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1. 성인과 교부

성 치프리아노 - 박해 시대를 이끈 카르타고의 위대한 목자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5. 8. 24.
반응형

 

사목과 순교로 완성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

세속의 영광에서 그리스도의 종으로

타스치우스 체칠리우스 치프리아노스(Thascius Caecilius Cyprianus)는 200년경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뛰어난 수사학자였고, 로마 제국에서 촉망받는 지식인이었어요. 당시 카르타고는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지중해 세계의 3대 도시 중 하나였고, 북아프리카 기독교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화려한 배경을 가진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되었을까요?

치프리아노의 회심은 정말 극적이었습니다. 246년경, 그는 카르타고의 한 사제로부터 복음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그 순간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세속의 명예와 재산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한 거죠. 그는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독신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당시 카르타고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어요. 왜냐하면 그만큼 유명하고 성공한 인물이었거든요.

놀랍게도 세례를 받은 지 불과 2년 만인 248년경, 그는 카르타고의 주교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례적으로 빠른 승진이었는데, 이는 그의 뛰어난 능력과 함께 당시 교회가 그만큼 위기 상황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로 데키우스 황제의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려는 때였거든요. 하느님께서는 이미 앞으로 닥칠 시련을 대비해 적절한 지도자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 같아요.

 

데키우스 박해와 믿음의 시련

249년 데키우스가 로마 황제가 되자, 기독교에 대한 전면적인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전의 박해들과 달리 이번에는 체계적이고 제국 전체에 걸친 대규모 박해였어요. 모든 시민은 로마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이를 증명하는 증서(리벨루스)를 받아야 했습니다. 거부하면 죽음이었죠. 이때 치프리아노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치프리아노는 피신을 결정했습니다. 이는 당시 일부 신자들에게 비판을 받았어요. 주교가 양떼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의 선택은 현명했습니다. 은신처에서도 그는 편지를 통해 교구를 지속적으로 돌보았고, 박해가 끝날 때까지 교회의 결속을 유지했거든요. 만약 그가 순교했다면 카르타고 교회는 큰 혼란에 빠졌을 거예요. 때로는 살아서 싸우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어려운 선택일 수 있습니다.

박해 기간 중 가장 큰 문제는 배교자(라프시)들의 처리였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문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 신앙을 포기하고 로마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어요. 박해가 끝난 후 이들이 교회로 돌아오려 할 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가 큰 논란이 되었습니다. 엄격파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고, 관용파는 무조건 받아들이자고 했어요. 치프리아노는 이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했습니다.

 

교회 일치를 위한 목자의 마음

치프리아노는 배교자 문제에 대해 중도적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회개하는 이들에게는 일정한 참회 기간을 거쳐 교회로 복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어요. 하지만 동시에 신앙의 엄중함도 강조했습니다. 이런 균형잡힌 접근법은 분열 위기에 있던 카르타고 교회를 다시 하나로 묶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의 유명한 저작 "교회의 일치에 대하여(De Ecclesiae Catholicae Unitate)"는 이 시기에 쓰여진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어요. 이는 배타적인 의미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중요성과 일치의 가치를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베드로의 수위권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로마 교회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했죠.

치프리아노의 사목 방식은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그는 이론만 가르치는 신학자가 아니라, 실제로 신자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목자였습니다.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는 직접 병자들을 돌보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교회 재산을 아낌없이 사용했어요. 그의 편지들을 보면 개별 신자들의 고민까지 세심하게 챙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목자의 마음이었던 거죠.

 

순교의 영광으로 완성된 신앙

257년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새로운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성직자들을 집중적으로 노렸어요. 치프리아노는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지만, 황제에 대한 충성은 거부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만을 고백했습니다. 처음에는 유배형을 받았지만, 258년 더욱 가혹한 칙령이 내려지면서 사형이 확정되었어요.

258년 9월 14일, 치프리아노는 카르타고 근교에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그의 순교 과정은 정말 평안하고 담대했어요. 마지막까지 신자들을 격려하고, 자신을 죽이는 집행관에게까지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심지어 집행관에게 줄 금화까지 미리 준비해 놓았다고 해요. 이는 그가 얼마나 그리스도적 사랑을 실천했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일화입니다.

그의 순교는 북아프리카 교회뿐만 아니라 전체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그가 남긴 서간들과 저작들은 후대 교회법 발전에 중요한 기초가 되었어요. 그의 세례관, 성직자론, 교회론 등은 지금까지도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깊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박해 시대에 어떻게 신앙을 지키고 교회를 이끌어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을 보여주었어요.

 

시대를 초월한 사목자의 모범

치프리아노가 현대 교회에 주는 교훈은 매우 크다고 생각해요. 우선 그의 회심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줍니다. 세속적 성공을 누리던 사람도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거든요. 현대의 많은 사업가들이나 지식인들에게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그의 위기관리 능력은 정말 탁월했어요. 데키우스 박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교회의 일치를 유지하고, 배교자들을 다시 품는 지혜를 보였습니다. 오늘날처럼 교회가 다양한 도전에 직면한 시대에, 그의 포용력과 지도력은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어요. 무조건적인 엄격함도 무분별한 관용도 아닌, 진정한 사랑에 기반한 목양이었거든요.

