차별받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다미안 신부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오늘날의 몰로카이 섬 어디에 서 있습니까. 그의 삶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가장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영원한 진리를 보여줍니다.

성 다미안 드 베스테르 생애의 주요 사건 연대표

연도 사건 역사적 배경
1840년 1월 3일 벨기에 트레멜로에서 출생 빅토리아 시대 초기, 유럽 산업혁명 확산기
1858년 예수와 마리아 성심회 입회 교황 비오 9세 재위 시기
1863년 10월 하와이 선교를 위해 벨기에 출발 미국 남북전쟁 중
1864년 5월 21일 호놀룰루 대성당에서 사제 서품 카메하메하 5세 하와이 왕국 통치기
1864-1873년 하와이 빅 아일랜드에서 선교 활동 하와이 왕국의 근대화와 서구화 진행
1865년 하와이 왕국 한센병 환자 격리법 제정 한센병에 대한 공포와 차별이 극심한 시기
1873년 5월 10일 몰로카이 섬 칼라우파파에 도착 세계적으로 한센병 환자 격리 정책 시행기
1873-1889년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헌신적 봉사 제국주의 시대, 태평양 지역 식민지화
1885년 자신이 한센병에 감염되었음을 확인 파스퇴르의 세균학 발전 시기
1889년 4월 15일 몰로카이 섬에서 선종 (49세) 에펠탑 완공, 제2차 산업혁명기
1936년 유해를 벨기에 트레멜로로 이장 제2차 세계대전 발발 3년 전
1995년 6월 4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 냉전 종식 후 세계 질서 재편기
2005년 오른손 유해를 몰로카이 섬으로 재이장 교황 베네딕토 16세 즉위
2009년 10월 11일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시성 세계 금융위기 이후 경제 불안정기

참고문헌 및 참고자료

1. 가톨릭 교회의 교리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 가톨릭 성인 전기집,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3. 바티칸 공식 웹사이트 - www.vatican.va (시성 관련 자료)

4. 한국천주교주교회의 - www.cbck.or.kr (전례력과 성인 자료)

5. 가톨릭 백과사전(Catholic Encyclopedia), 온라인 에디션

6. 교황청 시성성 공식 문서 및 자료

7. 예수와 마리아 성심회(Congregation of the Sacred Hearts) 공식 자료

8. 하와이 가톨릭 교구 역사 아카이브

9. 교황 베네딕토 16세 시성식 강론문, 2009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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