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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인과 교부

성 마르티노 1세 교황: 순교로 신앙을 증거한 최후의 교황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5.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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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브리아에서 로마로, 교황청의 외교관으로

7세기 중반의 지중해 세계는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습니다. 이슬람 세력이 시리아와 이집트를 장악하며 동방 그리스도교 세계를 위협했고, 비잔틴 제국은 영토 방어에 급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신학적 논쟁은 더욱 격화되었고, 황제와 총대주교는 분열된 제국을 통합하기 위해 정통 신앙과 타협하는 위험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590년에서 600년 사이,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지역의 티베르 강 근처 토디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파브리치우스라는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마르티노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지성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깊은 연민을 보였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전기 작가인 시어도어에 따르면, 마르티노는 고귀한 가문 출신으로 탁월한 지적 능력을 지녔으며, 가난한 이들에게 큰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마르티노가 성 바실리오 수도회에 속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641년경 마르티노는 이미 아빠스의 직위에 올라 있었고, 교황 요한 4세는 그에게 중요한 선교 임무를 맡겼습니다. 당시 달마티아와 이스트리아 지역은 슬라브족의 침략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교황은 마르티노에게 막대한 자금을 맡겨 이 지역 주민들의 고통을 경감하고, 포로로 잡혀간 이들을 구출하는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마르티노는 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파괴된 교회들을 재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달마티아의 중요한 성인들의 유해를 로마로 가져왔습니다. 교황 요한 4세는 이 유해들을 공경하기 위해 라테라노 세례당에 성 베난시오 경당을 건립했습니다. 이 경당은 먼 곳에서 가져온 유해를 공경하기 위해 특별히 건립된 순교자 기념당의 초기 사례로, 순교자 공경의 정점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물이었습니다. 마르티노의 외교적 능력과 행정 역량은 교황청에서 높이 평가되었고, 교황 테오도르 1세는 그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주재 교황 사절로 임명했습니다. 이 직책은 아포크리시아리우스라고 불렸으며, 비잔틴 황제의 궁정에서 교황을 대표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이었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마르티노는 그리스어에 능통했고 동방 신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동방 교회를 지배하고 있던 단의론 논쟁의 복잡성을 직접 목격했고, 이것이 정통 신앙에 얼마나 심각한 위협이 되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 마르티노 1세 교황: 순교로 신앙을 증거한 최후의 교황

황제의 승인 없이 선출된 교황

649년 5월 14일, 교황 테오도르 1세가 선종했습니다. 테오도르 교황은 생애 마지막 해에 단의론에 반대하는 공의회를 준비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고해자 성 막시무스와 긴밀히 협력하고 있었습니다. 막시무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출신의 수도자이자 신학자로, 단의론의 위험성을 가장 명확히 인식하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테오도르 교황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에 교황청을 공석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로마의 성직자들은 매우 어려운 딜레마에 직면했습니다. 그들은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는 지적 명성을 갖춘 후계자를 찾아야 했지만, 동시에 그는 비잔틴 황제의 승인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습니다. 당시 비잔틴 제국이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 선출된 교황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부터 황제의 인준을 받아야만 공식적으로 착좌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537년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탈리아를 정복하고 고트족이 임명한 교황을 퇴위시킨 이후 확립된 관행이었습니다. 막시무스의 영향력으로, 649년 7월 5일 또는 7월 21일, 토디 출신의 부제 마르티노가 제74대 교황으로 선출되고 즉시 성품을 받았습니다. 이는 비잔틴 교황청 시대에 황제의 사전 승인 없이 성품을 받은 유일한 교황이라는 역사적 기록을 남겼습니다. 마르티노는 전임 콘스탄티노폴리스 주재 교황 사절로서 동방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지만, 황제의 승인 없는 그의 선출은 명백히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습니다. 마르티노의 그리스어 능력과 동방에서의 명성은 테오도르 교황이 그를 이전에 제안된 공의회의 개인 대표로 임명하려 했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새로 선출된 교황 마르티노는 테오도르 교황이 시작한 공의회 준비 작업을 즉시 재개했습니다. 그는 막시무스와 긴밀히 협력하며 649년 여름과 가을 동안 공의회를 치밀하게 준비했습니다. 공의회 소집 소식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지만, 비잔틴 제국은 동방에서의 위기로 너무 바빠 관심을 돌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678년 이슬람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 공격이 있기 전까지, 비잔틴 제국은 아랍의 위협으로 끊임없이 압박받고 있었습니다.

