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 말과 5세기 초,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지 한 세기가 지나면서 교회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정치적 박해는 끝났지만, 세속화와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더욱 복잡한 문제들이 등장했습니다. 부유한 기독교도들은 사치와 탐욕에 빠져들었고, 가난한 이들의 고통은 여전히 외면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안티오키아 출신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349-407)입니다. '금구'라는 별명으로 불린 그는 단순히 웅변가가 아니라, 복음의 사회적 차원을 가장 명확하게 제시한 교부 중 한 명이며, 가톨릭 사회교리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안티오키아 학파의 전통과 크리소스토모의 형성 배경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당시 동방 최대의 상업도시였던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도시는 사도 바오로의 선교 거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독특한 성서해석 전통을 가진 안티오키아 신학교의 본거지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알레고리적 해석을 선호했다면, 안티오키아 학파는 성서의 역사적·문자적 의미를 중시했습니다. 이러한 해석학적 전통은 크리소스토모로 하여금 성서의 사회적 메시지를 더욱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게 했습니다. 특히 그의 스승인 디오도로스와 테오도로스는 성서의 윤리적 차원을 강조했으며, 이는 후에 크리소스토모의 사회 비판적 설교의 신학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크리소스토모의 어머니 안투사는 20세의 젊은 나이에 홀로 된 과부였지만, 아들의 교육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습니다. 그녀는 재혼을 포기하고 오직 아들의 신앙교육과 학문 연마에 헌신했으며, 이러한 어머니의 모범은 크리소스토모의 인격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최고의 수사학자 리바니오스 밑에서 공부한 크리소스토모는 뛰어난 웅변 능력을 갖추었지만, 세속적 성공보다는 영성 생활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386년까지 약 4년간 시리아 사막에서 은수생활을 하며 금욕과 성서 연구에 몰두했는데, 이 시기의 경험이 후에 그의 설교에 깊은 영성적 깊이를 더해주었습니다.
금구설교의 특징과 사회 비판적 메시지
크리소스토모가 '금구'(크리소스토모스)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6세기경의 일이지만, 그의 설교가 지닌 특별한 힘은 이미 생전부터 널리 인정받았습니다. 그의 설교는 단순한 도덕적 훈계나 신학적 강론을 넘어서, 당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복음적 대안을 제시하는 예언자적 선포였습니다. 특히 그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극심한 격차, 사치와 낭비, 사회적 부정의에 대해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거침없이 비판했습니다. 그의 설교에는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구체적인 사회 현실이 생생하게 반영되어 있으며, 이는 추상적인 신학이 아닌 현실참여적 복음 선포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크리소스토모의 설교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는 부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강조입니다. 그는 개인의 재산이 절대적 소유권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맡겨진 청지기직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는 19세기 레오 13세 교황의 회칙 『새로운 사태』나 현대 가톨릭 사회교리에서 강조하는 '재산의 사회적 기능' 개념의 선구적 표현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단순히 개인적 자선을 권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 구조 자체의 변화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특히 노예제도, 고리대금업, 사치품 무역 등 당시의 부정의한 경제 구조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이는 현대 해방신학의 구조적 죄악 개념과 놀랍도록 유사합니다.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시절의 개혁 노력과 시련
398년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 임명된 크리소스토모는 제국의 수도에서 본격적인 교회 개혁과 사회 개혁에 나섰습니다. 그의 개혁은 먼저 성직자들의 영성 회복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성직자들은 세속적 권력에 취해 있었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크리소스토모는 이들에게 복음적 청빈과 사목적 헌신을 요구했으며, 교회 재산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습니다. 또한 그는 교회의 전례 개혁을 통해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를 강화했으며, 특히 가난한 이들이 전례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각별히 배려했습니다. 이러한 개혁 정신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 정신과 일맥상통합니다.
크리소스토모의 사회 개혁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체계적인 사회복지 제도 구축이었습니다. 그는 교회 재정을 재편하여 병원, 고아원, 나그네를 위한 숙소,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휼 기관을 대폭 확충했습니다. 특히 그가 설립한 병원들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으로 무료 진료를 원칙으로 했으며, 의료진들에게는 충분한 보수를 지급하여 의료의 질을 보장했습니다. 또한 그는 정기적으로 감옥을 방문하여 죄수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현대 가톨릭 교회의 사회사도직의 원형이라 할 수 있으며, 교회가 단순히 영적 구원만이 아니라 인간의 전인적 해방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황실과의 갈등과 예언자적 용기
크리소스토모의 사회 비판적 설교는 필연적으로 당시 권력층과의 심각한 갈등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황후 에우독시아와의 갈등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에우독시아는 사치스러운 생활과 교회 재산 탈취로 악명 높았는데, 크리소스토모는 그녀의 행동을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 그는 구약의 이세벨 왕비를 언급하며 황후의 교회 간섭을 강도 높게 질타했으며, 이는 황실의 극심한 분노를 샀습니다. 401년과 404년 두 차례에 걸친 유배는 바로 이러한 갈등의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크리소스토모는 굴복하지 않았으며, 유배지에서도 계속해서 편지와 저술을 통해 사회정의를 옹호했습니다.
