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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세계사와 함께 보는 가톨릭

십자군과 동서 교회 관계의 역사적 전개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6.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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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분열 이전의 동서 교회 긴장

기독교 역사에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은 오랜 세월에 걸쳐 누적된 신학적, 문화적, 정치적 차이의 결과였습니다. 로마 제국이 395년 동서로 분할된 이후, 콘스탄티노플과 로마는 각각 동방과 서방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언어의 차이도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서방은 라틴어를 사용했고, 동방은 그리스어를 사용했기에 신학적 토론과 전례 전통이 서로 다르게 발전했습니다. 신학적 논쟁도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필리오케(Filioque) 문제는 심각한 갈등의 원인이었습니다. 서방교회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Filioque) 발하신다는 구절을 추가했으나, 동방교회는 이를 공의회의 결정 없이 임의로 신경을 변경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또한 교황의 수위권 문제도 핵심 쟁점이었습니다. 로마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전체 교회에 대한 최고 권위를 주장했으나, 동방 총대주교들은 다섯 총대주교좌(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동등성을 강조했습니다. 858년 포티오스 분열과 1054년 미카엘 케룰라리오스와 훔베르트 추기경 사이의 상호 파문 사건은 이러한 긴장의 정점이었습니다. 비록 1054년 사건이 당시에는 개인적 충돌로 여겨졌지만, 후대에 이것이 동서교회 대분열의 상징적 사건으로 인식되었습니다. 11세기 말 십자군이 시작될 무렵, 동방과 서방은 이미 깊은 불신과 오해로 가득했습니다.

십자군과 동서 교회 관계의 역사적 전개

제1차 십자군과 초기의 협력

1095년 11월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성지 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선포했습니다. 그의 연설은 여러 동기를 담고 있었습니다. 우선 비잔티움 제국이 셀주크 투르크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고,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서방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티움 군대가 참패한 이후, 소아시아 대부분이 투르크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교황은 또한 예루살렘 성지를 이슬람 지배에서 해방하고, 그곳을 순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려는 종교적 목적을 제시했습니다. 더불어 우르바노 2세는 이 원정이 동서교회의 재결합을 가져올 수 있다는 희망도 품고 있었습니다. 공동의 적과 싸우는 과정에서 교회의 일치가 회복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입니다. 1096년 출발한 제1차 십자군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097년 니케아를 점령하고, 1098년 안티오키아를 함락했으며, 1099년 7월 15일 마침내 예루살렘을 탈환했습니다. 그러나 초기부터 십자군과 비잔티움 사이에는 불신이 있었습니다. 십자군 지도자들은 황제에게 충성 서약을 강요받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고, 비잔티움은 십자군이 정복한 땅을 제국에 반환하지 않는 것에 분노했습니다. 특히 안티오키아의 경우, 십자군 지도자 보에몽이 자신의 공국으로 삼으면서 비잔티움과 심각한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그럼에도 제1차 십자군은 상대적으로 동서교회 관계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했고, 예루살렘 라틴 왕국이 수립되면서 동방과 서방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성지를 지키게 되었습니다.

십자군 국가들과 교회 관계의 복잡성

예루살렘 왕국, 안티오키아 공국, 에데사 백국, 트리폴리 백국 등 십자군 국가들이 수립되면서 동방에는 새로운 정치적 지형이 형성되었습니다. 이 지역들에는 원래 동방정교회 신자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고, 그들에게는 고유한 총대주교와 주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군은 라틴 전례의 총대주교와 주교들을 임명하여 교회 위계를 이중으로 만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라틴 총대주교가 세워졌고,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는 추방되거나 종속적 지위로 전락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동방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들은 이슬람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대했으나, 오히려 서방 그리스도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 재산이 몰수되고, 동방 전례가 억압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십자군 국가가 동일하게 억압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라틴과 그리스 교회가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공존했고, 혼인과 문화 교류를 통해 상호 이해가 깊어지기도 했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왕국의 일부 통치자들은 동방 그리스도인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전통을 인정했습니다. 성묘교회(Holy Sepulchre)에서는 라틴과 그리스 성직자들이 각자의 전례를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십자군 국가들의 존재는 동서교회 사이의 긴장을 완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갈등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동방정교회는 서방교회가 군사력을 동원해 자신들을 종속시키려 한다고 인식하게 되었고, 이는 신학적 차이를 넘어선 정치적, 민족적 대립으로 발전했습니다.

