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성인 열전
몸에 144개의 흉터를 지닌 채 살았던 한 여인이 있습니다. 이름조차 빼앗긴 채 다섯 번이나 팔려 다녔던 그녀는, 훗날 스스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나를 붙잡았던 사람들을 만난다면, 나는 그들의 손에 입을 맞추겠습니다. 그 일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그리스도인도, 수녀도 아니었을 테니까요." 오늘은 아프리카 수단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의 성녀가 된, 요세피나 바키타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다르푸르의 딸, 어느 날 사라진 이름
1869년, 지금의 수단 서부 다르푸르 지역 올고사라는 마을에서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다주족 족장의 동생을 아버지로 둔 유복한 집안이었고, 여섯 남매 사이에서 어린 시절만큼은 걱정 없이 자랐다고 훗날 스스로 회고했습니다. 당시 다르푸르는 오스만 제국의 영향 아래 있던 이집트-수단 지역으로, 사하라 이남과 지중해를 잇는 노예 무역이 여전히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던 땅이었습니다. 평화로운 유년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일곱에서 아홉 살 무렵, 그녀는 두 살 위 언니와 함께 아랍 노예상인들에게 붙잡혀 끌려가고 맙니다.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소녀는 자신의 본래 이름조차 기억해내지 못했습니다. 노예상들은 그런 그녀에게 아랍어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바로 '바키타'였습니다. 이름의 뜻과는 정반대로, 그날 이후 그녀 앞에 놓인 것은 참혹한 예속의 시간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그녀는 엘오베이드와 하르툼의 노예시장을 오가며 무려 다섯 명의 주인을 거치게 됩니다.
다섯 명의 주인, 백사십사 개의 흉터
바키타가 거쳐 간 주인들 가운데는 그나마 인간적인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히 네 번째 주인이었던 터키 군인은 자신이 부리던 노예들을 극도로 가혹하게 다루었습니다. 바키타는 "하루도 상처 없이 지나가는 날이 없었다"고, "채찍 자국이 아물 만하면 또다시 채찍을 맞았다"고 그 시절을 증언했습니다. 그녀를 가장 두렵게 한 것은 몸에 문신처럼 새겨진 표식이었습니다. 칼로 살을 가르고 그 상처에 소금을 문질러 흉터를 남기는 방식이었는데, 이렇게 그녀의 몸에 남은 흉터만 백사십사 개에 달했다고 전해집니다.
낯선 자비, 이탈리아 영사의 손길
1883년, 바키타의 운명이 바뀌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당시 수단은 무함마드 아흐마드가 이끄는 마흐디 봉기로 정세가 크게 요동치고 있었는데, 이 혼란한 시기에 그녀는 이탈리아 영사 칼리스토 레냐니에게 팔려가게 된 것입니다. 레냐니는 이전 주인들과 달랐습니다. 처음으로 매질도, 욕설도 없는 나날이었습니다. 1885년, 마흐디군이 하르툼을 함락시키며 정세가 더욱 급박해지자 레냐니는 이탈리아로 귀국을 결정했고, 바키타는 스스로 그를 따라가겠다고 청했습니다. 태어나 처음 받아본 인간다운 대접에, 그녀는 그 손길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탈리아로 건너간 그녀는 레냐니의 친구였던 아우구스토 미치엘리 가족에게 보내져, 그 집 딸의 유모로 지내게 됩니다. 낯선 땅이었지만 폭력이 사라진 삶은 그녀에게 새로운 감각을 열어 주었습니다.
베네치아의 수녀원에서 만난 진짜 주인
미치엘리 가족이 근무지를 옮기게 되면서, 바키타는 딸과 함께 베네치아의 카노사 수녀회 산하 성녀 막달레나 수녀원에 잠시 맡겨집니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서, 그녀는 태양과 달과 별을 만든 진짜 주인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배우게 됩니다. 그녀는 훗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의 주인은 누구일까, 그분을 알고 싶고 뵙고 싶은 갈망을 느꼈다"고 말입니다. 노예로서 늘 누군가의 소유물이어야 했던 그녀에게, 하느님이라는 존재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처음으로 만난 다정한 주인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자유입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그토록 사랑하시는데, 제가 어찌 그분께 화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요세피나 바키타
법정에 선 노예, 1889년 베네치아
수녀원에서 지내는 동안 미치엘리 부인이 돌아와 바키타를 다시 데려가려 하면서,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바키타가 처음으로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히며 함께 가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 문제는 결국 베네치아 법정까지 올라갔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왕국의 법률상 노예제는 인정되지 않았고, 더구나 그녀가 태어난 수단 지역 역시 이집트 정부에 의해 명목상 노예제가 폐지된 상태였습니다. 법원은 바키타가 한 번도 합법적으로 노예였던 적이 없다고 판단했고, 마침내 그녀는 이탈리아 땅에서 자유인임을 선언받게 됩니다. 태어난 지 스무 해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요세피나, 새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다
자유를 얻은 바키타는 스스로 수녀원에 남기로 결심합니다. 1890년 1월 9일, 그녀는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으며 '요세피나 마가렛'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습니다. 이날 그녀에게 성사를 준 사람은 베네치아의 주세페 사르토 추기경이었는데, 그는 훗날 비오 10세 교황이 되는 인물입니다. 노예상들이 붙여준 이름 '바키타'는 그대로 남겨 두었습니다. 그 이름 속에 담긴 고통의 세월조차 하느님이 이끄신 여정의 일부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1893년 12월 7일, 그녀는 카노사 수녀회에 입회했고, 1896년 12월 8일 사르토 추기경의 주례로 종신서원을 하며 정식으로 수도자의 삶을 시작합니다. 학식은 없었지만, 그녀에게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겸손과 온화함이 있었습니다.