크리소스토모의 예언자적 용기는 단순히 개인적 영웅주의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교회가 권력에 굴복하면 복음의 핵심인 해방의 메시지를 잃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의 마지막 설교들에서는 순교에 대한 각오까지 드러나는데, 이는 초기 교회 순교자들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었습니다. 407년 유배지에서 선종한 그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사실상의 순교로 받아들여졌으며, 후에 교회는 그를 주요 교회박사로 선포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예언자적 자세는 현대 가톨릭 교회가 사회정의를 위해 때로는 정치적 압박을 감수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전례와 영성생활 개혁의 사회적 차원
크리소스토모의 또 다른 중요한 기여는 전례 개혁을 통한 사회 통합의 실현이었습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전례는 지나치게 형식적이었고, 사회적 신분에 따른 차별이 심했습니다. 크리소스토모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담한 전례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는 성찬례에서 모든 신자가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했으며, 특히 가난한 이들과 사회적 약자들이 전례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각별히 배려했습니다. 또한 그는 전례 중에 사회정의에 관한 강론을 정기적으로 포함시켜, 전례와 사회적 실천이 분리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개혁은 오늘날 가톨릭 교회가 추구하는 '전례와 삶의 일치' 정신의 선구였습니다.
크리소스토모는 개인의 영성생활도 사회적 차원과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기도와 관상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사회적 참여를 위한 준비라고 가르쳤습니다. 특히 그의 『신품에 관하여』라는 저작에서는 성직자의 영성이 반드시 사회적 책임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그는 평신도들에게도 각자의 신분과 직업을 통해 사회정의를 실현할 것을 당부했으며, 이는 현대 가톨릭 교회의 평신도 사도직 개념의 선구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가르침은 영성생활이 개인적 완덕 추구에 그치지 않고 사회 변혁의 동력이 되어야 한다는 통합적 영성관을 보여줍니다.
현대 가톨릭 사회교리에 미친 영향
크리소스토모의 사회적 가르침은 현대 가톨릭 사회교리의 핵심 원리들을 1500년 앞서 제시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의 '부의 사회적 기능' 개념은 레오 13세의 『새로운 사태』(1891)에서 본격적으로 발전되었고, 비오 11세의 『사십년』(1931)과 요한 23세의 『어머니요 스승』(1961)을 거쳐 현재까지 가톨릭 사회교리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특히 그의 '우선적 가난한 이들 선택' 사상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의 중요한 신학적 근거가 되었으며,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회적 가르침에서도 중요하게 인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예언자적 비판 정신은 현대 교회가 사회정의를 위해 때로는 권력과 대립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크리소스토모의 통합적 사목 접근법은 현대 가톨릭 교회의 '신복음화' 정신과도 맥이 닿아 있습니다. 그는 복음 선포가 단순히 개인의 구원에 관한 메시지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변혁을 위한 해방의 메시지여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바오로 6세의 『민족들의 발전』(1967)에서 "발전은 평화의 새로운 이름"이라고 선언한 정신과 일치합니다. 또한 요한 바오로 2세가 강조한 '연대성' 원리도 크리소스토모의 공동체적 구원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이 추진하는 '통합 생태론'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 비전도 크리소스토모의 전인적 구원관과 맥을 같이 합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시대 주요 역사적 사건 연대표
연도 | 사건 | 의미 |
---|---|---|
349년 |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출생 | 안티오키아에서 기독교 가정에 태어남 |
361-363년 | 율리아누스 황제 재위 | 배교자 황제의 기독교 탄압과 이교 부활 시도 |
367년 | 리바니오스 문하 수학 | 당대 최고 수사학자로부터 웅변술 습득 |
370년 | 세례 받음 | 메렛티오스 주교로부터 세례, 본격적 신앙생활 시작 |
372-378년 | 시리아 사막 은수생활 | 극도의 금욕생활로 건강 손상까지 감수 |
378년 | 안티오키아 복귀, 부제 서품 | 플라비아누스 주교로부터 부제품 받음 |
381년 |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 아리우스 이단 최종 단죄, 니케아 신경 완성 |
386년 | 사제 서품 | 플라비아누스 주교로부터 사제품, 설교 활동 시작 |
387년 | 안티오키아 폭동 사건 | 황제상 파괴 사건으로 시민들 용서 위해 황제께 탄원 |
398년 |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임명 | 아르카디우스 황제에 의해 수도 대주교로 임명 |
401년 | 참나무 회의, 1차 유배 | 알렉산드리아 테오필로스 주교의 모함으로 유배 |
401년 | 지진으로 복귀 | 콘스탄티노플 지진으로 황후가 두려워해 복귀 허용 |
403년 | 에우독시아 황후와 갈등 심화 | 황후의 사치와 교회 탄압을 공개적으로 비판 |
404년 | 2차 유배, 콘스탄티노플 떠남 | 복활절 세례식 방해 사건으로 최종 유배 결정 |
404-407년 | 아르메니아 쿠쿠소스 유배 | 유배지에서도 편지와 저술로 목회 활동 지속 |
407년 9월 14일 |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선종 | 흑해 연안 코만나에서 58세 나이로 선종 |
438년 | 유해 콘스탄티노플 이장 | 테오도시우스 2세가 조부의 죄를 참회하며 성대히 모셔옴 |
1568년 | 교회박사 선포 | 비오 5세 교황이 교회박사로 공식 선포 |
참고문헌 및 자료
-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전집』, 분도출판사 편역, 분도출판사, 2005-2010
- 『교부학 개론』, 요한네스 크바스텐, 분도출판사, 2000
- 『크리소스토모의 사회사상』, 김용주,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03
- 『초기 교회의 사회윤리』, 로널드 시더, 한국장로교출판사, 1995
- 『가톨릭 사회교리 문헌집』,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6
- 『동방 교부들의 신학』, 존 맥그래스,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1
- 교황청 경신성사성 -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전례에 관한 지침
- 바티칸 공의회 문헌 - 『사목 헌장』과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 한국가톨릭대사전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찬
- 가톨릭 백과사전 온라인판 - newadvent.org/cathen
- 동방 교회사 연구 - 한국동방교회학회 논문집
- 『사회정의와 교부들』, 이형우, 성바오로출판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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