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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히에로니무스와 불가타 성경: 하느님 말씀을 라틴어로 옮긴 위대한 성업 4세기 후반, 한 학자가 베들레헴의 동굴 수도원에서 평생을 바쳐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히에로니무스, 서방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경학자이자 교회학자입니다. 그가 번역한 불가타 성경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가톨릭 교회의 공식 성경으로 사용되었으며, 서방 그리스도교 문명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모든 성경 번역의 뿌리에는 히에로니무스의 헌신과 학문적 엄밀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히에로니무스의 생애와 회심히에로니무스는 347년경 달마티아 지방의 스트리돈에서 부유한 그리스도교 가정에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에우세비우스 소프로니우스 히에로니무스였으며,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지적 능력을 보였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고전 문학과 수사학을 공부했으며, 키케로와 베르길리우스를 비.. 2025. 12. 17.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와 신경 확립: 삼위일체 신앙의 완성 381년, 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제2차 보편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이 공의회는 56년 전 니케아 공의회에서 확립된 신앙을 재확인하고, 특히 성령의 신성을 명확히 선포함으로써 삼위일체 교리를 완성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매 미사마다 고백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바로 이 공의회에서 최종적으로 확립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신학적 정의를 넘어, 교회가 성령의 인도 아래 진리를 식별하고 보존해온 산 증거입니다.니케아 공의회 이후의 신학적 도전325년 니케아 공의회는 아리우스 이단을 단죄하고 성자의 신성을 명확히 선포했지만, 이것으로 모든 논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4세기 중반 이후 새로운 신학적 쟁점이 부상했는데, 바로 성령의 신성과 본질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콘.. 2025. 12. 17.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 논쟁: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킨 위대한 투쟁 4세기 초, 로마 제국 전역을 뒤흔든 신학 논쟁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연 성부 하느님과 동등한 신성을 지니셨는가, 아니면 피조물에 불과한가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었습니다. 이 논쟁의 중심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와 그에 맞서 정통 신앙을 수호한 아타나시우스 주교가 있었습니다. 이들의 대립은 단순한 신학적 토론을 넘어 교회의 정체성과 신앙의 본질을 결정하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습니다.아리우스 이단의 등장과 그 위험성알렉산드리아의 사제였던 아리우스는 서기 318년경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며, 따라서 하느님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리우스는 "성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라는 유명.. 2025. 12. 16.
니케아 공의회와 삼위일체 교리 –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확립 아리우스 논쟁의 시작과 교회의 분열4세기 초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 심각한 신학적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제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해 문제적인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는 성자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느님과 동등하지 않으며 시간 안에서 창조된 피조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아리우스의 핵심 주장은 한때 성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가장 높은 피조물로 여기지만 참 하느님으로는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드로는 이러한 가르침이 사도 전승에 어긋난다며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주교의 부제였던 젊은 아타나시우스도 논쟁에 적극 참여하며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옹호했습니다. 그러나 아리우스는 뛰어난 웅변가이자 작곡가였으며 자신의 주장을 대중적인 찬송.. 2025. 12. 15.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밀라노 칙령 – 그리스도교 공인의 결정적 전환점 혼란의 시대와 콘스탄티누스의 등장3세기 후반 로마 제국은 깊은 위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사두정치 체제를 도입했습니다. 제국을 동서로 나누고 각각 정제와 부제를 두어 네 명의 통치자가 공동으로 다스리는 체제였습니다. 그러나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퇴위한 후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 군사 지도자들이 황제의 자리를 놓고 경쟁했고 제국은 다시 내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콘스탄티누스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그는 서방 부제였던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아들로 306년 아버지가 브리타니아에서 사망하자 군대의 지지를 받아 황제로 추대되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는 여섯 명의 황제 혹은 황제 후보자가 있었고 각자 정통성을 주장하며 .. 2025. 12. 14.
로마 제국의 기독교 인식 변화 – 박해에서 국교까지의 여정 초기 로마의 시선 – 유대교의 한 분파로 인식1세기 중반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로마는 전통적으로 정복한 지역의 종교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유대교 역시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 회당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로마 당국은 이들을 유대인의 일부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명확히 구분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함락 이후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과 거리를 두면서 양자의 차이가 분명해졌습니다. 로마 당국의 눈에 그리스도인들은 이상한 집단으로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신전에 가지 않았고, 황제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았으며, 비밀스러운 모임을 가졌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는 종교와 정치가 밀.. 2025.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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