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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인과 교부

성 바르나바 - 위로의 아들, 바오로와 함께한 초기 교회의 위대한 선교사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5.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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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초기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성 바르나바. 그의 이름은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이름처럼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큰 위로와 격려를 선사했던 성인입니다. 특히 바오로와의 선교 동반자로서 보여준 그의 모습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신앙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어요.

키프로스 출신의 레위족, 바르나바의 등장

성 바르나바는 본명이 요셉이었는데, 사도들이 그를 '바르나바'라고 불렀다고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족으로, 당시 헬레니즘 문화와 유대 문화가 만나는 지중해 세계의 복잡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죠. 이런 배경은 후에 그가 이방인 선교에 큰 역할을 하게 되는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답니다.

성 바르나바 - 위로의 아들

 

초기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르나바가 보여준 첫 번째 인상적인 모습은 바로 그의 관대함이었어요. 사도행전 4장 36-37절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밭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초기 교회 공동체는 '모든 것을 공유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었는데, 바르나바는 이런 정신을 몸소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거죠.

사울에서 바오로로, 그 전환점에서의 바르나바

바르나바가 초기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순간은 바로 사울(후의 바오로)을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한 일이었습니다. 다메섹에서 극적인 회심을 경험한 사울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다른 제자들은 그를 믿지 못하고 두려워했어요. 당연한 일이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바르나바는 달랐습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사울을 사도들에게 데리고 가서, 사울이 다메섹에서 어떻게 주님을 본 것과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 그리고 다메섹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한 것들을 설명해 주었어요. 이 순간이 없었다면 바오로의 사도직은 시작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바르나바의 관대함과 포용력이 교회사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순간이었던 거죠.

안티오키아에서의 사역과 이방인 선교의 시작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티오키아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바르나바가 파견되었습니다. 안티오키아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고,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만나는 국제적인 대도시였어요. 여기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하니, 얼마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는지 알 수 있죠.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에서 놀라운 일들을 목격했습니다.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오는 모습을 보며, 그는 하느님의 은혜를 깨달았어요. 하지만 혼자서는 이 큰 일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바르나바는 타르수스에 있던 사울을 찾아가서 데려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르나바와 바오로의 역사적인 동역이 시작된 거예요.

1차 선교여행 - 시련과 승리의 연속

기원후 45년경,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첫 번째 선교여행을 떠났습니다. 이들과 함께한 요한 마르코까지 포함하여 세 사람의 여행이었죠. 첫 번째 목적지는 바르나바의 고향인 키프로스였어요. 살라미에서 시작해서 바보까지, 섬 전체를 가로지르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키프로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바보에서 총독 세르기오 바울로를 만난 일이었어요. 마술사 엘리마가 방해했지만, 바오로가 성령에 충만하여 그를 꾸짖자 엘리마가 눈이 멀게 되었고, 이를 본 총독이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복음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죠.

하지만 선교여행이 항상 순탄했던 건 아니었어요. 밤빌리아 베르게에서 요한 마르코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고, 비시디아 안티오키아에서는 유대인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이고니온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루스드라에서는 바오로가 돌에 맞아 죽을 뻔하기도 했죠. 하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는 말씀처럼, 시련을 통해 더욱 강해졌어요.

예루살렘 공의회와 바르나바의 역할

1차 선교여행 후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예루살렘 공의회였습니다. 기원후 49년경에 열린 이 회의는 초기 교회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대한 전환점이었어요. 이방인 개종자들이 할례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핵심 쟁점이었죠.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자신들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경험한 하느님의 표적과 기사들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야고보를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이들의 말을 듣고, 결국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기로 결정했어요. 이 결정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머물러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바르나바의 증언이 세계종교로서의 기독교가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거죠.

갈등과 이별 - 인간적인 모습까지 보여준 성인

안타깝게도 바르나바와 바오로의 동역은 영원하지 않았어요. 2차 선교여행을 준비하면서 요한 마르코 문제로 두 사람 사이에 심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바오로는 1차 선교여행 때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간 마르코를 다시 데려가는 것을 반대했지만, 바르나바는 마르코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고 싶어 했어요.

결국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바오로는 실라와 함께 육로로 소아시아 지역으로 향했고, 바르나바는 마르코와 함께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갔어요. 이 사건은 성인들도 완전하지 않은 인간이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하느님께서는 이런 인간적인 갈등조차도 복음 전파를 위해 사용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두 팀으로 나뉘면서 더 넓은 지역에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거든요.

바르나바가 남긴 유산

바르나바와 바오로의 이별 이후 성경에서는 바르나바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줄어들지만, 그의 영향력은 계속되었어요. 특히 그가 돌봤던 마르코는 훗날 마르코복음을 쓴 저자가 되었고, 바오로도 후에 마르코를 "나의 동역자"라고 부르며 화해했다고 전해집니다. 바르나바의 포용적인 리더십이 결국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죠.

교회 전통에 따르면, 바르나바는 키프로스에서 계속 선교 활동을 하다가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삶은 초기 교회가 어떻게 유대교적 틀을 벗어나 보편적인 종교가 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예요. 그의 '위로의 아들'이라는 이름처럼, 그는 평생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일으켜 세우는 일에 힘썼습니다.

현대에 주는 교훈

성 바르나바의 삶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바로 포용과 격려의 리더십입니다. 그는 사울이라는 전직 박해자를 받아들였고, 마르코라는 실패한 선교사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었어요. 이런 모습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절실히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요?

또한 바르나바는 자신보다 더 뛰어난 동역자(바오로)와 함께 일하면서도 질투하지 않았고, 때로는 뒤로 물러서기도 했어요. 진정한 리더십이란 자신이 항상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적절한 역할을 감당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입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사도행전 11:24)

성 바르나바의 삶은 1세기 지중해 세계의 복잡한 정치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도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려고 노력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로마 제국의 팍스 로마나(Pax Romana) 시대라는 특별한 역사적 배경과, 헬레니즘 문화와 유대 문화가 만나는 독특한 환경에서 그가 보여준 문화적 감수성과 포용력은 오늘날 글로벌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성 바르나바 관련 주요 역사적 사건 연표

연도 사건 장소 의미
기원후 30년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예루살렘 기독교의 시작
기원후 33-35년경 바르나바, 예루살렘 초기 교회 참여 예루살렘 재산 헌납으로 공동체 정신 실천
기원후 35-37년경 사울의 다메섹 회심 사건 다메섹 바오로의 개종과 선교사로의 전환
기원후 37-40년경 바르나바, 사울을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 예루살렘 바오로의 사도직 시작에 결정적 역할
기원후 40-44년 바르나바의 안티오키아 파견과 사역 안티오키아 이방인 선교의 기반 마련
기원후 45-48년 바르나바와 바오로의 1차 선교여행 키프로스, 소아시아 체계적인 이방인 선교의 시작
기원후 49년 예루살렘 공의회 참석 예루살렘 이방인 할례 의무 면제 결정
기원후 50년경 바르나바와 바오로의 분리 안티오키아 마르코 문제로 선교팀 분할
기원후 50-60년경 바르나바의 키프로스 선교 활동 키프로스 고향에서의 지속적인 복음 전파
기원후 61년경 바르나바의 순교 (전승) 키프로스 살라미 초기 교회 순교자의 대열에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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