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1. 성인과 교부

성 티투스 - 크레타의 목자이자 교회의 든든한 기둥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5. 8. 22.
반응형

 

1세기 초기 교회에서 가장 신뢰받는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성 티투스. 그는 바오로 사도의 충실한 동역자이자, 지중해의 전략적 요충지인 크레타 섬에서 복음을 뿌리내린 위대한 목자였습니다. 바오로가 그에게 보낸 편지는 오늘날까지도 교회 지도자들에게 소중한 지침서가 되고 있어요. 특히 어려운 환경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간 그의 모습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큰 감동과 용기를 선사합니다.

 

헬라계 그리스도인의 특별한 배경

성 티투스는 헬라계(그리스계) 그리스도인으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출신이었어요. 이는 초기 교회사에서 매우 의미 깊은 일이었죠. 당시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시작되어 점차 이방인들에게 확산되어 가는 과정이었는데, 티투스는 바로 이런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복음이 모든 민족을 위한 것임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였던 거죠.

갈라디아서 2장에 따르면, 바오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티투스를 함께 데려갔는데, 그때 할례를 강요받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이는 단순한 개인적 일화가 아니라 초기 교회의 중대한 신학적 결정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유대교의 율법적 의식을 거치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원칙이 티투스를 통해 확립된 거예요.

성 티투스 - 크레타의 목자이자 교회의 든든한 기둥

 

바오로의 가장 믿음직한 동역자

바오로는 여러 서신에서 티투스를 극찬했어요. 고린도후서에서는 그를 "나의 동역자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무"라고 소개했고, "내가 디도를 인하여 하느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예의상의 말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사였어요. 실제로 티투스는 바오로의 가장 어려운 순간들에 함께했던 진정한 동역자였거든요.

특히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심각했을 때, 바오로는 티투스를 특사로 파견했어요. 고린도 교회는 당시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분열과 도덕적 타락, 이단 교리의 침투 등으로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죠. 이런 상황에서 바오로가 티투스를 보낸 것은 그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었어요.

티투스는 이 어려운 임무를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을 보면, 티투스가 고린도에서 돌아왔을 때 바오로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알 수 있어요. "디도가 너희로 말미암아 안위를 얻었으므로 우리가 안위를 얻었노라"라고 기록되어 있거든요. 복잡하고 민감한 교회 분쟁을 지혜롭게 중재하고 해결한 티투스의 탁월한 리더십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크레타 섬 - 도전적인 선교지

티투스가 맡은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사명은 바로 크레타 섬의 교회들을 정비하는 일이었어요. 크레타는 지중해 동부에 위치한 큰 섬으로, 고대부터 다양한 문명이 교차하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미노스 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한 이곳은 복잡한 문화적 배경과 독특한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었죠.

크레타 섬의 지정학적 중요성: 크레타는 지중해를 가로지르는 해상 교통의 핵심 거점이었습니다. 이집트와 소아시아, 그리스 본토를 연결하는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곳에 복음이 뿌리내리면 지중해 전체로 기독교가 확산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어요.

하지만 크레타 사람들은 당시에도 "거짓말쟁이, 악한 짐승,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었어요. 실제로 바오로도 디도서에서 크레타의 한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며 이런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물론 이는 당시의 일반적인 편견이었겠지만, 그만큼 크레타에서 목회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죠.

더욱이 크레타는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외부와의 소통이 제한적이었고, 각 도시마다 고유한 문화와 관습을 고수하는 경향이 강했어요. 이런 환경에서 통일된 교회 조직을 만들고 운영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티투스는 이런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디도서에 담긴 목회 지혜

바오로가 티투스에게 보낸 편지인 디도서는 비록 짧지만 목회에 관한 귀중한 지혜들로 가득해요. 이 편지는 크기로는 목회서간 중 가장 짧지만, 내용적으로는 매우 밀도 높은 지침서입니다. 특히 어려운 환경에서 어떻게 교회를 조직하고 운영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조언들이 담겨 있어요.

디도서 1장에서 바오로는 티투스에게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라"라고 지시했어요. 이는 단순히 교회 조직을 만드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크레타의 각 도시마다 흩어져 있던 그리스도인들을 체계적으로 조직화하여 안정적인 교회 공동체를 만들라는 뜻이었거든요. 이런 조직화 작업은 후에 크레타 교회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있어서는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디도서 2:7-8)

또한 바오로는 티투스에게 연령대별, 계층별 목양 방법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조언했어요.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 젊은 남녀들, 그리고 종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세세하게 안내했습니다. 이는 크레타 사회의 복잡한 사회 구조를 고려한 맞춤형 목회 전략이었어요. 획일적인 접근이 아니라 각각의 특성에 맞는 목양을 하라는 지혜로운 조언이었죠.

이단과의 치열한 영적 전쟁

크레타에서 티투스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 중 하나는 이단 교리와의 싸움이었어요. 바오로는 디도서에서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 당시 크레타에는 유대주의적 이단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할례와 음식 규정 등 구약의 율법을 강요하면서 복음의 본질을 흐리고 있었어요.

