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교회사 · 이탈리아 통일과 교황청
천 년 넘게 이탈리아 중부를 다스린 교황의 세속 권력이
민족주의의 물결 앞에 스러진 그 이야기입니다.

1870년 9월 20일 새벽, 이탈리아 통일군의 대포가 로마 성벽을 향해 불을 뿜었습니다. 포르타 피아 성문이 무너지고 이탈리아 왕국의 군대가 로마로 입성했습니다. 비오 9세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지척인 퀴리날레 궁전에서 항복하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그는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싸울 방법이 없었습니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교황이 다스려온 교황령, 이탈리아 중부의 광활한 영토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교황은 스스로 바티칸에 유폐를 선언했습니다. 로마를 빼앗긴 교황이 신앙의 권위만으로 세상과 맞서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Section 01교황령이란 무엇이었나 — 천 년의 세속 권력
교황령(Stato della Chiesa, Stato Pontificio)은 단순한 종교 기관의 부속 영토가 아니었습니다. 8세기부터 이탈리아 반도 중부에 자리 잡은 독립된 주권 국가로, 교황이 로마 주교이자 세속 군주라는 이중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756년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가 롬바르디아인에게서 빼앗은 땅을 교황에게 기증한 '피핀의 기증(Donatio Pippini)'이 교황령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성기 교황령은 로마와 라치오 지역, 움브리아, 마르케, 에밀리아로마냐 일부 등 중부 이탈리아의 광대한 지역을 포괄했습니다. 수십만 명의 백성이 교황의 통치 아래 살았고, 교황청은 세금을 거두고 군대를 유지하고 사법을 집행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잠시 해체되었다가 1815년 빈 회의 이후 회복되었고, 이후에도 프랑스군의 보호 아래 유지되었습니다.
교황령의 존재에 대해서는 교회 내부에서도 오래전부터 논쟁이 있었습니다. 세속 군주로서의 역할이 교황의 영적 직무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비판이 있었는가 하면, 교황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영토적 기반이 필수적이라는 옹호론도 강했습니다. 이 논쟁은 1870년 이후 교황령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역사가 직접 답을 내놓는 방식으로 해소되었습니다.
Section 02리소르지멘토 —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불꽃
19세기 초부터 이탈리아 반도에는 통일을 향한 열망이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부흥·재탄생)'라 불리는 이 운동은 수십 개로 분열된 이탈리아 공국들을 하나의 민족 국가로 통합하자는 움직임이었습니다. 이 운동에는 세 가지 강한 흐름이 있었습니다. 마치니(Giuseppe Mazzini)의 공화주의적 민족주의, 카부르(Camillo di Cavour)의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중심 외교주의, 그리고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의 혁명적 군사 행동이었습니다.
이 통일 운동 앞에서 교황청은 매우 복잡한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비오 9세는 이탈리아 통일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습니다. 1846년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그는 사면령을 내리고 자유주의적 개혁을 시도하여 민족주의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1848년 혁명의 물결이 교황령 내부에서도 반란으로 이어지고 자신이 쫓겨나는 상황을 겪으면서, 비오 9세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완고한 반대자로 돌아섰습니다.
리소르지멘토 세력에게 교황령은 이탈리아 통일의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였습니다. 이탈리아 반도의 중심에 자리한 교황령을 넘지 않고서는 남북을 연결하는 통일 국가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카부르는 외교를 통해, 가리발디는 군사력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1859~1860년 사이 교황령의 북부 지역들(에밀리아로마냐, 마르케, 움브리아)이 차례로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되었습니다. 남은 것은 로마와 그 주변의 좁은 영토뿐이었고, 그것도 프랑스군이 주둔하는 동안만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교황 · 바티칸 유폐
교황 비오 9세
1792 – 1878
역사상 재위 기간이 가장 긴 교황(31년). 처음에 자유주의적 개혁을 시도했으나 1848년 혁명 경험 후 보수로 전환. 교황령 상실 후 바티칸 유폐를 자처했음.
사르데냐 재상 · 통일 설계자
카밀로 카부르
1810 – 1861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재상. 프랑스와의 동맹·외교로 이탈리아 통일의 토대를 마련. 통일 직전인 1861년 사망하여 완성을 보지 못함.
혁명 지도자 · 붉은 셔츠
주세페 가리발디
1807 – 1882
1,000명의 '붉은 셔츠단'으로 시칠리아·남이탈리아 정복. 교황령 공격에도 앞장섰으나 교황청과의 충돌로 인해 수차례 저지됨.