라테라노 공의회와 단의론의 단죄

649년 10월 5일, 로마의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역사적인 공의회가 개막했습니다. 그리스 출신의 성직자 테오필락토스가 공의회를 소집했는데, 그는 사도좌의 수석 공증인이자 교황청 문서고와 도서관의 책임자였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여전히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치세 연호를 사용하여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이는 로마 교회가 비잔틴 제국과의 완전한 단절을 원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공의회에는 105명의 주교가 참석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스테파노 주교를 제외하고는 모두 동로마 제국 서부 지역 출신이었습니다. 참석 주교들은 이탈리아, 시칠리아, 사르디니아, 코르시카, 아프리카 출신이었고, 로마의 교회법적 관할권에 속하던 알프스 이북 유럽, 스페인, 그리스, 크레타 지역은 대표되지 않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발언 역할은 교황 마르티노 1세, 아퀼레이아의 막시모 주교, 사르디니아 칼리아리의 데우스데디트 주교, 체세나의 마우루스 주교, 템프사의 세르기우스, 코르시카 아작시오의 베네딕토, 그리고 나폴리의 레온티오스가 맡았습니다. 레온티오스를 제외한 나머지는 참석한 주교들 중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이들이었습니다. 나머지 98명의 주교들은 본질적으로 방청객이었으며, 다섯 번만 일제히 발언했고, 공의회의 세계 공의회적 지위를 뒷받침하기 위해 참석한 것이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단의론 논쟁의 복잡성을 이해할 만큼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많은 이들은 단의론이 칼케돈 공의회와 다르다는 것만 알고 있었습니다. 교황 마르티노 1세는 미리 준비된 연설을 낭독했습니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들이 주장하는 단의론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엑테시스와 콘스탄스 2세 황제의 티포스를 단죄했습니다. 또한 그는 이단을 근절할 사도적 권위가 로마에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공의회는 10월 31일까지 다섯 차례의 회기를 거쳐 진행되었으며, 결정문은 총 20개 조항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제10조와 제11조가 그리스도의 두 의지와 두 활동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으며, 이는 주로 막시무스가 카르타고에서 피르후스 총대주교와 논쟁한 내용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공의회는 그리스도께서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 신적 활동과 인간적 활동이라는 두 의지와 두 활동을 지니신다는 교리를 명확히 선포했습니다. 또한 엑테시스와 티포스를 공식적으로 단죄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우스와 피르후스, 파울루스를 이단으로 규정했습니다. 공의회의 결정문과 교황의 교서는 곧바로 배포되었습니다. 비록 라테라노 공의회가 동서방 어디에서도 세계 공의회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이는 교황이 황제로부터 독립하여 세계 공의회를 소집하려 한 최초의 시도였습니다. 이는 로마 교황의 수위권 역사에서 분수령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황제의 분노와 교황의 체포

라테라노 공의회의 결정문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을 때, 황제 콘스탄스 2세는 격분했습니다. 공의회는 자신이 발표한 티포스를 단죄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임명한 총대주교들을 이단으로 규정했습니다. 더욱이 교황 마르티노는 황제의 승인 없이 교황으로 선출되고 성품을 받았습니다. 이는 비잔틴 황제의 권위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습니다. 콘스탄스 2세는 단의론을 신학적 진리로서가 아니라 제국 통합을 위한 정치적 도구로 보았습니다. 그는 단성론자들과 정통 신앙인들 사이의 논쟁을 종식시키고 제국의 종교적 통일을 이루려 했습니다. 그러나 마르티노 교황은 이러한 정치적 타협이 신앙의 진리를 희생시키는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653년 6월 17일, 황제의 명령을 받은 총독 올림피우스의 후임자인 총독 칼리오파와 황실 서기관 사케라리우스가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한밤중에 라테라노 궁으로 침입하여 병든 교황을 체포했습니다. 마르티노는 당시 이질로 심하게 앓고 있었고, 거동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체포된 교황은 즉시 그리스의 낙소스 섬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1년 동안 구금되었습니다. 653년 9월 17일, 마르티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는 배에서 내릴 때조차 공개적으로 전시되었고, 사람들의 조롱과 모욕을 받았습니다. 처음에 황제는 교황을 처형할 계획이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파울루스 2세의 간청으로 사형은 면하게 되었습니다. 대신 마르티노는 수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공개적인 수치를 당해야 했습니다. 654년 6월, 마르티노는 반역죄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재판관들은 그가 단의론을 반대하고 공의회를 소집한 것을 황제에 대한 반역으로 규정했습니다. 마르티노는 신학적 문제에 대해 변론하려 했지만, 재판관들은 그의 변론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그가 황제의 명령을 어겼다는 정치적 문제뿐이었습니다. 재판 결과, 마르티노는 공개적으로 채찍질을 당했고, 그의 교황 표장이 찢겨졌으며, 쇠사슬에 묶여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병든 몸으로 이러한 육체적, 정신적 고문을 견뎌야 했던 마르티노는 극심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가장 아프게 한 것은 로마 교회 지도자들의 무관심이었습니다.

