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성인 열전 · 빈의 사도
나폴레옹이 유럽 지도를 다시 그리던 시대,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에서 홀로 신앙의 불씨를 지켜낸 한 사제의 이야기입니다.

제빵사 도제에서 사제로 – 가장 낮은 자리의 소명
성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Klemens Maria Hofbauer, 1751–1820). 오스트리아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아는 이름이지만, 한국에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성인입니다. 그런데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 이름이 얼마나 묵직한 울림을 담고 있는지 금세 느낄 수 있습니다. 1751년 12월 26일, 오스트리아와 모라비아(현 체코) 접경 지역의 작은 마을 타스빗츠(Tasswitz, 현 오파코)에서 태어난 클레멘스는 아홉 형제 중 하나였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가정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클레멘스는 생계를 위해 제빵사 도제로 일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성당을 찾았고, 사제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마음 깊이 품고 있었습니다.
그 열망이 처음 구체화된 것은 로마 순례 중이었습니다. 클레멘스는 두 차례에 걸쳐 걸어서 로마까지 순례를 감행했는데, 그 여정에서 알폰소 리구오리(St. Alphonsus Liguori)가 창립한 레뎀프토리스트회(Congregation of the Most Holy Redeemer, CSsR)를 만나게 됩니다. 레뎀프토리스트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특히 농촌의 민중 선교에 특화된 수도회였습니다. 클레멘스는 이 수도회의 정신에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했습니다. 1784년, 마침내 그는 로마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어린 시절의 꿈이 서른세 살이 되어서야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바로 그 늦은 출발이 오히려 그의 사도직을 더욱 열정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서품 직후 클레멘스는 바르샤바(현 폴란드)로 파견됩니다. 당시 폴란드는 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에 의해 분할된 직후로, 민족적 위기와 신앙적 혼란이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는 바르샤바의 성 베네딕토 성당을 거점으로 삼아, 폴란드어를 익히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며 민중 선교에 헌신했습니다. 고아원을 운영하고, 가난한 청년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했으며, 독일어권 이민자들을 위한 사목도 병행했습니다. 무려 20년에 가까운 시간을 바르샤바에서 보내며, 그는 레뎀프토리스트회 정신을 알프스 이북 전역에 뿌리내리게 한 핵심 인물이 되었습니다.
Historical Background
요제피즘과 나폴레옹 – 교회를 흔든 두 개의 폭풍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가 살았던 18~19세기 초반 유럽은 교회 역사에서도 가장 혹독한 시기 중 하나였습니다. 두 가지 거대한 흐름이 가톨릭 교회를 정면으로 압박했는데, 하나는 국가 주도의 교회 통제 정책인 요제피즘(Josephinism)이었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몰고 온 유럽 질서의 대격변이었습니다. 요제피즘은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재위 1780–1790)가 밀어붙인 계몽 절대주의 교회 정책으로, 교황청의 권위를 제한하고 수도원을 대거 해산하며 교회 예식과 교육까지 국가가 통제하려 했습니다. 이 정책은 오스트리아 가톨릭 교회의 영적 활력을 상당 부분 잠식했고, 많은 신자들이 신앙의 방향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알프스 이북 지역에서 레뎀프토리스트회의 수도적 삶을 심기 위해 이 땅에 보내졌습니다. 인간의 방해가 있어도, 하느님의 뜻은 관철될 것입니다."
— 성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 동료 수사에게 보낸 서한 중에서여기에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터지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혁명의 물결은 유럽 전역으로 번졌고, 나폴레옹은 1799년 집권 후 유럽 지도를 빠르게 재편했습니다. 1798년에는 프랑스 군대가 로마를 점령하고 교황 비오 6세를 포로로 끌어갔으며, 1809년에는 교황 비오 7세마저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납치 억류되었습니다. 교황권이 전례 없이 굴욕당하는 상황에서, 알프스 이북의 가톨릭 신자들은 정신적으로 크게 흔들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808년 나폴레옹은 클레멘스가 20년 가까이 뿌리내렸던 바르샤바에서 레뎀프토리스트회를 강제 추방했습니다. 클레멘스는 하루아침에 모든 사도직 기반을 잃고 빈으로 쫓겨나듯 이동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강제 이주'가 클레멘스의 삶에서 두 번째 전성기를 열었습니다. 빈은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이자, 유럽 지성과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요제피즘과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가톨릭 신앙이 피상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귀족과 지식인 계층 사이에서는 합리주의와 자유사상이 유행했고, 진지한 신앙 생활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치부되기도 했습니다. 클레멘스는 이 도시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직감했습니다.