교황 · 라테라노 조약 체결
교황 비오 11세
1857 – 1939
1929년 무솔리니와 라테라노 조약 체결로 약 60년간의 '로마 문제'를 해결. 바티칸 시국을 수립. 그러나 파시즘과의 타협이라는 비판도 받음.
Section 031870년 9월 20일 — 포르타 피아의 총성
교황령의 마지막 보루를 지킨 것은 프랑스군이었습니다. 나폴레옹 3세가 주둔시킨 프랑스 군대 덕분에 교황령은 1860년대 내내 이탈리아 통일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870년 7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이 터지면서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 모든 병력을 투입하기 위해 로마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철수시켰습니다.
프랑스군이 떠나자 이탈리아 왕국군은 즉시 행동에 나섰습니다. 1870년 9월 11일 이탈리아군이 교황령 국경을 넘었고, 9월 20일 이른 아침 포르타 피아(Porta Pia) 성문 인근 성벽에 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비오 9세 교황은 교황령의 소규모 군대에게 상징적 저항만 하고 항복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는 불필요한 피를 흘리지 않으려 했습니다. 성벽이 뚫리고 불과 수 시간 만에 교황군은 백기를 들었습니다. 이탈리아군의 사상자는 49명, 교황군은 19명이었습니다.
그 다음 날 로마에서는 주민 투표가 실시되었고, 압도적인 다수결로 이탈리아 왕국 합류가 결정되었습니다. 1871년 로마는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정부는 비오 9세에게 로마의 중심부인 트라스테베레 지역을 거주지로 제공하고 생활비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비오 9세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는 성 베드로 광장과 바티칸 궁전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죽는 날까지 바티칸을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른바 '바티칸 포로(Il prigioniero del Vaticano)'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에밀리아로마냐·마르케·움브리아 상실
교황령 북부·중부 지역이 이탈리아 왕국 국민투표로 차례 합병. 교황령 면적 3분의 2 소멸.
로마 합병 — 교황령 완전 소멸
포르타 피아 포격 후 로마 입성. 비오 9세, 바티칸 유폐 선언. 1,100년 교황 세속 권력 종말.
바티칸 시국 탄생
라테라노 조약으로 0.44㎢의 바티칸 시국 탄생. 세계에서 가장 작은 주권 국가로 교황 독립성 회복.
Section 04바티칸 유폐와 로마 문제 — 60년의 긴 교착
비오 9세가 스스로 선택한 유폐는 단순한 항의 표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략적이고 신학적인 선언이었습니다. 교황이 로마 성 밖으로 나서는 순간, 그것은 이탈리아 정부의 통치를 묵시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었습니다. 비오 9세는 이탈리아 왕국이 '불법적으로' 교황령을 빼앗았다고 규정하고, 그 상황이 해결될 때까지 어떠한 타협도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이탈리아 정부는 1871년 보장법(Legge delle Guarentigie)을 제정하여 교황에게 바티칸과 라테라노 궁전, 카스텔 간돌포의 소유권과 더불어 일정한 주권적 특권을 부여했습니다. 국가가 교황에게 연간 보조금을 지급하겠다는 조항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나 비오 9세는 이 법안을 일방적인 이탈리아 법률에 불과하다며 거부했습니다. 교황의 지위는 국가가 일방적으로 법률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주권에 의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교황청의 논리였습니다.
비오 9세는 1878년까지 바티칸을 떠나지 않은 채 선종했습니다. 후임 교황 레오 13세, 비오 10세, 베네딕토 15세, 비오 11세도 모두 이 유폐 전통을 이어갔습니다. 약 60년간 교황과 이탈리아 국가는 공식적으로는 적대 관계였습니다. 이 상황을 '로마 문제(La Questione Romana)'라 불렀습니다. 이탈리아 가톨릭 신자들은 교황과 국가 사이에서 심각한 양심적 딜레마에 처했으며, 교황청은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선거 불참을 권고하기도 했습니다.
📜 비(非)엑스페디트(Non Expedit)란?
교황청이 이탈리아 가톨릭 신자들에게 이탈리아 왕국의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지 말 것을 권고한 지침입니다. 라틴어로 "적합하지 않다(It is not expedient)"는 뜻입니다. 1868년 교황청이 처음 발표하고 비오 9세 이후 강화되었습니다.