더 심각한 문제는 이들이 "더러운 이익을 위해" 거짓 가르침을 퍼뜨리고 있었다는 점이었어요. 종교를 이용해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던 거죠. 바오로는 이런 사람들을 "그 입을 막을 것이라"라고 강하게 표현했을 정도였습니다. 티투스는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진리를 지키고 순수한 복음을 전하는 어려운 임무를 감당해야 했어요.

하지만 티투스는 이런 도전을 지혜롭게 극복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이단들을 배척하기보다는, 건전한 교리를 통해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을 택했어요. 바오로도 디도서에서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라고 조언했는데, 이는 공격적인 논쟁보다는 진리의 능력으로 승부하라는 뜻이었죠.

실천적 기독교의 강조

디도서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선한 행실"을 매우 강조한다는 점이에요. 바오로는 이 짧은 편지에서 무려 여섯 번이나 선한 행실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선한 일에 열심하는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선한 일을 힘쓰며", "선한 일에 앞장서는 것을 배우게 하라" 등의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타나요.

이는 크레타의 특수한 상황과 관련이 있었어요. 당시 크레타 사회는 도덕적으로 문란했고,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환경의 영향을 받기 쉬운 상황이었거든요. 따라서 티투스는 교회 내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모범이 되는 그리스도인을 양성해야 했어요. 믿음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의 변화를 통해 복음의 능력을 증명하라는 것이었죠.

바오로는 특히 "하느님 우리 구주의 교훈을 아름답게 하라"고 당부했어요.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복음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보석과 같아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티투스는 이런 가르침을 크레타 교회에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단순히 종교적 집단이 아니라 사회에 선한 영향을 미치는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어요.

달마티아로의 새로운 도전

티투스의 사역은 크레타에서만 끝나지 않았어요. 디모데후서 4장 10절을 보면, 그가 달마티아로 갔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달마티아는 현재의 크로아티아 지역으로, 아드리아 해 연안의 험준한 산악 지대였어요. 이곳 역시 복음이 전해지기 어려운 척박한 땅이었는데, 티투스는 이런 새로운 도전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달마티아는 로마 제국의 변경 지역으로, 다양한 부족들이 살고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한 곳이었어요. 언어와 문화의 장벽도 높았고, 기존의 종교적 전통도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죠. 하지만 티투스는 크레타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곳에서도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교회사에 남긴 유산

교회 전승에 따르면, 티투스는 크레타의 초대 주교로서 장기간 사역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단순히 교회를 설립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어요. 그의 노력 덕분에 크레타 교회는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거점 중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티투스의 가장 큰 공헌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보여준 것이에요. 크레타라는 척박한 땅에서, 복잡한 사회 문제와 이단의 도전 속에서도 그는 꿋꿋하게 자신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그의 이런 모습은 후대의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어요.

또한 그는 실용적이면서도 영적인 목회의 모델을 제시했어요. 단순히 교리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실제 생활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추구했고, 교회가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도록 이끌었습니다. 이런 목회 철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지혜라고 할 수 있어요.

현대 교회에 주는 교훈

성 티투스의 삶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환경에 굴복하지 않는 신앙이에요. 크레타라는 어려운 선교지에서, 여러 가지 도전과 역경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때로는 어려운 환경에 처할 수 있는데, 티투스의 모습은 그런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줘요.

또한 그의 실천적 기독교 정신도 현대 교회가 깊이 생각해볼 점입니다. 그는 단순히 종교적 모임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도록 격려했어요. 오늘날 교회도 사회와 동떨어진 종교 집단이 아니라, 세상에 선한 영향을 미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티투스의 리더십 스타일에서도 배울 점이 많아요. 그는 권위적이거나 독단적이지 않았고, 대신 본을 보이는 리더십을 발휘했어요. 바오로도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라고 조언했는데, 이는 말보다 행동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십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었죠. 현대의 리더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큰 교훈입니다.

1세기 지중해 세계의 문화적 맥락

티투스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당시의 지중해 문화적 맥락을 알아야 해요. 1세기는 로마 제국이 지중해 전체를 통제하며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를 구현하던 시대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여 사상과 종교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다양한 종교와 철학이 경쟁하는 복잡한 시대이기도 했어요.

크레타 같은 지역은 특히 헬레니즘 문화와 로마 문화, 그리고 지역 고유문화가 복잡하게 얽힌 곳이었어요. 이런 환경에서 기독교를 전파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메시지를 전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문화적 충돌과 갈등을 지혜롭게 해결하면서 복음의 본질을 전해야 하는 고도의 선교 전략이 필요했거든요.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있어서는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을 보이고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디도서 2:7-8)

성 티투스는 이런 복잡한 시대적 상황에서 문화적 감수성을 가지고 사역했어요. 그는 지역의 특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복음의 핵심은 타협하지 않는 균형감각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접근 방식은 현대의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진리는 굽히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주는 거죠.

성 티투스 관련 주요 역사적 사건 연표

연도 사건 장소 의미
기원후 15-20년경 티투스 출생 소아시아 또는 그리스 헬라계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남
기원후 49-51년경 바오로와의 첫 만남과 개종 안티오키아 추정 바오로의 제자가 되어 선교 동참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