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의 영광 속 뛰어난 장군
성 유스타키오는 본래 플라치두스라는 이름을 가진 로마제국의 고위 군사령관이었습니다. 2세기 초 트라야누스 황제 치하에서 그는 탁월한 군사적 재능으로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황제의 신임을 받는 장군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는 막강한 권력과 재산, 명예를 누리며 로마 사회의 정상층에 속했습니다. 아내 테오피스타와 두 아들 아가피투스와 테오피스투스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으며, 세상적으로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로마의 다신교가 채워주지 못하는 영적 갈증이 있었습니다. 플라치두스는 본성적으로 자비롭고 정의로운 사람이었으며, 가난한 이들을 돕고 포로들을 인자하게 대하는 등 덕망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팍스 로마나의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의심과 박해가 시작되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플라치두스는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극적인 회심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냥 중 체험한 십자가 환시와 극적인 회심
플라치두스의 삶을 완전히 바꾼 사건은 사냥 중에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그는 부하들과 함께 숲속으로 사냥을 나갔습니다. 사냥감을 추적하던 중 그는 유난히 아름답고 거대한 수사슴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냥꾼들과 떨어져 홀로 그 사슴을 뒤쫓았고, 사슴은 그를 깊은 숲속으로 이끌었습니다. 마침내 사슴이 바위 위에 멈춰 섰을 때,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사슴의 뿔 사이에서 찬란한 빛이 빛나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플라치두스여, 왜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모르고 섬기던 예수 그리스도다. 너의 자선과 기도가 내 앞에 올라왔다." 이 초자연적 체험은 플라치두스를 깊은 영적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그는 즉시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자비를 청했으며,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아내에게 환시에 대해 이야기했고, 놀랍게도 그의 아내 역시 같은 날 밤 꿈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명백한 섭리였습니다. 가족 전체는 함께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고, 당시 로마의 주교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플라치두스는 유스타키오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그의 아내와 자녀들도 각각 새로운 이름으로 거듭났습니다. 이 회심은 사도 바울의 다마스쿠스 체험에 비견될 만큼 극적이고 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욥과 같은 시련 - 가족의 흩어짐과 모든 것의 상실
회심 직후 유스타키오는 세례를 주었던 주교로부터 충격적인 예언을 들었습니다. 그는 구약의 욥처럼 신앙의 시련을 겪게 될 것이며, 하느님께서 그의 충성을 시험하실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예언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역병으로 그의 모든 하인들이 죽었고, 도둑들이 그의 재산을 약탈해갔습니다. 가축들은 병으로 폐사했고, 군대에서의 지위마저 잃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유스타키오는 가족과 함께 이집트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배의 선장이 아내 테오피스타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녀를 빼앗으려 했고, 뱃삯을 지불하지 못한 유스타키오는 아내와 생이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욱 비극적인 일은 두 아들을 데리고 강을 건너던 중에 일어났습니다. 한 아들을 강 건너편에 남겨두고 다른 아들을 데리러 돌아오는 사이, 사자와 늑대가 각각 두 아들을 물고 갔습니다. 순식간에 모든 가족을 잃은 유스타키오는 절망에 빠졌지만,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욥처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셨으니, 주님의 이름이 찬미받으소서"라고 고백하며 하느님을 찬양했습니다. 이후 15년 동안 그는 한 마을에서 품팔이 일꾼으로 살아가며 가난과 고독 속에서도 기도와 신앙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이 긴 시련의 시기는 그의 영혼을 정화하고 신앙을 단련하는 기간이었습니다.
기적적인 가족 재회와 신앙의 승리
하느님의 섭리는 신비롭게 작용했습니다. 유스타키오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두 아들은 실제로 죽지 않았습니다. 사자와 늑대에게 물려간 것처럼 보였지만, 지나가던 농부들과 목동들이 아이들을 구해 각각 다른 마을에서 양자로 키웠던 것입니다. 두 형제는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성장했지만, 모두 로마 군대에 입대하여 용감한 군인이 되었습니다. 한편 아내 테오피스타는 선장의 손아귀에서 기적적으로 벗어나 한 마을에서 정절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15년이 지난 후, 로마제국은 외부의 침략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했고, 황제는 과거의 명장 플라치두스를 다시 찾기 시작했습니다. 사신들이 전국을 수색한 끝에 보잘것없는 품팔이로 살고 있던 유스타키오를 발견했습니다. 황제는 그에게 다시 군사령관의 지위를 주었고, 유스타키오는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놀랍게도 그의 부하 중에 두 젊은 장교가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자신의 두 아들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군대가 머물던 마을에서 한 여인이 군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했는데, 그녀가 바로 아내 테오피스타였습니다. 여러 우연과 대화를 통해 점차 진실이 밝혀졌고, 마침내 가족 전체가 기적적으로 재회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시련 끝에 주시는 축복이었으며, 욥이 회복된 것과 같은 은총이었습니다. 가족들은 함께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시련을 통해 더욱 깊어진 신앙을 확인했습니다.
최후의 시련과 순교의 영광
가족의 재회와 명예의 회복은 행복한 결말이 아니라 더 큰 시련의 시작이었습니다. 승리를 거두고 로마로 돌아온 유스타키오에게 황제는 성대한 개선식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개선식의 절차에는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의식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유스타키오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그동안 숨겨왔던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제 공개적으로 고백할 때가 온 것입니다. 황제는 배신감과 분노로 그를 심문했습니다. "네가 로마의 영광을 위해 싸우면서도 로마의 신들을 거부하느냐?" 유스타키오는 담대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오직 한 분 참 하느님만을 섬기며, 우상에게는 절할 수 없습니다." 황제는 회유와 협박을 시도했지만, 유스타키오뿐 아니라 그의 아내와 두 아들도 모두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황제는 가족 전체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처형 방법은 극도로 잔인했습니다. 그들은 불에 달군 청동 황소 안에 갇혀 천천히 죽어가도록 했습니다. 서기 118년경, 유스타키오와 그의 가족은 함께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사흘 후 그들의 시신을 거둘 때 몸이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의 순교를 받아들이신 표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성 유스타키오 가족의 순교는 초대교회에 큰 감동을 주었으며, 많은 이교도들이 그들의 용기에 감화되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습니다.