이 지침은 교황청이 이탈리아 왕국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상징이었으며, 동시에 이탈리아 가톨릭 신자들을 정치 과정에서 소외시키는 역효과도 낳았습니다. 1904년 비오 10세 교황에 의해 사실상 완화되었고, 1919년 공식 폐기되었습니다.
Section 05교황권의 재발견 — 영토 없는 권위의 역설
교황령을 잃은 것은 표면상 교황청의 완전한 패배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놀라운 역설을 보여주었습니다. 세속 영토와 권력을 잃자, 오히려 교황의 영적 권위는 전 세계적으로 강화되었습니다. 교황이 수십만 명의 백성과 드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이탈리아의 군주가 아니라, 세계 수억 명 가톨릭 신자들의 영적 아버지로서의 역할에 집중하게 된 것입니다.
이 시기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교황에게 보내는 결속과 연대감은 오히려 높아졌습니다. '바티칸의 포로' 이미지는 교황을 순교자처럼 보이게 했고,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동정심과 충성심을 자극했습니다. 프랑스, 독일, 아일랜드, 미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교황청을 위해 성 베드로 헌금을 모아 보냈습니다. 이 시기 교황권에 대한 가톨릭 신자들의 인격적 결속, 즉 '교황 중심주의(Ultramontanism)'가 강화된 것도 역설적으로 이 위기의 산물이었습니다.
1891년 레오 13세의 회칙 「레룸 노바룸」은 교황이 이탈리아 영주가 아닌 전 세계의 도덕적 권위로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노동자의 권리, 공정한 임금, 사회 정의를 교회의 이름으로 선언한 이 문서는 세속 영토 없이도 교황이 세계 역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교황령을 잃은 것이 교황의 세계적 영향력을 약화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방식으로 확장시킨 셈이었습니다.
1848
비오 9세의 자유주의 시도와 좌절
즉위 초 사면령·개혁으로 민족주의자 지지. 1848년 혁명으로 로마에서 쫓겨나 보수로 전환. 리소르지멘토와의 결정적 결별.
1860
교황령 북부·중부 영토 상실
에밀리아로마냐, 마르케, 움브리아가 차례로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 교황령의 3분의 2가 소멸.
오류 목록 — 근대 세계와의 절연 선언
비오 9세, 「실라부스 에로룸」 발표. 자유주의·민족주의·정교분리 등 80개 명제를 오류로 단죄.
7월
프랑스군 철수 — 교황령 최후의 방패 사라짐
보불전쟁으로 프랑스군 로마 철수. 교황령을 지키던 마지막 군사적 방벽 소멸.
9월 20일
포르타 피아 — 교황령 역사적 종말
이탈리아군 로마 입성. 비오 9세 바티칸 유폐 선언. 1,100년 교황 세속 통치 종식.
1929
로마 문제 — 60년의 교착
교황 연속 바티칸 유폐. 비엑스페디트. 교황과 이탈리아 국가의 공식 적대 관계 지속.
2월 11일
라테라노 조약 — 바티칸 시국 탄생
비오 11세·무솔리니 조약 체결. 바티칸 시국 주권 국가 공인. 로마 문제 공식 해결.
Section 06라테라노 조약 —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의 탄생
1929년 2월 11일, 드디어 역사적인 협정이 맺어졌습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의 수반 베니토 무솔리니와 교황 비오 11세 사이에 체결된 라테라노 조약(Patti Lateranensi)은 약 60년간 지속된 '로마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조약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먼저 이탈리아는 바티칸 시국(Città del Vaticano)을 독립 주권 국가로 공식 인정했습니다. 둘째, 이탈리아는 교황청에 과거 교황령 상실에 대한 배상금으로 7억 5천만 리라와 국채를 지급했습니다. 셋째, 이탈리아와 교황청 간의 정교협약(콩코르다)을 통해 가톨릭을 이탈리아의 공식 국교로 인정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바티칸 시국은 면적 0.44제곱킬로미터, 인구 800여 명에 불과한 세계에서 가장 작은 주권 국가입니다. 서울의 경복궁 면적과 비슷한 이 작은 땅이 전 세계 13억 가톨릭 신자들의 정신적 수도가 되었습니다. 교황은 더 이상 수십만 명의 백성을 다스리는 세속 군주가 아니라, 세계 무대에서 독립 국가를 대표하는 원수이자 보편 교회의 영적 지도자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했습니다.