유배지에서의 순교와 영원한 증거

654년, 황제는 로마 교회에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비록 마르티노가 여전히 살아 있었지만, 황제는 그를 이미 폐위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로마 교회는 황제의 명령에 동의했고, 에우제니오 1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했습니다. 이는 마르티노에게 마지막 일격이었습니다. 평생을 교회를 위해 봉사했던 교황이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버림받은 것입니다. 마르티노는 나중에 쓴 편지에서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교회가 나를 잊었고, 로마의 하느님 교회는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 나는 47일 동안 감옥에 있었지만, 로마에서는 아무도 나를 방문하거나 위로하지 않았다." 그의 가장 큰 고통은 육체적 고문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로부터의 버림받음이었습니다. 막시무스는 재판에서 "로마 교황은 폐위되었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 "공의회 논증의 타당성은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의 정당성에 달려 있지 않다"고 대응했습니다. 이는 진리는 권위자의 지위가 아니라 그 자체의 힘으로 서 있다는 중요한 신학적 원칙을 천명한 것입니다. 655년 3월 또는 5월, 마르티노는 흑해 연안의 크림 반도에 있는 케르손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케르손은 로마 제국의 최북단 변경 지역으로, 극심한 추위와 황량함으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마르티노는 그곳에서 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었고, 빵조차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친구들에게 구호품을 보내달라고 애원했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마르티노는 자신의 신앙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타협을 거부했고, 황제의 잘못된 신학에 굴복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비록 직접적인 처형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학대, 추위, 굶주림, 그리고 버림받음이 그를 서서히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655년 9월 16일, 교황 마르티노 1세는 케르손의 유배지에서 선종했습니다. 그는 벗겨진 채로, 굶주리며, 잊혀진 채로, 홀로 죽었습니다.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황량한 변경 지역에서, 그는 잘못된 신학과 정치적 압력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마르티노 1세를 순교자로 공경합니다. 그는 순교로 인정받은 마지막 교황입니다. 비록 그가 직접 처형당하지는 않았지만,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기 때문에 순교자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의 유해는 후에 로마로 반환되어 성 베드로 대성당 대리석 바닥 아래 어딘가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마르티노의 순교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죽은 후 수십 년 동안, 그가 옹호했던 신학은 점점 더 많은 지지를 받았고, 마침내 680년에서 681년까지 열린 제6차 세계 공의회에서 그의 입장이 완전히 승인되었습니다. 공의회는 그리스도께서 두 의지를 지니신다는 교리를 장엄하게 선포했고, 마르티노와 막시무스가 단죄했던 단의론을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규정했습니다. 동방 교회의 예배 찬가에서는 마르티노를 "무류한 신앙의 스승"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가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로마 사도좌에 앉았기 때문입니다.