무엇보다 그의 순교 정신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물론 지금은 과거와 같은 물리적 박해는 없지만, 다른 형태의 시련들이 있잖아요. 세속주의의 압력, 물질만능주의의 유혹, 도덕적 상대주의의 도전 등 말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치프리아노처럼 신앙의 본질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순교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아프리카 교회의 황금기를 연 선구자

치프리아노는 북아프리카 기독교 역사에서 정말 중요한 인물이에요. 그 이전에도 터툴리아누스 같은 걸출한 교부가 있었지만, 치프리아노는 이론과 실천을 완벽하게 결합한 지도자였습니다. 그의 지도력 하에 카르타고 교구는 북아프리카 전체 교회의 중심지로 자리잡았어요. 후에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위대한 교부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치프리아노가 닦아놓은 기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한 교회 회의 제도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어요. 중요한 문제가 생겼을 때 주교들이 모여서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는 관습을 정착시켰습니다. 이는 훗날 공의회 제도로 발전하게 되죠. 배교자 문제나 이단 세례 문제 등을 처리할 때도 그는 혼자 결정하지 않고 동료 주교들과 상의했어요. 이런 공동체적 의사결정 방식은 가톨릭 교회의 중요한 전통이 되었습니다.

치프리아노의 문체와 수사법도 특별했어요. 그는 고전 라틴 문학의 최고 수준을 보여주면서도, 일반 신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의 편지들은 문학작품으로도 가치가 인정받을 정도예요. 이는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지적 수준과 대중적 소통 능력을 모두 갖춰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로마 교회와의 갈등 속에서 드러난 신념

치프리아노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로마 교회와의 갈등입니다. 특히 이단 세례 문제를 둘러싸고 교황 스테파노 1세와 심각한 의견 충돌이 있었어요. 로마 교회는 이단들이 베푼 세례도 유효하다고 보았지만, 치프리아노와 북아프리카 주교들은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갈등은 표면적으로는 세례 문제였지만, 실제로는 교회의 권위와 지역 교회의 자율성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였어요. 치프리아노는 로마 교회의 우위는 인정하면서도, 각 지역 교회의 주교들도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동등한 권위를 가진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입장은 훗날 동방정교회와 가톨릭교회의 분열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교회 내 다양성과 일치의 조화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했어요.

하지만 이런 갈등에도 불구하고 치프리아노는 결코 교회의 일치를 해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분열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이는 오늘날 교회 내에서 다양한 의견이 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모델을 제시합니다. 진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사랑으로 대화하는 자세 말이에요.

 

영원한 목자, 순교자 치프리아노의 유산

치프리아노는 데키우스 박해에서는 피신했지만, 발레리아누스 박해에서는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이미 교회가 안정되었고, 자신의 역할도 어느 정도 완수했다고 판단한 거죠. 더 이상 도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신앙을 증거하기로 결심했어요. 그의 순교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평생의 신앙을 완성하는 영광스러운 마무리였습니다.

그가 남긴 저작들은 지금도 중요한 신학적 자료로 연구되고 있어요. 특히 "주님의 기도에 대하여", "선행과 자선에 대하여" 같은 작품들은 영성서로도 큰 가치가 있습니다. 또한 그의 편지들은 3세기 교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이기도 해요. 당시 교회가 어떤 문제들과 씨름했는지, 어떻게 해결해 나갔는지를 생생하게 볼 수 있거든요.

성 치프리아노는 9월 16일 축일을 맞아 전 세계 가톨릭교회에서 공경받고 있습니다. 그는 특히 아프리카 교회의 수호성인이자, 모든 주교들의 모범으로 여겨져요. 그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진정한 지도자란 무엇인지,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세속의 성공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용기, 위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 그리고 마지막까지 양떼를 사랑하는 목자의 마음 - 이 모든 것이 그가 우리에게 남긴 소중한 유산입니다.

 

성 치프리아노 시대 주요 역사적 사건 연표

연도 사건 관련 인물/지역
200년경 치프리아노 출생 카르타고, 북아프리카
235-284년 로마제국 3세기 위기 로마제국 전역
246년경 치프리아노 회심 및 세례 카르타고
248년경 카르타고 주교 서임 치프리아노
249-251년 데키우스 박해 데키우스 황제, 전 제국
250년 치프리아노 피신 카르타고 교구
251-253년 배교자(라프시) 논쟁 북아프리카 교회
252년 "교회의 일치에 대하여" 저술 치프리아노
253-256년 이단 세례 논쟁 치프리아노 vs 교황 스테파노 1세
257-258년 발레리아누스 박해 발레리아누스 황제
258년 9월 14일 치프리아노 순교 카르타고 근교

참고 문헌 및 자료

  • 한국가톨릭대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 교부학 개론 (요하네스 크바스텐 저, 왜관성베네딕도수도원 출판부)
  • 초대교회사 (유세비우스 저, 은성 출판사)
  • 성인전 (가톨릭출판사)
  • 가톨릭 굿뉴스 (www.catholic.or.kr)
  • 바티칸 공식 웹사이트 (vatican.va)
  • New Advent Catholic Encyclopedia (newadvent.org)
  •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 논문집
  • 교부 문헌 연구 (분도출판사)

※ 본 글은 공개된 교회 문헌과 학술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개인적 묵상과 해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공식 가르침과 다를 수 있는 부분은 독자의 분별을 당부드립니다.

성 치프리아노 - 박해 시대를 이끈 카르타고의 위대한 목자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