Apostolate in Vienna
빈의 사도 – 귀족과 빈민, 지식인을 한자리에
성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 생애 핵심 연표
- 1751년 — 오스트리아-모라비아 접경 타스빗츠 출생
- 1770년대 — 로마 순례 두 차례 도보 감행, 레뎀프토리스트회 접촉
- 1784년 — 로마에서 레뎀프토리스트회 사제 서품
- 1787년 — 바르샤바 파견, 성 베네딕토 성당 거점으로 사도직 시작
- 1787–1808년 — 폴란드에서 학교·고아원 운영, 민중 선교 헌신
- 1808년 — 나폴레옹 명령으로 바르샤바 추방, 빈 이주
- 1809–1820년 — 빈에서 사도직, 지식인·귀족층 복음화
- 1820년 — 3월 15일 빈에서 선종 (향년 68세)
- 1820년 — 비오 7세 교황에 의해 시복
- 1909년 — 비오 10세 교황에 의해 시성
빈에 도착한 클레멘스는 우리 시대 마리아 성당(Mariastiege) 부속 사제관에 거처를 마련하고, 즉시 사도직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방식은 독특했습니다. 단순히 강론을 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살롱 문화를 활용했습니다. 당시 빈의 귀족과 지식인들은 살롱이라 불리는 소규모 지적 모임을 즐겼는데, 클레멘스는 이 문화 속으로 직접 들어갔습니다. 낭만주의 운동의 핵심 인물들—철학자 프리드리히 슐레겔, 시인 클레멘스 브렌타노, 역사학자 아담 뮐러 등이 그의 영향 아래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 신앙을 새롭게 했습니다. 한 사제가 개인적 만남과 대화만으로 빈의 문화 지형을 바꾸어 나간 것입니다.
사도직 기간
사도직 기간
동시에 클레멘스는 가난한 이들을 절대 잊지 않았습니다. 빈의 이민 노동자, 고아, 병자들을 위한 구체적인 도움을 이어갔습니다. 살롱에서 귀족과 신학 토론을 나누는 그 손으로, 길거리에서 굶주린 이들에게 빵을 나눠 주었습니다. 이처럼 그의 사도직은 계층의 경계를 가로질렀습니다. 지식인과 빈민, 귀족과 거리의 아이들이 모두 그의 관심 안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레뎀프토리스트회의 창립 정신—'가장 버림받은 이들에 대한 선교'—을 빈이라는 도시 맥락에 맞게 재해석한 결과였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는 빈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Spirituality & Order
레뎀프토리스트회 – 가장 버림받은 이들 곁으로
레뎀프토리스트회(CSsR)란?
1732년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St. Alphonsus Liguori)가 이탈리아 나폴리 근교 스칼라에서 창립한 남자 수도회입니다. 공식 명칭은 '지극히 거룩한 구원자 수도회(Congregatio Sanctissimi Redemptoris)'이며, 약칭 CSsR 또는 레뎀프토리스트(Redemptorist)로 불립니다. 창립 정신은 "가장 버림받은 이들"—농촌 빈민, 소외 계층—을 향한 복음 선교입니다. 성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는 이 수도회를 알프스 이북 지역에 처음으로 정착시킨 인물로, 수도회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현재 전 세계 80여 개국에서 활동 중입니다.
클레멘스의 영성은 알폰소 리구오리의 정신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중부 유럽의 사회·문화적 맥락에 맞게 발전시킨 것이었습니다. 알폰소가 남부 이탈리아의 농촌 빈민을 대상으로 했다면, 클레멘스는 도시화가 진행되는 제국의 수도에서 새로운 형태의 영적 빈곤—합리주의와 세속화로 인한 신앙 상실—에 맞서야 했습니다. 그는 이 도전에 응하기 위해 지식인들과의 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학문과 신앙이 대립하지 않음을 삶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이 점에서 그는 단순한 사목자를 넘어, 가톨릭 지성 부흥의 촉매 역할을 했습니다.
