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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인과 교부

성 샤를 드 푸코 - 사막의 은수자이자 보편적 형제애의 사도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5.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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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방탕한 청년기를 보내다

성 샤를 드 푸코(Saint Charles de Foucauld, 1858-1916)는 1858년 9월 15일 프랑스 동부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샤를 외젠 드 푸코 드 퐁브리앙(Charles Eugène de Foucauld de Pontbriand)으로, 그는 대대로 군인을 배출한 프랑스 귀족 가문의 자손이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재산과 명예를 겸비한 상류층이었으며, 어린 샤를은 부족함 없는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가 여섯 살이 되기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아가 된 샤를과 여동생 마리는 외조부인 보데 드 모를레(Beaudet de Morlet) 대령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습니다. 외조부는 엄격한 군인이었지만 손주들을 깊이 사랑했으며, 특히 샤를에게 군인으로서의 명예와 의무를 가르쳤습니다.

청소년기의 샤를은 총명하고 재능이 많은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잃은 상실감과 사춘기의 혼란 속에서 그는 점차 신앙을 잃어갔습니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실증주의와 과학주의가 지배하던 시기였으며, 많은 지식인들이 종교를 미신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샤를도 이러한 시대 사조의 영향을 받아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1876년, 열여덟 살의 샤를은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사관학교 시절 그는 모범 생도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고, 미식과 향락을 즐겼으며, 학업과 훈련에는 소홀했습니다. 동료 생도들은 그를 게으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으로 기억했습니다. 1878년 외조부가 세상을 떠나자 샤를은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고, 이는 그의 방탕한 생활을 더욱 부채질했습니다. 1879년 그는 소위로 임관하여 알제리 주둔 기병대에 배속되었지만, 군인으로서의 의무보다는 쾌락과 향락을 추구하는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성 샤를 드 푸코 - 사막의 은수자이자 보편적 형제애의 사도

모로코 탐험과 영적 회심의 여정

1881년, 샤를의 인생에 작은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군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지만,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문화와 사막 지역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 모로코는 유럽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땅이었으며, 외국인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곳이었습니다. 1882년, 샤를은 군대를 떠나 모로코 탐험을 계획했습니다. 그는 유대인 랍비로 변장하여 모로코 전역을 여행하며 지리와 문화를 조사했습니다. 이 위험천만한 여행은 11개월간 계속되었으며, 샤를은 방대한 지리학적, 민족지학적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1884년 파리로 돌아온 그는 이 탐험 기록을 책으로 출판하여 지리학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고, 프랑스 지리학회로부터 금메달을 받았습니다. 이 탐험을 통해 샤를은 이슬람교도들의 깊은 신앙심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모로코에서 만난 무슬림들은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철저한 신앙 실천은 무신론자였던 샤를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파리로 돌아온 후 샤를은 내적 불안과 공허함에 시달렸습니다. 명성과 재산이 있었지만 진정한 기쁨과 평화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1886년, 스물여덟 살의 샤를은 사촌 마리 드 보니(Marie de Bondy) 부인의 권유로 성당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파리의 생토귀스탱 성당의 아베 위베렝(Abbé Huvelin) 신부를 만나게 되었고, 이 만남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위베렝 신부는 샤를에게 먼저 고해성사를 보라고 권했고, 고해성사를 통해 샤를은 극적인 회심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회심의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순간, 나는 하느님 외에 다른 것을 위해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자렛 영성과 트라피스트 수도원 생활

회심 후 샤를의 삶은 완전히 변화했습니다. 그는 성지 순례를 떠나 예루살렘과 나자렛을 방문했고, 특히 나자렛에서 예수님이 30년간 목수로 살며 감추어진 삶을 사셨다는 사실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자렛의 예수님은 화려한 기적이나 설교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과 노동, 가난과 겸손으로 하느님을 증거하셨습니다. 샤를은 이 나자렛의 예수님을 자신의 유일한 본보기로 삼기로 결심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영성의 핵심인 나자렛 영성입니다. 1890년, 샤를은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입회했습니다. 트라피스트 수도회는 침묵과 노동, 극도의 금욕 생활로 유명한 관상 수도회였습니다. 화려했던 귀족 생활을 버리고 가장 엄격한 수도 생활을 선택한 것은 샤를의 철저한 회심을 보여줍니다. 그는 프랑스의 노트르담 드 네주 수도원에서 수련기를 보낸 후, 시리아의 아크베스 수도원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시리아 수도원은 극도로 가난한 곳이었으며, 수도자들은 최소한의 음식으로 연명하며 하루 종일 기도와 육체노동을 했습니다. 샤를은 이곳에서 7년을 보내며 기도와 묵상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그는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삶이 자신이 추구하는 나자렛 영성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욱 가난하고, 더욱 숨겨진 삶을 살고 싶었으며, 특히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1897년, 샤를은 수도원을 떠나 다시 성지로 갔습니다. 그는 나자렛의 클라리사 수녀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지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진정으로 행복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운데 묵묵히 일하고 기도하며, 나자렛의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그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1900년, 위베렝 신부의 권유로 샤를은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1901년 6월 9일, 마흔세 살의 나이에 그는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알제리 사하라 사막으로의 선교

