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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특집 기획시리즈/가톨릭 문화유산 해설(미술,음악,건축)

한국에 벽돌 성당이 많은 이유: 약현성당과 명동성당에서 시작된 붉은 벽돌의 역사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6.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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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순례를 다니다 보면 이상하게 붉은 벽돌 성당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서양의 오래된 성당은 대개 커다란 돌로 쌓아 올리는데, 한국에서는 벽돌 성당이 하나의 전형처럼 자리 잡았어요. 오늘은 한국에 벽돌 성당이 많아진 이유를 첫 서양식 성당의 탄생과 시대 상황, 그리고 세계사의 흐름까지 곁들여서 편하게 풀어 보겠습니다.

한국에 벽돌 성당이 많은 이유: 약현성당과 명동성당에서 시작된 붉은 벽돌의 역사

1) 모든 것은 약현성당과 명동성당에서 시작됐어요

한국 성당 건축의 출발점은 1892년에 지어진 서울 중림동의 약현성당이에요.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의 코스트 신부가 설계하고 감독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벽돌 성당으로 알려져 있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이 성당을 벽돌조 고딕 성당으로서 한국 교회 건축의 모범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어서 1898년에는 같은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서울 명동성당이 준공되었어요.

 

이 두 성당이 도성 한복판에서 큰 주목을 받으면서, 이후 지방 성당들도 자연스럽게 이 모델을 따랐다고 전해집니다. 쉽게 말해 한국의 벽돌 성당 전통은 처음 지은 두 성당이 너무 강한 본보기가 된 결과라고 볼 수 있어요.

 

2) 왜 하필 돌이 아니라 벽돌이었을까요?

서양 고딕 성당은 돌로 짓는 경우가 많지만, 명동성당은 석재 대신 벽돌을 쓴 점이 특징이에요. 그 이유를 한 가지로 단정하기는 어렵고, 자료에서는 당시 공사 환경이 크게 작용했다고 설명합니다. 조선에는 서양식 건물에 맞는 석조 기술자가 충분하지 않았고, 대신 중국 북부에서 벽돌 쌓는 기술을 가진 기술자들을 데려와 공사를 진행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우리역사넷은 이 시기 성당의 벽돌쌓기를 중국인 기술자들이 거의 전담하다시피 한 것이 하나의 특색이라고 소개합니다. 또 명동성당 공사에는 중국인 목공과 석공, 벽돌공과 노동자들이 투입되었고 조선인 석공 몇 명도 함께 참여했다는 기록이 전해져요. 석재로 정교하게 깎아 올리는 방식보다, 벽돌을 규칙적으로 쌓아 올리는 방식이 당시 조건에서 더 현실적이었던 셈입니다.

 

3) 벽돌을 아예 현지에서 만들었어요

재미있는 사실은 벽돌을 수입한 게 아니라 직접 구웠다는 점이에요. 우리나라에서 서양식 건축에 쓰는 붉은 벽돌을 자체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 약현성당과 명동성당 건축을 위해서였고, 1890년대 초 서울 와서현 일대에 벽돌 가마를 세웠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명동성당의 경우 외관을 붉은 벽돌로 쌓으면서 20여 종의 서로 다른 모양 벽돌을 만들어 세부 설계에 맞추었다고 해요.

 

다만 초기 벽돌 생산이 늘 완벽했던 것은 아닙니다. 붉은 벽돌은 구울 때 높은 온도가 필요한데, 당시에는 소성 기술이 충분하지 않아 회색 계열 벽돌이 더 많이 생산되었다는 연구도 있어요. 그래서 성당 벽면에 붉은색과 회색 벽돌이 함께 쓰인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예요.

 

4) 시대적 배경: 박해가 끝나고 처음 짓게 된 '보이는 신앙'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조선에서는 병인박해 같은 거센 탄압이 이어졌고, 신자들은 눈에 띄는 건물을 지을 엄두를 내기 어려웠습니다. 1886년 조약으로 선교의 길이 조금씩 열린 뒤에야 비로소 도시 한가운데에 성당을 세울 수 있게 되었어요. 그래서 붉은 벽돌 성당은 박해를 이겨낸 교회가 처음으로 세상에 내건 신앙의 표지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세계사로 보면 19세기 후반은 서양 열강이 아시아로 진출하고 근대 건축 기술이 퍼지던 시기였어요. 유럽에서는 중세 고딕을 되살리는 건축이 유행했고, 그 흐름이 선교사들을 통해 동아시아의 벽돌 기술과 만난 것이 한국 벽돌 성당의 모습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명동성당 공사에 많은 신자가 무료로 노동 봉사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이는 벽돌 한 장 한 장에 공동체의 정성이 깃들어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

 

5) 정리하면, 벽돌 성당이 많은 이유

첫째, 첫 서양식 성당인 약현성당과 명동성당이 벽돌로 지어져 이후 성당 건축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둘째, 중국에서 온 벽돌 기술자들과 현지 벽돌 생산이 가능했던 당시 공사 조건이 벽돌에 잘 맞았습니다. 셋째, 박해가 끝나고 새로 시작한 교회가 근대 서양 건축 양식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벽돌이 가장 현실적인 재료였다고 설명할 수 있어요. 다음에 붉은 벽돌 성당을 만나면 한 장 한 장에 담긴 이런 사연을 한 번쯤 떠올려 보세요.

 

시간 순서 도표: 한국 벽돌 성당 관련 주요 사건

연도 사건(시간 순서)
1866년 병인박해로 많은 선교사와 신자가 순교하며 공개적인 성당 건축이 어려운 시기가 이어짐
1886년 조선과 프랑스 사이의 조약으로 선교의 길이 열리기 시작함
1887년 명동성당을 지을 충분한 부지가 마련됨
1890년대 초 서울 와서현 일대에 벽돌 가마가 세워지고 서양식 건축용 붉은 벽돌을 자체 생산하기 시작함
1892년 약현성당이 지어짐(코스트 신부 설계·감독, 한국 최초의 서양식 벽돌 성당)
1892년 명동성당 건축 공사가 시작되고 중국인 기술자들이 투입됨
1898년 명동성당이 준공됨(붉은 벽돌 고딕 성당)
1902년 대구 계산성당이 영남 최초의 고딕 벽돌 성당으로 다시 지어짐
1977년 명동성당이 사적 제258호로 지정됨




참고문헌·참고 사이트

아래 자료로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문장은 직접 재구성해 작성했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자료에서 확인해 보세요.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울 약현성당, 서울 명동성당 항목
  •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천주교 및 개신교당 항목
  • 가톨릭 굿뉴스 자료실: 코스트 신부의 여정과 한국 성당 건축
  • 오마이뉴스: 명동성당 건립 과정을 다룬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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