사냥꾼과 시련 중에 있는 이들의 수호성인
성 유스타키오는 특별히 사냥꾼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습니다. 이는 그가 사냥 중에 그리스도를 만났고, 사슴의 뿔 사이 십자가 환시를 통해 회심했기 때문입니다. 중세시대에는 귀족들과 사냥꾼들 사이에서 성 유스타키오에 대한 공경이 널리 퍼졌으며, 많은 사냥 길드와 단체들이 그를 수호성인으로 모셨습니다. 그의 이미지는 수많은 예술작품에서 사슴과 십자가와 함께 묘사되었고, 이는 자연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영성을 상징합니다. 또한 그는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 특히 가족을 잃은 사람들과 시련을 겪는 이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욥과 같은 극심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신앙을 지켰기에, 많은 신자들이 역경 속에서 그의 전구를 청합니다. 가톨릭교회는 매년 9월 20일을 성 유스타키오 축일로 지키며, 동방 정교회에서도 그를 중요한 성인으로 공경합니다. 그의 유해는 로마의 산 유스타키오 성당에 안치되어 있으며, 수세기 동안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성 유스타키오의 이야기는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회심의 은총, 시련 속의 인내, 그리고 순교의 용기라는 보편적 신앙의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각자의 삶에서 '십자가 환시'를 체험하고, 시련을 이겨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가톨릭 전통과 예술 속의 성 유스타키오
성 유스타키오의 이야기는 중세 이후 서양 그리스도교 예술과 문화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그의 회심 장면은 수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피사넬로는 성 유스타키오의 환시를 섬세하고 아름답게 묘사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를 비롯한 북유럽 화가들도 이 주제를 다루었으며, 자연과 초자연의 만남이라는 신비로운 순간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중세 교회 건축에서도 성 유스타키오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로마의 산 유스타키오 성당을 비롯해 유럽 전역에 그의 이름을 딴 성당들이 세워졌고, 스테인드글라스와 조각으로 그의 생애가 형상화되었습니다. 특히 파리의 생테스타슈 성당은 웅장한 고딕 건축으로 유명하며, 이곳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사냥꾼들과 음악가들을 위한 미사가 봉헌됩니다. 성 유스타키오에 대한 공경은 단순히 과거의 유산이 아닙니다. 현대 가톨릭교회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회심의 중요성, 시련 속의 신뢰, 가족의 가치, 그리고 순교 정신을 가르칩니다. 특히 세속화되고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현대사회에서 성 유스타키오의 극적인 회심은 우리에게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질문하게 합니다. 그는 권력과 명예와 재산을 모두 가졌지만 그리스도를 만나고서야 진정한 행복을 발견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일상 속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회심의 은총을 받아들이며, 어떤 시련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그에게서 배웁니다.
성 유스타키오 관련 역사적 사건 연대표
| 연도 | 사건 | 내용 |
|---|---|---|
| 98년경 | 트라야누스 황제 즉위 | 로마제국의 전성기, 플라치두스 장군으로 활약 |
| 100년경 | 사냥 중 십자가 환시 | 사슴의 뿔 사이 십자가를 보고 극적인 회심 체험 |
| 100년 | 가족 전체 세례 | 플라치두스가 유스타키오라는 세례명을 받음 |
| 101-103년경 | 욥과 같은 시련 | 재산 상실, 가족과의 생이별, 15년간의 유랑 생활 |
| 115년경 | 로마군 사령관 복귀 | 황제의 부름으로 다시 군사령관으로 임명됨 |
| 116년경 | 기적적인 가족 재회 | 전쟁 후 아내와 두 아들과 극적으로 재회 |
| 118년경 | 신앙 고백과 순교 | 우상 제사 거부, 가족 전체가 청동 황소 안에서 순교 |
| 4-5세기 | 성인 공경 시작 | 동서방 교회에서 순교자로 공경받기 시작 |
| 중세시대 | 사냥꾼의 수호성인 | 유럽 전역에서 사냥꾼과 시련 중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널리 공경 |
| 현재 | 9월 20일 축일 |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에서 기념 |
참고문헌 및 참고사이트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매일미사』, 생활성서사
•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위원회, 『한국가톨릭대사전』
• 야코부스 데 보라기네, 『황금전설 (Legenda Aurea)』 - 중세 성인전 모음집
• 바티칸 공식 웹사이트 (www.vatican.va) - 성인 전기 자료
• 가톨릭 백과사전 (www.catholic.or.kr)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 Butler's Lives of the Saints - 성인 전기 총서
• 『로마 순교록』 (Martyrologium Romanum) - 교회 공식 순교자 목록
• 가톨릭 성미술 연구소 자료
• 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학술자료
• 초대교회사 관련 학술논문 및 연구서
본 글은 가톨릭교회의 전승과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성 유스타키오의 이야기는 초대교회 순교자 전승에 기반하고 있으며, 중세 『황금전설』을 통해 널리 알려졌습니다. 모든 내용은 교회의 가르침과 신뢰할 수 있는 가톨릭 문헌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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