사제가 된 샤를은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고 싶었습니다. 그의 선택은 알제리 사하라 사막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사하라의 투아레그족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투아레그족은 베르베르계 유목민으로, 사하라 사막의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자랑스러운 전사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슬람을 믿었지만 아직 복음을 접한 적이 없었습니다. 1901년, 샤를 신부는 알제리 남부 베니 아베스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사하라 사막 끝자락의 작은 오아시스 마을이었으며, 프랑스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샤를 신부는 이곳에 작은 암자를 짓고 은수자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루에 열한 시간씩 기도했으며, 특히 성체조배에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그의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샤를 신부는 현지인들에게 복음을 직접 전파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그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병든 사람이 있으면 돌보아 주었고, 굶주린 사람이 있으면 음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는 말보다 삶으로 복음을 증거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선교 방법이었습니다. 현지인들은 처음에는 이 이상한 프랑스인 사제를 경계했지만, 점차 그의 진정성과 사랑을 느끼고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들은 샤를 신부를 마라부(이슬람 성자)라고 불렀으며, 그를 존경하고 신뢰했습니다. 1905년, 샤를 신부는 더욱 오지인 타만라셋으로 옮겨갔습니다. 타만라셋은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 있는 호가르 산맥의 작은 마을로, 투아레그족의 중심지였습니다. 샤를 신부는 이곳에서 생애 마지막 11년을 보냈습니다. 그는 여기서도 가난한 암자에서 살며, 기도하고,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동시에 그는 투아레그어를 연구하여 방대한 투아레그어-프랑스어 사전을 편찬했습니다. 이 사전은 오늘날까지 투아레그어 연구의 기초 자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순교와 예수의 작은 형제회의 탄생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사하라 지역도 불안정해졌습니다. 프랑스에 대항하는 반란 세력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사막 지역은 무법 천지가 되었습니다. 샤를 신부는 위험을 알면서도 타만라셋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투아레그족 친구들 곁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1916년 12월 1일 저녁, 무장 반란군들이 샤를 신부의 암자를 습격했습니다. 그들은 샤를 신부를 인질로 잡아 프랑스군으로부터 몸값을 받아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 순찰대가 접근하자 긴장한 반란군 중 한 명이 총을 발사했고, 총알이 샤를 신부의 머리를 관통했습니다. 샤를 신부는 즉사했습니다. 그의 나이 쉰여덟 살이었습니다. 반란군들은 암자를 약탈하고 사라졌으며, 샤를 신부의 시신은 다음 날 아침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사막 모래 위에 핏자국을 남긴 채 누워 있었습니다. 투아레그족 친구들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타만라셋 공동묘지에 안장했습니다.

샤를 신부가 세상을 떠날 때 그에게는 단 한 명의 제자도 없었습니다. 그는 수도회를 세우고 싶었지만 생전에는 아무도 그의 삶의 방식을 따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방대한 영적 일기와 편지들은 그의 사후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1933년, 프랑스의 르네 부아예 신부가 샤를 신부의 영성에 감동받아 예수의 작은 형제회를 창립했습니다. 이 수도회는 샤를 신부의 나자렛 영성을 계승하여, 가장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노동하며 기도하는 삶을 실천합니다. 이후 예수의 작은 자매회를 비롯하여 샤를 신부의 카리스마를 따르는 약 20개의 수도회와 평신도 단체들이 세계 곳곳에서 생겨났습니다. 2005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샤를 신부를 시복했고, 2022년 5월 15일 교황 프란치스코는 그를 시성했습니다. 그의 축일은 12월 1일로 정해졌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샤를 신부를 보편적 형제애의 사도라고 칭하며, 그의 삶이 오늘날 분열된 세계에 큰 교훈을 준다고 강조했습니다.

