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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인과 교부

성 레오 2세 교황: 공의회의 결실을 완성한 신앙의 수호자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5.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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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의 후계자,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다

681년 1월 10일, 로마 전역에 창궐한 전염병으로 교황 아가톤이 선종했습니다. 그는 제6차 세계 공의회를 소집하고 단의론 이단을 격파하는 역사적 업적을 이루었지만, 정작 자신이 이룩한 공의회의 승리를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여전히 회기가 진행되고 있었고, 최종 결정문은 아직 로마로 전달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교황 아가톤이 선종한 직후, 로마의 성직자들과 신자들은 그의 후계자를 선출했습니다. 선출된 인물은 시칠리아 출신의 사제 레오였습니다. 그는 아가톤 교황과 마찬가지로 시칠리아 태생으로, 파울루스라는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시칠리아는 이슬람 세력의 침공으로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고, 많은 그리스계 성직자들이 로마로 피신하여 교회 행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레오 역시 이러한 시칠리아 출신 성직자 중 한 명으로, 뛰어난 음악적 재능과 신학적 식견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레오의 교황 선출은 즉각적인 착좌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당시 교황 선출에는 비잔틴 황제의 승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7세기 로마는 여전히 비잔틴 제국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고, 새로 선출된 교황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부터 황제의 인준을 받아야만 공식적으로 착좌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승인 절차는 때로 수개월에서 수년까지 걸리기도 했습니다. 레오의 경우, 선출된 지 무려 1년 5개월이 지난 682년 8월 17일에야 비로소 교황좌에 착좌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긴 대기 기간은 당시 동서방 교회의 복잡한 정치적 관계와 제6차 공의회의 여파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황을 반영합니다.

성 레오 2세 교황: 공의회의 결실을 완성한 신앙의 수호자

제6차 공의회의 결정, 로마의 승인을 기다리다

레오가 교황좌에 착좌하기 직전인 681년 9월 16일, 제6차 세계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장엄한 폐막식을 거행했습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가 직접 참석한 가운데, 151명의 주교들이 서명한 최종 교령이 선포되었습니다. 공의회는 그리스도께서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 신적 활동과 인간적 활동이라는 두 의지와 두 활동을 지니신다는 정통 교리를 확정하고, 단의론을 명백한 이단으로 단죄했습니다. 또한 공의회는 단의론을 주장하거나 지지했던 이들을 파문했는데, 여기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키루스, 그리고 놀랍게도 교황 호노리우스 1세도 포함되었습니다. 호노리우스 교황이 단죄된 것은 가톨릭 교회사에서 매우 민감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625년부터 638년까지 재위한 교황으로, 단의론을 직접 창안하거나 적극적으로 옹호하지는 않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우스가 단의론에 관한 서신을 보냈을 때 명확히 반박하지 않고 모호한 답변을 보냈다는 이유로 비난받았습니다. 제6차 공의회의 공식 문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과 함께 로마의 선임 교황이었던 호노리우스도 하느님의 거룩한 교회에서 내쫓기로 결정하며, 그들과 함께 파문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르기우스에게 보낸 그의 서신에서 그가 모든 면에서 세르기우스의 의견을 따랐고 그의 사악한 교리를 확인해 주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결정문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 아가톤 교황은 이미 선종했고 레오가 교황으로 선출된 상태였지만 아직 착좌하지 못한 때였습니다. 공의회의 결정문은 황제의 서신과 함께 로마로 전달되었고, 새로 착좌한 레오 2세 교황은 이 결정문을 승인할 것인지 아니면 거부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중대한 책임을 떠맡게 되었습니다.

호노리우스 문제와 신학적 해명의 과제

레오 2세 교황이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바로 전임 교황 호노리우스 1세에 대한 공의회의 단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였습니다. 이 문제는 단순한 역사적 평가를 넘어 교황권의 권위와 무류성에 관한 근본적인 신학적 질문을 제기했습니다. 만약 교황이 신앙 문제에서 오류를 범할 수 있다면, 교황의 가르침에 대한 신뢰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 로마 교회의 수위권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레오 2세는 이 민감한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했습니다. 그는 공의회의 결정을 전적으로 승인하면서도, 호노리우스가 단죄받은 정확한 이유를 명확히 밝혔습니다. 레오 2세는 여러 서신에서 호노리우스의 잘못이 이단적 교리를 직접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이단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고 교회의 신앙을 지키는 책임을 소홀히 한 데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레오 2세가 비잔틴 황제에게 보낸 그리스어 서신에서는 호노리우스가 "티 없는 신앙이 전복되도록 허용했다"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호노리우스가 적극적으로 신앙을 파괴하려 한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이단의 확산을 방치했다는 의미였습니다. 후대 학자들은 레오 2세의 라틴어 서신과 그리스어 서신 사이에 미묘한 표현의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라틴어 서신에서는 "전복시키려고 시도했다"는 다소 강한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그리스어 원본에서는 "전복되도록 허용했다"는 더 온건한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해명을 통해 레오 2세는 두 가지 중요한 원칙을 확립했습니다. 첫째, 교황도 개인적으로는 신앙 문제에서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나 교황이 사도좌의 권위로 전 교회에 공식적으로 가르칠 때는 성령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호노리우스의 잘못은 사적인 서신에서 명확성을 결여한 것이지, 사도좌의 공식 가르침으로 이단을 선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구분은 후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무류성 교리를 선포할 때 중요한 신학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동서방 교회의 화해와 교회 통치