제4차 십자군과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비극

동서교회 관계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약탈이었습니다. 1202년 베네치아에서 출발한 제4차 십자군은 애초에 이집트를 공격할 계획이었으나, 베네치아 총독 엔리코 단돌로의 영향으로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의 왕위 계승 분쟁에 개입하게 된 십자군은 1203년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습니다. 처음에는 알렉시오스 4세를 황제로 옹립하는 데 성공했으나, 약속된 보상이 지급되지 않자 십자군과 비잔티움 사이에 갈등이 격화되었습니다. 1204년 4월 12일,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무력으로 점령했습니다. 이어진 사흘간의 약탈은 상상을 초월하는 야만적 행위였습니다.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기독교 제국의 수도가 같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유린당한 것입니다. 성 소피아 대성당이 약탈당했고, 성유물과 예술품들이 파괴되거나 서방으로 반출되었습니다. 수많은 시민들이 살해되거나 노예로 팔렸습니다. 비잔티움 역사가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이 참상을 기록하며, 사라센인들조차 이보다 자비로웠을 것이라고 개탄했습니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에 라틴 제국을 세우고, 라틴 총대주교를 임명했습니다. 비잔티움 황실과 정교회 총대주교는 니케아로 피난하여 망명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라틴 제국은 1261년까지 지속되었으나, 이 반세기는 동서교회 관계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처음에는 콘스탄티노플 약탈을 비난했으나, 나중에는 이를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며 교회 일치의 기회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동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는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었습니다. 이후 동방정교회는 서방과의 재결합을 터키인들의 지배보다 더 나쁜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표현처럼, 터키인의 터번이 교황의 삼관보다 낫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교회 일치를 향한 공의회 시도들

1204년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교회 일치를 향한 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비잔티움 제국이 오스만 투르크의 위협에 직면하면서, 정치적 필요성이 대화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1274년 리옹 제2차 공의회는 교회 재결합을 논의했습니다. 비잔티움 황제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는 서방의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해 교회 일치에 동의했습니다. 그는 사절단을 파견하여 필리오케를 인정하고 교황의 수위권을 받아들인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황제의 정치적 결정일 뿐, 동방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의 진정한 합의가 아니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격렬한 반대 운동이 일어났고, 황제 사후 일치 선언은 폐기되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시도는 1438년부터 1445년까지 열린 페라라-피렌체 공의회였습니다. 비잔티움 황제 요한네스 8세 팔라이올로고스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요셉 2세는 700명의 대표단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왔습니다. 이는 동서교회 대표들이 직접 만나 신학적 쟁점들을 논의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필리오케 문제, 교황의 수위권, 연옥 교리, 성찬 전례 등 주요 쟁점들이 심도 있게 토론되었습니다. 동방의 대표적 신학자 마르코스 에우게니코스(에페소스의 마르코스)는 동방정교회의 입장을 강력하게 옹호했습니다. 반면 베사리온 추기경은 일치를 지지했습니다. 1439년 7월 6일, 피렌체에서 일치 칙서 라에텐투르 카엘리(Laetentur Caeli, 하늘이 기뻐하라)가 선포되었습니다. 이 문서는 양측의 신학적 표현을 인정하면서도, 교황의 수위권과 필리오케의 정통성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대표단이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을 때, 동방 교회는 이 결정을 거부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를 제국의 생존을 위한 정치적 타협으로 보았고, 신학적 진실성이 희생되었다고 비판했습니다. 마르코스 에우게니코스는 일치 선언에 서명하지 않았으며, 그는 동방정교회 신앙의 수호자로 추앙받았습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교회 관계의 종말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습니다. 마지막 비잔티움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성벽을 지키다 전사했고, 천년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 사건은 동서교회 관계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피렌체 공의회의 일치 선언은 완전히 무효화되었고, 동방정교회는 이제 이슬람 제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펼쳐, 정교회 총대주교에게 밀레트(millet) 제도 하에서 종교적 자치권을 부여했습니다. 총대주교는 단순히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제국 내 모든 정교회 신자들의 민족적, 행정적 대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방정교회는 서방과의 접촉이 더욱 어려워졌고,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서방에서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동방에서는 오스만 지배 아래서 전통을 보존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원래 성지 탈환과 교회 일치라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되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동서교회의 분열을 더욱 깊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1204년 콘스탄티노플 약탈은 동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방에 대한 깊은 불신을 심어주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양 교회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십자군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과 약탈은 복음의 정신과 거리가 멀었으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형제들을 공격한 것은 교회 역사의 어두운 장으로 남았습니다.

근현대 교회 일치 운동의 발전

동서교회의 분열은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으나, 20세기 들어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일치 운동에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64년 공의회는 일치교령(Unitatis Redintegratio)을 선포하여, 분리된 형제 교회들과의 대화와 협력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동방정교회에 대해서는 참된 성사와 사도적 계승을 가진 교회로 인정하며, 존중과 사랑으로 대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1964년 12월 7일, 교황 바오로 6세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는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습니다. 이들은 1054년의 상호 파문을 공식적으로 철회하고, 새로운 대화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는 상징적이지만 매우 중요한 화해의 몸짓이었습니다. 1965년 두 지도자는 공동 선언을 발표하여, 과거의 오해와 적대감을 유감스럽게 여기며, 사랑과 일치의 길로 나아갈 것을 다짐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 일치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그는 회칙 하나되게 하소서(Ut Unum Sint, 1995)에서 교회 분열이 그리스도의 뜻에 반하는 스캔들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동방정교회를 교회의 양 폐로 비유하며, 교회는 동방과 서방이 함께 숨 쉴 때 완전해진다고 강조했습니다. 2001년 그는 그리스를 방문하여 십자군과 1204년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습니다. 이는 가톨릭교회가 역사적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한 화해를 추구한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 1세는 긴밀한 우애를 유지하며 정기적으로 만남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4년 예루살렘에서의 만남, 2016년 레스보스 섬 난민 방문 등은 양 교회가 공동의 사명을 위해 협력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신학적 대화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국제 가톨릭-정교회 신학 대화 위원회는 1980년부터 활동하며 성사론, 교회론, 수위권 등 핵심 쟁점들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일치에는 여전히 많은 장애물이 남아 있지만, 양측 모두 기도와 대화를 통해 주님의 뜻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역사가 주는 교훈과 일치를 향한 여정