시호에서의 오십 년
1902년, 바키타는 이탈리아 북부 비첸차주의 작은 마을 시호에 있는 수녀원으로 발령을 받습니다.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을 이곳에서 지내게 됩니다. 주방일과 바느질, 성구 관리, 그리고 수녀원 문지기까지, 화려하지 않은 소임들을 맡으면서도 그녀는 마을 사람들에게 깊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유의 따뜻한 목소리와 한결같은 미소로 아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품었던 그녀를, 마을 사람들은 '검은 어머니'라 부르며 따랐습니다.
바키타가 시호에 머무는 동안 이탈리아는 격동의 시대를 지났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시호 인근은 피아베 전선과 가까워 부상병들이 밀려들었고, 그녀는 이들을 돌보는 일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1930년대에는 이탈리아가 자신의 고향 대륙인 아프리카를 침공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고, 이어진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까지 고스란히 겪어야 했습니다. 노예로 태어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넘어선 그녀의 생애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사였습니다.
아프리카의 꽃, 세상에 남긴 유산
1947년 2월 8일, 바키타는 자신을 둘러싼 수녀들 앞에서 "나의 성모님, 나의 성모님"이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선종했습니다. 소식이 전해지자 마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마지막 길을 배웅했습니다. 199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대희년이던 2000년 10월 1일 마침내 시성되어 성인의 반열에 이름을 올립니다. 훗날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의 첫머리에서 그녀를 희망의 증인으로 소개하며, 그녀가 마침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주인, 곧 하느님을 만났다고 적었습니다.
오늘날 성녀 바키타는 '아프리카의 꽃'이라 불리며 수단의 수호성녀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그녀의 축일인 2월 8일은 세계 인신매매 반대 기도의 날로도 지정되어, 지금 이 순간에도 억압 속에 놓인 이들을 위해 전 세계 교회가 함께 기도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노예로 시작된 한 생애가, 인간 존엄을 이야기하는 세계사적 상징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생애의 사건과 당대 세계사 · 교회사를 함께 정리했습니다
| 연도 | 구분 | 사건 |
|---|---|---|
| 1869 | 생애 | 수단 다르푸르 올고사에서 출생. 같은 해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며 아프리카·중동 정세가 요동치던 시기였다. |
| 1876년경 | 시대 | 오스만 제국령 이집트-수단 지역에서 노예무역이 여전히 성행하던 시기, 아랍 노예상에게 납치됨(7~9세 추정). |
| 1876~1883 | 생애 | 엘오베이드와 하르툼의 노예시장을 오가며 다섯 명의 주인에게 팔려 감. 몸에 144개의 흉터가 남음. |
| 1881 | 시대 | 무함마드 아흐마드가 이끄는 마흐디 봉기가 시작되어 수단 전역이 극심한 혼란에 빠짐. |
| 1883 | 생애 | 이탈리아 영사 칼리스토 레냐니에게 팔려가며 처음으로 폭력 없는 대우를 경험함. |
| 1885 | 시대 | 마흐디군이 하르툼을 함락하고 고든 장군이 전사함. 같은 해 바키타는 미치엘리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로 이주. |
| 1889 | 생애 | 베네치아 법정에서 이탈리아 땅에서는 노예제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판결로 자유인임을 인정받음. |
| 1890.1.9 | 교회사 |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고 '요세피나'라는 이름을 얻음. 대부는 훗날 비오 10세가 되는 주세페 사르토 추기경. |
| 1893.12.7 | 생애 | 카노사 수녀회에 입회. |
| 1896.12.8 | 생애 | 사르토 추기경의 주례로 종신서원을 함. |
| 1902 | 생애 | 비첸차주 시호의 수녀원으로 부임,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봉사함. |
| 1914~1918 | 시대 |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시호 인근이 피아베 전선과 가까워 부상병을 돌보는 데 힘을 보탬. |
| 1929 | 시대 | 라테라노 조약 체결로 이탈리아와 교황청의 관계가 정상화됨. |
| 1935~1936 | 시대 |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자신의 고향 대륙이 겪는 고통을 지켜봐야 했던 시기. |
| 1939~1945 | 시대 | 제2차 세계대전. 고령의 바키타가 마지막으로 겪은 전쟁의 참화. |
| 1947.2.8 | 생애 | "나의 성모님"이라는 말을 남기고 시호의 수녀원에서 선종. |
| 1956 | 시대 | 고향 수단이 독립을 맞이함(선종 이후). |
| 1992.5.17 | 교회사 |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오름. |
| 2000.10.1 | 교회사 | 대희년을 맞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됨. |
| 2007 | 교회사 |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에서 그녀를 희망의 증인으로 소개함. |
참고문헌 및 참고 사이트
- 가톨릭평화신문, "[우리 시대의 성인들] 성 요세피나 바키타 수녀", catholictimes.org
- 가톨릭굿뉴스, "[성인] 아프리카의 꽃 성녀 요세피나 바키타", home.catholic.or.kr
- 마리아사랑넷, "성녀 요세피나 바키타", mariasarang.net
- 바오로딸콘텐츠, "성녀 바키타", contents.pauline.or.kr
- 천주교 춘천교구, "세계 인신매매 반대 기도의 날 관련 소식", cccatholic.or.kr
- 교황청,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Spe Salvi)」, 2007, vatican.va
- Vatican News, "Saint Josephine Bakhita", vaticannews.va
- Encyclopaedia Britannica, "Josephine Bakhita", britannica.com
- 가톨릭사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maria.cathol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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