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여행을 하면 오름과 바다를 먼저 떠올리게 되지만, 이 섬에는 신앙의 시련을 묵묵히 품어 온 장소들도 곳곳에 남아 있어요. 바다 건너 유배를 온 신자, 풍랑 끝에 닿은 최초의 사제, 그리고 아픈 충돌 끝에 화해를 모색하는 오늘의 교회까지, 제주의 가톨릭 이야기는 꽤 깊습니다. 오늘은 대정 성지, 용수 성지, 황사평 성지를 따라가며 제주 교회가 지나온 시간을 세계사 흐름과 함께 천천히 짚어볼게요.

1) 복음은 언제 제주에 닿았을까? 공식 시작은 1899년
제주교구 설명에 따르면, 제주에 교회 공동체가 형성되고 공식적으로 복음 선포와 전례가 시작된 것은 1899년 5월 26일입니다. 다만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복음의 소식이 조각조각 전해졌다는 기록도 있어요. 임진왜란 때 일본에 갔다가 돌아온 김복수가 교리서와 기도문을 가져왔다는 이야기, 1653년 제주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하멜이 가톨릭 신자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대표적입니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라, 사람도 소식도 파도를 타고 들어온 셈이죠.
2) 대정 성지: 정난주 마리아가 남긴 눈물의 이야기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 알렉산데르는 충북 제천의 배론으로 피신해 '황사영 백서'를 썼지만, 발송 직전에 발각되어 순교했습니다. 그의 아내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로, 두 살배기 아들은 추자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어요. 정난주는 추자도에 이르러 아들 황경한을 내려놓고 갈 수밖에 없었고, 제주목 관노로 지내다 1838년에 선종했습니다. 대정에 있는 그녀의 묘소는 지금 성역으로 선포되어 관리되고 있어요. 대정 성지를 걷다 보면, 이별을 견디며 신앙을 지킨 한 어머니의 시간이 조용히 전해집니다.
3) 용수 성지: 풍랑 끝에 닿은 김대건 신부의 표착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해안은 김대건 신부가 라파엘호를 타고 중국에서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닿은 곳으로 소개됩니다. 용수 성지의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 기념관은 2층과 옥상전망대로 이루어져 있고, 옆의 작은 성당은 김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은 김가항 성당의 모습을 재현했으며, 지붕은 파도와 라파엘호를 형상화했어요. 미사 시간을 제외하면 누구나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어서 부담 없이 들르기 좋습니다. 제주교구는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라파엘호 복원과 표착지 확인 사업을 추진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4) 제주 사람의 신앙: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와 양용항 베드로
제주 사람으로서 처음 영세 입교한 이는 어부 김기량(펠릭스 베드로)으로 전해집니다. 1856년 풍랑으로 중국까지 표류했다가 그곳에서 조선인 신학생을 만나 영세를 받았고, 돌아와 많은 도민에게 복음을 전했어요. 그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새 신자들에게 영세를 주려고 육지로 나가다 통영 앞바다에서 체포되었고,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며 순교했습니다. 제주교구는 이분의 시성을 위해 기도를 이어 가고 있다고 합니다. 또 본격적인 복음 전파는 중문면 색달리 출신 양용항(베드로)이 육지에서 세례를 받고 고향 이웃들에게 전하면서 이루어졌다고 해요.
5) 황사평 성지와 신축교안: 아픔을 기억하는 방식
1899년 뮈텔 주교는 제주본당 설립을 선포하고 페네 신부와 김원영 신부를 파견했습니다. 초기 교회는 빠르게 자라 1901년 초에는 영세자 240여 명, 예비신자 700여 명에 이르렀어요. 그러던 1901년, 봉세관의 조세 수탈과 천주교회의 폐단에 반발한 도민들이 일어나면서 신축교안(이재수의 난)이 벌어졌고, 신자 수백 명이 희생되었습니다. 교구 기록에는 희생자의 시신이 화북천 주변에 묻혀 있다가 1903년 아라동 부근으로 옮겨졌고, 이곳이 지금의 황사평 성지라고 적혀 있어요.
다만 신축교안은 어느 한쪽의 이야기만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신자들의 희생뿐 아니라 당시 도민의 고통과 분노도 함께 들여다봐야 하거든요. 그래서 제주교구는 120주년을 계기로 화해와 상생을 모색해 왔다고 보도되었습니다. 기억하는 방식이 달라도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태도, 오늘 제주 가톨릭 문화유산이 던지는 가장 큰 숙제가 아닐까 싶어요.
6) 세계사 속에서 보면: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와 지역 사회의 충돌
제주에 선교사가 들어온 1899년은 제국주의 열강이 세계 곳곳으로 영향력을 넓히던 때였습니다. 종교가 지역 사회의 조세와 권력 문제와 엮이면 갈등이 커지기 쉬웠고, 이는 동아시아 여러 곳에서 반복된 장면이에요. 제주교안 역시 종교 문제만이 아니라 봉세관의 수탈이라는 사회적 배경 위에서 일어났다고 설명됩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성당이 폐쇄되고 성직자와 수도자가 투옥되는 시련이 이어졌고, 4·3 사건과 한국전쟁의 혼란도 교회를 비껴가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교회는 피난민을 품고 구호 활동을 이어 갔다고 전해집니다.
7) 성지를 찾을 때 기억하면 좋은 마음가짐
성지는 관광지이기 전에 기도하는 자리이자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곳이에요. 미사 시간에는 방문을 피하고, 묘역과 성당에서는 목소리를 낮추며, 사진은 전례와 기도에 방해되지 않게 찍는 것이 좋습니다. 개방 시간과 미사 시간은 바뀔 수 있으니 방문 전에 교구나 성지 안내를 꼭 확인해 보세요. 천천히 걷고 잠시 머물다 보면, 바다 건너 이어진 신앙의 시간이 한결 가깝게 느껴질 거예요.
한눈에 보는 연표: 제주 가톨릭 역사의 흐름
| 연도 | 사건 |
|---|---|
| 1592~1598년 | 임진왜란 중 김복수가 교리서와 기도문을 가지고 제주로 돌아왔다고 전해짐 |
| 1653년 | 네덜란드인 하멜이 제주에 표착 |
| 1801년 | 신유박해, 황사영 순교 후 정난주 마리아가 제주로 유배됨 |
| 1838년 | 정난주 마리아 선종 |
| 1845년 | 김대건 신부가 라파엘호로 귀국하던 중 제주 용수리에 표착(자료 대조 권장) |
| 1856년 | 어부 김기량이 표류 끝에 중국에서 영세 입교 |
| 1866년 | 병인박해 중 김기량 순교 |
| 1899년 | 제주본당 설립, 페네 신부와 김원영 신부 파견(5월 26일 공식 시작) |
| 1901년 | 신축교안 발생, 이후 신자 수백 명 희생 |
| 1903년 | 희생자 시신을 아라동 부근 매장지로 이장(현 황사평 성지) |
| 1909년 |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신성여학교 설립 |
| 1948년 | 4·3 사건 발생 |
| 1971년 | 제주지목구 설정 |
| 1977년 | 지목구에서 정식 교구로 승격 |
| 1999년 |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 신앙대회(11월 21일) |
참고문헌 및 참고 사이트
- 천주교 제주교구, 「교구역사」 (diocesejeju.or.kr)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축교안」 (encykorea.aks.ac.kr)
- 굿뉴스(가톨릭정보), 「제주교안」 (maria.catholic.or.kr)
- 비짓제주, 「천주교 용수성지」 (visitjeju.net)
- 가톨릭평화신문, 「120년 전 신축교안, 오늘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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