그러나 라테라노 조약에 대한 평가는 복잡합니다. 비오 11세가 파시스트 무솔리니와 조약을 체결한 것은 교회의 독립성 회복이라는 실용적 이익을 위해 독재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뒤따랐습니다. 실제로 비오 11세는 이후 파시즘의 본질을 인식하고 무솔리니 및 나치즘과 갈등을 빚었으며, 1937년에는 나치즘을 비판하는 회칙 「지극한 걱정으로(Mit Brennender Sorge)」를 발표했습니다. 역사의 선택은 언제나 그 시대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빛과 그림자를 함께 읽어야 합니다.
🕊 바티칸 시국의 오늘
면적 0.44㎢, 상주 인구 약 800명의 바티칸 시국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 주권 국가입니다. 유엔 옵서버 국가이며, 전 세계 180여 개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영적 차원에서는 전 세계 약 13억 명의 가톨릭 신자들의 중심지로, 성 베드로 대성당과 바티칸 박물관은 연간 수백만 명의 순례자와 관광객이 찾는 세계적인 문화·신앙의 중심입니다. 교황청은 독자적인 방송(바티칸 라디오), 신문(로세르바토레 로마노), 우편·화폐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Section 07이탈리아 통일이 교회사에 남긴 것
교황령 상실과 바티칸 시국의 탄생은 가톨릭 교회사에서 하나의 결정적 전환점이었습니다. 수백 년간 세속 군주로서 영토와 군대를 보유하던 교황이, 오직 영적 권위만을 무기로 세계 무대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 변화는 단기적으로는 교황청에게 굴욕이었지만, 장기적으로는 교회의 본질에 더 가까워지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교황령이 없어진 이후 교황청의 국제적 영향력은 오히려 증대되었습니다. 특정 국가의 세속 이해에 얽매이지 않는 독립된 도덕적 권위로서, 교황의 발언은 전 세계 언론과 각국 정상들이 주목하는 무게를 갖게 되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공산주의 붕괴에 기여하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환경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오늘날의 교황청 외교는, 1870년 포르타 피아의 총성 이후 170년에 걸쳐 형성된 '영토 없는 권위'의 결실입니다.
역사는 아이러니로 가득합니다. 가리발디의 군대가 로마를 점령하던 날, 교황청의 적들은 교회를 끝장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땅을 잃은 교회는 오히려 세계를 얻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1870년은 가톨릭 교회가 지역의 군주에서 진정한 세계 교회로 탈바꿈한 역사적 기점이었습니다.
역사 연표 이탈리아 통일과 교황령 상실 — 시간순 주요 사건 도표
| 연도 | 사건 | 주요 내용 | 교회·세계사적 의의 |
|---|---|---|---|
| 756년 | 피핀의 기증 | 프랑크 왕국 피핀 3세, 이탈리아 중부 영토를 교황에게 기증 | 교황령의 기원. 교황의 세속 군주권 시작 |
| 1815년 | 빈 회의 이후 교황령 회복 | 나폴레옹 시대 해체된 교황령, 빈 체제 하에 회복 | 프랑스군 보호 아래 교황령의 마지막 안정기 시작 |
| 1831년 | 카르보나리 봉기·교황령 내 반란 | 자유주의 비밀 결사, 교황령 내 봉기. 오스트리아군 진압 | 리소르지멘토와 교황령의 첫 번째 직접 충돌 |
| 1846년 | 비오 9세 즉위 — 초기 자유주의 시도 | 사면령 발표, 언론·집회 자유 부분 허용 | 민족주의자들의 열렬한 지지. 그러나 2년 만에 좌절 |
| 1848~1849년 | 1848년 혁명 — 비오 9세 로마 탈출 | 로마 공화국 선포. 교황 가에타로 피신 | 비오 9세의 자유주의 포기 결정. 보수로의 완전한 전환 |
| 1849년 | 프랑스군 로마 복귀시킴 | 나폴레옹 3세, 프랑스군 파견해 로마 공화국 진압 | 교황 로마 귀환. 이후 19년간 프랑스군이 교황령 수호 |
| 1859년 | 오스트리아-사르데냐 전쟁 | 프랑스-사르데냐 연합군, 오스트리아 격파 | 이탈리아 통일 본격화. 북부 이탈리아 사르데냐 왕국에 편입 |
| 1860년 | 교황령 북부 영토 상실 | 에밀리아로마냐, 마르케, 움브리아 이탈리아 왕국 합병 | 교황령 면적 3분의 2 소멸. 로마와 라치오만 남음 |