마르티노의 유산과 순교의 의미

성 마르티노 1세 교황의 생애는 교회의 지도자가 진리를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정치적 압력, 육체적 고문, 그리고 가장 고통스럽게도 자신의 교회 공동체로부터의 버림받음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신앙의 진리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마르티노의 가장 큰 유산은 교회의 교리적 순수성이 정치적 편의나 제국의 통합보다 중요하다는 원칙을 확립한 것입니다. 7세기 중반, 비잔틴 제국은 이슬람의 위협으로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황제와 총대주교들은 단성론자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 단의론이라는 타협안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제국을 종교적으로 통합하여 외부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려는 실용적인 정책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르티노는 이러한 정치적 실용주의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이라는 신앙의 핵심 진리를 훼손한다고 보았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인간적 의지를 지니지 않으셨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기도는 무의미해집니다. 그것은 진정한 인간의 의지가 신적 의지에 자유롭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적 의지의 외적 표현에 불과하게 됩니다. 마르티노의 신학적 통찰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한 것이었습니다. 구원은 신적 본성이 인간적 본성을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적 의지로 아버지께 순종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마르티노는 또한 교황권의 독립성을 위한 투쟁에서 중요한 선례를 남겼습니다. 그는 황제의 승인 없이 교황으로 선출되고 성품을 받은 유일한 교황이었으며, 황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비록 그는 순교로 이 투쟁의 대가를 치렀지만, 그의 행동은 교회가 세속 권력으로부터 독립하여 신앙의 문제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확립했습니다. 이는 후대 교황들이 황제나 왕들로부터 독립을 주장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선례가 되었습니다. 마르티노의 순교는 또한 진정한 순교의 의미를 확장했습니다. 초대 교회 시대의 순교자들은 칼이나 사자에 의해 즉각적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마르티노는 서서히, 고독 속에서, 버림받은 채로 죽어갔습니다. 그의 순교는 극적인 처형 장면이 아니라, 추위와 굶주림과 고독 속에서의 느린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것이 신앙의 증거를 위한 진정한 순교임을 인정했습니다. 고해자 성 막시무스는 마르티노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였습니다. 그 역시 655년에 체포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갔고, 662년에는 재판을 받았습니다. 막시무스는 혀가 잘리고 오른손이 절단되는 끔찍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이는 그가 더 이상 말하거나 쓸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시무스는 고문 후에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고, 662년 8월 13일 흑해 연안의 유배지에서 선종했습니다. 마르티노와 막시무스의 순교는 7세기 교회가 치른 가장 고귀한 희생이었습니다. 성 마르티노 1세는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 모두에서 순교자이자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서방 교회에서 그의 축일은 11월 10일이지만, 동방 정교회에서는 4월 13일과 9월 20일에 기념합니다. 그의 유해는 로마로 반환되어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치되었으며, 케르손에 있던 그의 무덤은 순례지가 되었습니다. 마르티노의 생애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깁니다. 진리는 때로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길을 요구합니다. 정치적 편의와 타협의 유혹은 항상 존재하지만, 신앙의 진리는 결코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진정한 지도력은 인기나 안전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충실함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르티노는 교회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동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홀로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가 옳았음을 증명했고, 교회는 그를 순교자로 공경합니다.

마르티노 1세 교황 시대의 역사적 사건 연표

연도 사건
590-600년경 이탈리아 토디에서 마르티노 출생
638년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엑테시스 발표, 단의론 공식화
641년경 마르티노, 달마티아와 이스트리아 선교 임무 수행
645년경 마르티노, 콘스탄티노폴리스 주재 교황 사절로 임명
648년 콘스탄스 2세 황제의 티포스 발표
649년 5월 14일 교황 테오도르 1세 선종
649년 7월 5일 마르티노 제74대 교황 선출 (황제 승인 없이 즉시 성품)
649년 10월 5-31일 라테라노 공의회 개최, 단의론 단죄 및 엑테시스와 티포스 거부
653년 6월 17일 교황 마르티노 체포, 낙소스 섬으로 유배
653년 9월 17일 마르티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
654년 6월 마르티노 반역죄로 재판, 공개 채찍질 및 교황 표장 박탈
654년 로마 교회, 에우제니오 1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
655년 3-5월 마르티노 크림 반도 케르손으로 유배
655년 9월 16일 성 마르티노 1세 교황 케르손에서 순교
655년 고해자 성 막시무스 체포
662년 성 막시무스 재판, 혀와 오른손 절단 고문
662년 8월 13일 고해자 성 막시무스 유배지에서 선종
680-681년 제6차 세계 공의회, 마르티노의 신학적 입장 완전 승인

참고 문헌 및 참고 사이트

  • 바티칸 공식 웹사이트 (www.vatican.va) - 교황 마르티노 1세 전기
  • Catholic Encyclopedia - 성 마르티노 1세 교황 항목 (www.newadvent.org/cathen)
  • Butler, A., "Lives of the Saints", Volume IV
  • Ekonomou, A. J., "Byzantine Rome and the Greek Popes", Lexington Books, 2007
  • Neil, B., "Seventh-Century Popes and Martyrs: The Political Hagiography of Anastasius Bibliothecarius"
  • Maximos the Confessor, "Selected Writings" - 단의론 논쟁 관련 원문
  • 세계 가톨릭 백과사전 - 마르티노 1세 및 라테라노 공의회 항목
  • Greek Orthodox Archdiocese - 성 마르티노와 성 막시무스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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