나자렛 영성과 현대 교회에 미친 영향

샤를 신부의 영성은 단순하지만 혁명적입니다. 그는 복음 선포가 반드시 말과 설교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로 증거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투아레그족을 개종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며, 그들과 함께 나누며 살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매우 진보적인 것이었으며, 오늘날 교회가 강조하는 대화와 만남의 정신을 선취한 것입니다. 샤를 신부의 나자렛 영성은 세 가지 핵심 요소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숨겨진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화려함과 권력이 아니라 겸손과 단순함 속에서 하느님을 찾아야 합니다. 둘째, 모든 사람을 형제자매로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 민족, 문화의 차이를 넘어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이며 우리의 형제자매입니다. 셋째, 기도와 관상이 모든 활동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우리 삶의 힘과 기쁨의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현대 사회는 물질주의, 개인주의, 폭력과 차별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종교 간 갈등과 문화 충돌이 심화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소외되고 버림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샤를 신부의 삶과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고 절실합니다. 그는 이슬람교도들 가운데서 살면서도 그들을 사랑하고 존중했으며, 종교의 차이가 인간적 유대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샤를 신부를 통해 진정한 선교란 무엇인지,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무엇인지를 재발견하고 있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강조하는 주변부로 나가는 교회,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교회, 대화하고 경청하는 교회의 모습은 바로 샤를 신부가 평생 실천한 것입니다. 그의 유명한 기도문인 자기 내맡김의 기도는 전 세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받고 있으며, 하느님께 완전히 자신을 맡기는 영성의 정수를 담고 있습니다. 샤를 신부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나자렛의 예수님을 어떻게 따르고 있습니까. 당신의 형제자매들, 특히 가장 작은 이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의 삶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명확하고 아름다운 대답입니다.

성 샤를 드 푸코 생애의 주요 사건 연대표

연도 사건 역사적 배경
1858년 9월 15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출생 나폴레옹 3세 제2제정 시기
1864년 부모 사망, 외조부 양육 프랑스 산업혁명 진행기
1876년 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입학 제3공화국 초기
1879년 소위 임관, 알제리 기병대 배속 프랑스 식민지 제국 확장기
1882-1883년 모로코 탐험, 지리학 연구 유럽 제국주의 아프리카 분할기
1886년 극적인 회심 체험 프랑스 세속주의와 반교권주의 확산기
1890년 트라피스트 수도회 입회 레오 13세 교황 재위 시기
1897년 수도원 떠나 나자렛 성지로 시온주의 운동 초기
1901년 6월 9일 사제 서품 (43세) 20세기 초 제국주의 전성기
1901년 알제리 베니 아베스 도착 프랑스령 알제리 식민 통치기
1905년 타만라셋으로 이주, 투아레그족과 생활 프랑스 정교분리법 제정
1905-1916년 투아레그어 사전 편찬 및 현지 선교 사하라 사막 프랑스 식민 지배 강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사하라 불안정 유럽 전역 전쟁 확산
1916년 12월 1일 타만라셋에서 반란군에 의해 순교 (58세) 제1차 세계대전 중, 북아프리카 반란기
1933년 르네 부아예 신부, 예수의 작은 형제회 창립 세계 대공황 이후
2005년 11월 13일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시복 21세기 초 종교 간 대화 강조 시기
2022년 5월 15일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시성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보편적 형제애 강조

참고문헌 및 참고자료

1. 가톨릭 교회의 교리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 가톨릭 성인 전기집,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3. 바티칸 공식 웹사이트 - www.vatican.va (시성 관련 자료)

4. 한국천주교주교회의 - www.cbck.or.kr (전례력과 성인 자료)

5. 가톨릭 백과사전(Catholic Encyclopedia), 온라인 에디션

6. 교황청 시성성 공식 문서 및 자료

7. 샤를 드 푸코 영성 자료집, 예수의 작은 형제회

8. 교황 프란치스코 시성식 강론문, 2022년 5월 15일

9. 샤를 드 푸코 서간집 및 영적 일기

10. 나자렛의 예수님을 따라서, 샤를 드 푸코 영성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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