| 1861년 | 이탈리아 왕국 성립 | 사르데냐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이탈리아 왕 선포 | 로마·베네치아 제외 이탈리아 통일. 로마 병합이 남은 과제 |
| 1864년 | 「오류 목록(Syllabus Errorum)」 발표 | 비오 9세, 자유주의·민족주의 등 80개 명제를 오류로 단죄 | 교황청과 근대 세계의 갈등 공식화 |
| 1870년 7월 | 제1차 바티칸 공의회 — 교황 무류성 선포 | 교황이 신앙·도덕 문제에서 오류 없음을 교의로 선포 | 교황권 강화 선언. 그러나 공의회 직후 교황령 상실 |
| 1870년 7월 | 보불전쟁 발발 — 프랑스군 로마 철수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프랑스군 이탈리아에서 철수 | 교황령 최후의 군사적 보호막 소멸 |
| 1870년 9월 20일 | 포르타 피아 — 로마 함락 | 이탈리아군 성벽 포격 후 로마 입성. 교황군 항복 | 1,100년 교황 세속 통치 종식. 비오 9세 바티칸 유폐 선언 |
| 1871년 | 로마, 이탈리아 왕국 수도 선포 | 이탈리아 수도 피렌체에서 로마로 이전 | 교황령의 법적 소멸 확인. 보장법 제정으로 교황 처우 규정 |
| 1871년 | 보장법(Legge delle Guarentigie) 제정 | 이탈리아, 교황에게 바티칸 소유권 및 외교 특권 부여 시도 | 비오 9세 거부. 로마 문제의 법적 교착 시작 |
| 1878년 | 비오 9세 선종 · 레오 13세 즉위 | 역대 최장 재위 교황 비오 9세 선종 | 레오 13세, 사회 교리 개발과 현실적 외교 노선으로 전환 |
| 1891년 | 회칙 「레룸 노바룸」 반포 | 레오 13세, 노동자 권리·사회 정의 가톨릭 교리로 확립 | 영토 없는 교황이 세계 사회 문제에 영향력 행사한 이정표 |
| 1904년 | 비엑스페디트 완화 | 비오 10세, 이탈리아 선거 불참 지침 사실상 완화 | 이탈리아 가톨릭 신자들의 정치 참여 길 열림 |
| 1919년 | 이탈리아 가톨릭 인민당 창설 | 루이지 스투르초 신부 주도로 가톨릭 기반 정당 창설 | 비엑스페디트 공식 폐기. 가톨릭 신자들의 정치 복귀 |
| 1929년 2월 11일 | 라테라노 조약 체결 | 비오 11세·무솔리니, 바티칸 시국 수립·배상금·콩코르다 합의 | 60년 로마 문제 공식 해결. 세계 최소 주권 국가 바티칸 탄생 |
참고 문헌 및 참고 사이트
- Frank J. Coppa, Pope Pius IX: Crusader in a Secular Age, Twayne Publishers, 1979.
- Denis Mack Smith, Italy: A Modern History,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69.
- David I. Kertzer, The Kidnapping of Edgardo Mortara, Knopf, 1997 (교황령 시대 사회상 참고).
- John F. Pollard, The Vatican and Italian Fascism 1929–32,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5.
- 교황청 공식 웹사이트 — www.vatican.va
- 바티칸 시국 공식 사이트 — www.vaticanstate.va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 www.cbck.or.kr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Risorgimento」 항목 — britannica.com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Lateran Treaty」 항목 — britannica.com
'6. 세계사와 함께 보는 가톨릭'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독일 문화투쟁과 교회 저항-철혈 재상 비스마르크가 가톨릭 교회와 충돌한 이유 (0) | 2026.04.07 |
|---|---|
| 아일랜드 가톨릭과 민족운동-신앙이 곧 저항이었던 땅의 이야기 (0) | 2026.04.06 |
| 미국 독립과 가톨릭 소수자신교의 나라에서 신앙을 지킨 사람들 (1) | 2026.04.05 |
| 빈 체제와 교회의 외교혁명 이후 유럽, 교황청이 펼친 외교의 무대 (1) | 2026.04.04 |
| 나폴레옹과 교황 비오 7세황제와 교황, 두 거인의 충돌과 신앙의 승리 (1) | 2026.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