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에서 로마로, 수도자에서 교황으로
7세기 후반의 지중해 세계는 격변의 시대였습니다. 이슬람 세력의 급속한 확장으로 시칠리아는 끊임없는 침략의 위협에 시달렸고, 비잔틴 제국과 로마 교회 사이의 신학적 논쟁은 그리스도교 세계를 분열시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혼란의 시대에 팔레르모에서 태어난 한 그리스계 수도자가 교회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이끌게 됩니다. 성 아가톤 교황은 577년경 시칠리아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팔레르모의 성 헤르메스 베네딕토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시칠리아는 652년부터 시작된 이슬람의 침공으로 많은 성직자들이 로마로 피신해야 했고, 아가톤도 이러한 피난민 성직자 중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모두 능통했던 그는 교회 행정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으며, 바티칸의 재무 관리를 담당하는 중요한 직책을 맡기도 했습니다. 678년 6월 27일, 교황 도누스가 선종한 후 아가톤은 제79대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일부 기록에 따르면 백세가 넘는 고령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요크의 성 윌프리드 사건과 교황권의 확립
아가톤이 교황으로 즉위한 직후, 영국에서 중대한 교회법적 분쟁이 발생했습니다. 요크의 주교였던 성 윌프리드가 캔터베리의 대주교 테오도르에 의해 부당하게 해임당하고 그의 교구가 여러 개로 분할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윌프리드는 이에 불복하여 로마로 직접 찾아가 교황청의 재판을 요청했습니다. 이는 영국의 주교들이 로마에 공식적으로 상소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되었습니다. 아가톤 교황은 라테라노 궁에서 시노드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신중하게 심의했습니다. 공의회는 테오도르 대주교가 교구를 분할한 것 자체는 목회적 필요성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고 판단했지만, 윌프리드를 부당하게 해임한 것은 교회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따라서 윌프리드는 자신의 주교직으로 복귀해야 하며, 새로 설치된 교구들의 주교는 윌프리드 자신이 임명하도록 결정했습니다. 이 판결은 지역 교회의 분쟁에서 로마 교황청이 최고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원칙을 확립하는 중요한 선례가 되었습니다. 또한 아가톤은 라벤나의 총독 테오도르가 로마로부터 독립하려는 시도를 저지하고, 그를 다시 교황권 아래로 복종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7세기 후반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도 교황권의 권위가 점차 확립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단의론 논쟁과 그리스도론의 위기
아가톤 교황 재위 기간 동안 가장 중요한 신학적 도전은 단의론 이단이었습니다. 단의론은 그리스도께서 신적 본성과 인간적 본성이라는 두 본성을 지니셨지만 의지는 오직 하나뿐이라고 주장하는 신학 이론이었습니다. 이 교리는 7세기 초 비잔틴 황제 헤라클리우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우스가 단성론자들을 정통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한 타협안으로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동방의 시리아와 이집트 지역에는 그리스도께서 오직 하나의 신적 본성만을 지니신다고 주장하는 단성론자들이 다수 존재했고, 이들은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페르시아와의 전쟁 이후 분열된 제국을 통합하기 위해 단성론자들과 정통 신앙 사이의 중간 지점을 모색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두 본성을 지니시되 활동이나 의지는 하나라는 단의론이었습니다. 638년 헤라클리우스는 엑테시스라는 신앙 고백서를 발표하여 단의론을 공식 교리로 채택했고, 심지어 교황 호노리우스 1세도 이 교리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서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소프로니우스 총대주교와 고해자 성 막시무스는 이 교리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부정하는 이단이라고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막시무스는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인간이시라면 인간적 의지도 지니셔야 하며, 그 인간적 의지가 신적 의지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 구원의 핵심이라고 주장했습니다. 649년 교황 마르티노 1세는 라테라노 공의회를 소집하여 단의론을 단죄했으나, 이로 인해 비잔틴 황제 콘스탄스 2세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교황과 막시무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가 고문당하고 유배되었습니다. 마르티노 교황은 유배지에서 순교했고, 막시무스 역시 혀가 잘리고 오른손이 절단되는 끔찍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제6차 세계 공의회와 정통 신앙의 승리
668년 콘스탄스 2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4세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상황이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678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던 이슬람군을 격퇴한 후, 콘스탄티누스 4세는 로마와의 화해를 추구하며 단의론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공의회 개최를 제안했습니다. 황제의 서신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 교황 도누스는 이미 선종했지만, 새로 즉위한 아가톤 교황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아가톤은 680년 부활절경 로마에서 125명의 주교가 참석한 예비 시노드를 개최하여 서방 교회의 신학적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이 시노드는 그리스도께서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라는 두 의지를 지니신다는 정통 교리를 재확인하고, 단의론을 명백히 거부했습니다. 