레오 2세는 제6차 공의회의 결정을 승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서방 교회 전체에 전파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는 공의회의 교령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서방의 주교들에게 회람시켰고, 각 교구에서 이를 선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특히 레오 2세는 공의회의 결정을 비잔틴 황제에게 먼저 통보한 후 서방 국가들에게 알렸습니다. 이는 당시 동서방 교회의 미묘한 정치적 균형을 반영하는 외교적 배려였습니다. 레오 2세는 황제에게 보낸 서신에서 공의회가 베드로의 신앙을 수호했다고 찬양하면서도, 동시에 황제의 신앙적 열의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684년에는 스페인의 톨레도에서 시노드가 소집되어 제6차 공의회의 결정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이는 레오 2세의 노력이 서방 교회 전체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톨레도 시노드는 그리스도의 두 의지와 두 활동에 관한 정통 교리를 재확인하고, 단의론을 명백히 거부했습니다. 교회 통치 면에서 레오 2세는 라벤나 대주교구와의 관계 개선에도 중요한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라벤나는 비잔틴 제국의 이탈리아 총독부가 위치한 도시로, 오랫동안 로마로부터 독립하려는 시도를 계속해 왔습니다. 전임 교황 아가톤이 라벤나의 독립 시도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양 교구 사이의 긴장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레오 2세는 새로 서품된 라벤나 대주교들이 교황으로부터 팔리움을 받을 때마다 내던 세금을 폐지함으로써 라벤나와의 관계를 크게 개선했습니다. 팔리움은 대주교들이 착용하는 양모로 만든 띠로, 교황과의 일치와 교황으로부터 받은 권한을 상징합니다. 팔리움 수여 시 부과되던 세금은 라벤나 대주교들에게 재정적 부담이자 로마에 대한 종속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레오 2세는 이 세금을 폐지함으로써 라벤나 대주교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동시에 교황권의 권위는 재정적 강제가 아니라 영적 권위에 기반해야 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교황권의 본질에 대한 레오 2세의 깊은 이해를 반영합니다.

짧은 재위, 깊은 영향력

레오 2세 교황은 683년 7월 3일, 재위 약 10개월 만에 선종했습니다. 그의 교황 재위 기간은 선출부터 선종까지 합쳐도 2년 6개월에 불과했고, 실제 착좌 후 재위 기간은 1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짧은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레오 2세가 교회사에 남긴 영향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제6차 세계 공의회의 결정을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이를 전 교회에 전파함으로써, 70년 넘게 지속된 단의론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입니다. 아가톤 교황이 공의회를 소집하고 신학적 기반을 마련했다면, 레오 2세는 그 결실을 완성하고 교회법적 효력을 부여한 인물입니다. 레오 2세의 또 다른 중요한 공헌은 호노리우스 문제를 신학적으로 해명함으로써, 교황 무류성과 관련된 혼란을 방지한 것입니다. 그는 교황도 개인적으로는 실수할 수 있지만, 사도좌의 공식 가르침은 성령의 보호를 받는다는 미묘하지만 중요한 구분을 명확히 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정교함은 후대 가톨릭 교회론의 발전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레오 2세는 또한 뛰어난 음악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전례 음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교회 성가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전해집니다. 비록 구체적인 작곡이나 음악적 개혁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동시대 사료들은 레오 2세의 음악적 재능과 전례에 대한 열정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레오 2세가 선종한 후, 그의 시신은 처음에는 독자적인 무덤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 후, 레오라는 이름을 가진 초기 교황 네 명의 유해가 하나의 무덤에 합장되면서, 레오 2세의 유해도 함께 이장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교황들의 유해를 보존하고 공경하는 관행의 일부였습니다. 레오 2세는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 모두에서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서방 교회에서 그의 축일은 7월 3일, 그가 선종한 날입니다. 동방 정교회에서도 그를 성인으로 기념하며, 공의회의 결정을 승인하고 정통 신앙을 수호한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합니다. 성 레오 2세 교황의 생애는 교회의 지도자가 때로 짧은 시간 안에도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전임자가 시작한 위대한 사업을 완성하고, 교회 일치를 위해 동서방을 조정하며, 신학적 명확성을 제공함으로써 교회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가톨릭 교회의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의 기초로 남아 있습니다.

레오 2세 교황 시대의 역사적 사건 연표

연도 사건
625-638년 교황 호노리우스 1세 재위
638년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엑테시스 발표, 단의론 공식화
649년 교황 마르티노 1세의 라테라노 공의회, 단의론 단죄
653년 교황 마르티노 1세와 고해자 성 막시무스 체포 및 유배
668년 콘스탄티누스 4세 비잔틴 황제 즉위
678년 6월 27일 성 아가톤 제79대 교황 선출
680년 11월 7일 제6차 세계 공의회(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개막
681년 1월 10일 교황 아가톤 선종, 레오 선출 (착좌 대기)
681년 9월 16일 제6차 공의회 폐막, 단의론 단죄 및 이원 의지론 선포, 호노리우스 1세 단죄
682년 8월 17일 레오 2세 제80대 교황 착좌
682-683년 레오 2세, 제6차 공의회 결정 승인 및 서방 교회에 전파
682-683년 라벤나 대주교구 팔리움 세금 폐지, 관계 개선
683년 7월 3일 성 레오 2세 교황 선종
684년 톨레도 시노드, 제6차 공의회 결정 공식 인정

참고 문헌 및 참고 사이트

  • 바티칸 공식 웹사이트 (www.vatican.va) - 교황 레오 2세 전기
  • Catholic Encyclopedia - 성 레오 2세 교황 항목 (www.newadvent.org/cathen)
  • New World Encyclopedia - Third Council of Constantinople
  • Britannica Encyclopedia -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 Chapman, J., "The Condemnation of Pope Honorius", Catholic Encyclopedia
  • Hefele, C. J., "History of the Councils of the Church", Volume V
  • 주교황청 대한민국 대사관 - 교황 연대표
  • 세계 가톨릭 백과사전 - 레오 2세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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