십자군과 동서교회 관계의 역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첫째, 정치적 목적이 신앙의 순수성을 오염시킬 때 얼마나 큰 해악이 발생하는지 보여줍니다. 십자군은 성지 탈환이라는 종교적 명분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영토 확장, 경제적 이익, 정치적 야심이 개입하면서 본래의 목적을 잃었습니다. 1204년 콘스탄티노플 약탈은 이러한 타락의 극치였습니다. 둘째, 문화적 오만과 상대에 대한 이해 부족이 얼마나 심각한 분열을 초래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서방 그리스도인들은 동방의 전례와 신학 전통을 열등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고, 동방 그리스도인들은 서방을 혁신과 권위주의로 비판했습니다. 상호 존중과 겸손의 부족이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셋째, 폭력은 결코 복음의 방법이 될 수 없음을 확인합니다. 십자군의 무력 사용, 특히 같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폭력은 교회의 신뢰성에 치명적 타격을 입혔습니다. 예수님은 검을 든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가르치셨는데, 십자군의 역사는 이 진리를 뼈아프게 증명합니다. 넷째, 진정한 일치는 강요나 정복이 아니라 대화와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배웁니다. 리옹과 피렌체 공의회의 일치 시도가 실패한 것은, 그것이 정치적 압력과 급박한 필요에서 나온 것이지 진정한 신학적 합의와 영적 화해에 기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천년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동방과 서방은 여전히 하나의 세례, 하나의 신앙, 하나의 주님을 고백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대화는 비록 느리지만 확실한 진전을 보이고 있습니다. 교회 일치는 인간의 노력만으로 이룰 수 없으며, 성령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십자군 시대의 비극적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솔직히 직시하고, 잘못을 인정하며,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추구해야 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2000년 대희년에 교회의 역사적 죄악에 대해 용서를 청한 것은 이러한 정신의 표현이었습니다. 동서교회의 완전한 일치는 아직 먼 길이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일이며, 따라서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며 대화하고, 사랑으로 섬기며, 진리를 함께 추구하는 여정을 계속해야 합니다. 십자군의 역사는 어두운 경고이지만, 동시에 화해와 일치를 향한 소중한 교훈이기도 합니다.

역사적 사건 연표

연도 사건
1054년 동서교회 대분열, 상호 파문 사건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비잔티움 제국의 참패
1095년 11월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십자군 선포
1096년 제1차 십자군 출발
1099년 7월 15일 제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함락
1099년 예루살렘 왕국 수립, 라틴 총대주교 임명
1147-1149년 제2차 십자군, 다마스쿠스 공격 실패
1187년 살라딘이 예루살렘 탈환
1189-1192년 제3차 십자군, 아크레 점령
1202년 제4차 십자군 출발
1204년 4월 12일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약탈
1204-1261년 콘스탄티노플 라틴 제국 시대
1261년 비잔티움 제국 회복, 미카엘 8세의 콘스탄티노플 탈환
1274년 리옹 제2차 공의회, 교회 일치 선언(동방의 거부로 실패)
1438-1445년 페라라-피렌체 공의회, 동서교회 대표 참석
1439년 7월 6일 피렌체 일치 칙서 선포(동방 교회의 거부로 무효화)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 함락, 비잔티움 제국 멸망
1962-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일치 운동 강조
1964년 12월 7일 교황 바오로 6세와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 1054년 파문 철회
1980년 국제 가톨릭-정교회 신학 대화 위원회 설립
199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하나되게 하소서 발표
200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그리스 방문 중 십자군 만행 사과
2014년 교황 프란치스코와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 1세, 예루살렘 만남

참고문헌 및 사이트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일치 교령(Unitatis Redintegratio), 1964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하나되게 하소서(Ut Unum Sint), 1995
  • 스티븐 런시먼, 십자군 전쟁사(A History of the Crusades), 서울: 르네상스, 2015
  • 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Byzantium: The Decline and Fall), 서울: 바다출판사, 2011
  • 토마스 F. 매든, 십자군의 진실(The New Concise History of the Crusades), 서울: 갈무리, 2010
  • 워렌 트레드골드, 비잔티움 제국사(A History of the Byzantine State and Society), 서울: 까치, 2019
  • 한국가톨릭대사전 - www.catholic.or.kr
  • 가톨릭 백과사전(Catholic Encyclopedia) - www.newadvent.org
  • 바티칸 공식 웹사이트 - www.vatican.va
  •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 공식 사이트 - www.patriarchat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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