아가톤은 황제에게 보내는 서한과 시노드의 결정문을 작성하여, 사제 테오도르와 게오르기우스, 부제 요한, 차부제 콘스탄티누스 등으로 구성된 대규모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했습니다. 680년 11월 7일, 제6차 세계 공의회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궁 대회의실에서 개막했습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가 직접 처음 11개 회기와 마지막 회기에 참석하여 회의를 주재했고, 151명의 주교가 참석했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가 직접 참석했으며,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 총대주교구는 이슬람의 지배로 인해 비잔틴 황제가 임명한 대리인이 참석했습니다. 공의회는 총 18차례의 회기를 거쳐 진행되었습니다. 단의론을 옹호하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마카리우스는 죽은 사람을 부활시켜 자신의 신앙이 옳음을 증명하겠다며 시체를 가져왔으나 실패했고, 결국 파문당하고 폐위되었습니다. 공의회는 아가톤 교황의 서한을 낭독하고 그 내용을 심도 있게 논의했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게오르기우스는 아가톤의 서한을 받아들이며 "베드로가 아가톤을 통해 말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681년 9월 16일 마지막 회기에서 공의회는 그리스도께서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 신적 활동과 인간적 활동이라는 두 의지와 두 활동을 지니신다는 교리를 장엄하게 선포했습니다. 공의회는 또한 단의론을 주장하거나 지지했던 이들을 단죄했는데, 여기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키루스, 그리고 놀랍게도 교황 호노리우스 1세도 포함되었습니다. 호노리우스 교황이 단죄된 것은 그가 단의론을 직접 창안하지는 않았지만, 세르기우스 총대주교의 서신에 대해 모호한 답변을 보냄으로써 이단을 방조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아가톤의 유산과 교회사적 의의
제6차 공의회의 결정문이 로마로 전달되기 전인 681년 1월 10일, 아가톤 교황은 로마에 창궐한 전염병으로 선종했습니다. 그는 약 2년 반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교황으로 봉직했지만, 그 영향력은 실로 막대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소집한 공의회의 승리를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신학적 통찰과 확고한 신앙은 그리스도론 논쟁의 결정적 해결을 이끌어냈습니다. 아가톤의 가장 큰 업적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이라는 정통 교리를 수호한 것입니다. 단의론은 겉으로는 온건한 타협안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미묘한 이단이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인간적 의지를 지니지 않으셨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뇌는 무의미해지고, 십자가상의 순종은 진정한 인간적 결단이 아니게 됩니다. 아가톤은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고, 인간적 의지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셨다는 진리를 확고히 지켜냈습니다. 또한 아가톤은 동서방 교회의 화해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비잔틴 황제와의 외교적 협력을 통해 단의론 논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황제가 새로 선출된 교황에게 부과하던 세금을 폐지하는 데 성공하여 교황권의 독립성을 강화했습니다. 아가톤은 자선과 친절함으로 유명했으며, 그의 전구로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전해져 "기적 행하는 자"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으며,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 모두에서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서방 교회에서 그의 축일은 1월 10일입니다. 성 아가톤 교황의 생애는 신앙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때로 정치적 압력과 타협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또한 진정한 일치는 진리를 희생시키는 거짓 화해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의 화해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아가톤 교황 시대의 역사적 사건 연표
| 연도 | 사건 |
|---|---|
| 577년경 |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 아가톤 출생 |
| 638년 |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엑테시스 발표, 단의론 공식화 |
| 649년 | 교황 마르티노 1세의 라테라노 공의회, 단의론 단죄 |
| 652년 | 이슬람 세력의 시칠리아 침공 시작 |
| 653년 | 교황 마르티노 1세와 고해자 성 막시무스 체포 및 유배 |
| 668년 | 콘스탄티누스 4세 비잔틴 황제 즉위 |
| 678년 6월 27일 | 아가톤 제79대 교황 선출 |
| 678년 |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에서 비잔틴 제국 승리 |
| 678년 | 요크의 성 윌프리드 사건, 로마 시노드 개최 |
| 680년 부활절경 | 로마 시노드 개최, 125명 주교 참석, 단의론 거부 선언 |
| 680년 11월 7일 | 제6차 세계 공의회(콘스탄티노폴리스 제3차 공의회) 개막 |
| 681년 1월 10일 | 아가톤 교황 선종 |
| 681년 9월 16일 | 제6차 공의회 폐막, 단의론 공식 단죄 및 이원 의지론 선포 |
참고 문헌 및 참고 사이트
- 바티칸 공식 웹사이트 (www.vatican.va) - 교황 아가톤 전기
- Catholic Encyclopedia - 성 아가톤 교황 항목 (www.newadvent.org/cathen)
- Catholic Online - 성인 전기 자료
- Mann, H. K., "Lives of the Popes in the Early Middle Ages", London, 1902
- Butler, A., "Lives of the Saints", London, 1877
- Greek Orthodox Archdiocese - 제6차 공의회 자료
- Britannica Encyclopedia - 성 아가톤 및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 세계 가톨릭 백과사전 - 단의론 항목
'1. 성인과 교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시련을 이겨낸 순교자, 성 히폴리토의 신앙과 유산 (0) | 2025.11.30 |
|---|---|
| 성 파코미오 - 공동 수도생활의 위대한 창시자 (1) | 2025.11.29 |
| 사막의 교부 성 안토니오 대수도자의 삶과 영적 유산 (0) | 2025.11.27 |
| 황야의 영적 거장 성 사바 수도자의 삶과 유산 (0) | 2025.11.26 |
| 성 메토디오 - 슬라브 복음화를 완성한 위대한 대주교 (1) | 2025.1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