클레멘스가 빈에서 보낸 12년은 그 자체로 기적이었습니다. 당시 요제피즘의 잔재와 나폴레옹 패망 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오스트리아 정부는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레뎀프토리스트회가 오스트리아에서 공식 허가를 받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클레멘스는 법적으로 불안정한 지위 속에서도 활동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추방 위기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는 빈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820년 3월 15일, 레뎀프토리스트회의 오스트리아 공식 인가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지 나흘 만에 선종했습니다. 마치 자신의 생애 마지막 과업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Canonization & Legacy
시성,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말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는 선종한 해인 1820년, 비오 7세 교황에 의해 이례적으로 빠르게 복자 품에 올랐습니다. 그만큼 그의 성덕이 이미 살아 있는 동안에도 널리 인정받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후 1909년, 비오 10세 교황이 그를 성인으로 시성하면서 동시에 빈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오스트리아 가톨릭 교회는 이를 큰 축제로 기념했고, 오늘날까지도 3월 15일 그의 축일에는 빈 대교구 전체가 특별한 전례로 그를 기억합니다.
오늘날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시대적 맥락에서 특히 선명합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합리주의, 세속화, 정치적 혁명이 교회를 사면에서 압박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지적으로 낙후된 행위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클레멘스는 신앙을 변호하는 데 지성을 사용했고, 가난한 이들 곁에 서는 데 두 발을 사용했습니다. 머리와 손발이 같은 방향을 가리켰습니다. 이 통합된 삶의 방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신앙인의 모델입니다.
혹시 지금 신앙과 이성 사이에서, 혹은 종교적 삶과 현실적 삶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고 계신가요?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의 이야기는 그 둘이 결코 모순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제빵사 도제에서 시작한 한 인간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시작해서, 제국의 수도를 변화시키고, 세계적 수도회를 새로운 땅에 뿌리내렸습니다. 그 모든 것의 비결은 단 하나였습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 지금 이 순간의 사도직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 그것이 호프바우어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단순하고도 깊은 유산입니다.
📋 역사적 사건 연표 –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 생애와 세계사
| 연도 | 구분 | 사건 내용 |
|---|---|---|
| 1751년 | 클레멘스 | 12월 26일, 오스트리아-모라비아 접경 타스빗츠(현 오파코) 출생. 9남매 중 하나로 빈곤 속에서 성장. |
| 1751년 | 세계사 | 프랑스 백과전서(Encyclopédie) 첫 권 출판. 계몽주의 사상 본격 확산. 유럽 지성계 탈종교 흐름 시작. |
| 1773년 | 교회 | 클레멘스 14세 교황, 예수회 해산 칙령 발표(Dominus ac Redemptor). 가톨릭 교육·선교 큰 타격. |
| 1780년 | 세계사 |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 즉위. 요제피즘 본격화—수도원 700여 곳 강제 해산, 교회 국가 통제. |
| 1784년 | 클레멘스 | 로마에서 레뎀프토리스트회 사제 서품. 알프스 이북 선교를 자원하여 바르샤바 파견. |
| 1787년 | 클레멘스 | 바르샤바 성 베네딕토 성당 거점 사도직 시작. 독일어·폴란드어 신자 대상 학교·고아원 설립. |
| 1789년 | 세계사 | 프랑스 대혁명 발발. 반교회적 혁명 정신 유럽 전파. 성직자 시민 헌법 강제로 교회 내 갈등 심화. |
| 1793년 | 세계사 | 폴란드 2차 분할. 바르샤바 정치·사회 혼란 극에 달함. 클레멘스, 위협 속에서도 사도직 지속. |
| 1798년 | 교회 | 프랑스군 로마 점령. 교황 비오 6세 포로로 납치, 1799년 프랑스에서 선종. 교황권 최대 위기. |
| 1799년 | 세계사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쿠데타(18 브뤼메르). 통령 정부 수립 후 유럽 재편 본격화. |
| 1801년 | 교회 | 나폴레옹-교황청 정교협약(Concordat) 체결. 프랑스 내 가톨릭 교회 지위 부분 회복. |
| 1804년 | 세계사 | 나폴레옹 황제 즉위. 비오 7세 대관식 참석. 유럽 지도 빠르게 재편. 합스부르크 제국 압박 증대. |
| 1806년 | 세계사 | 신성로마제국 공식 해체. 프란츠 2세, 오스트리아 황제로 퇴위. 중부 유럽 정치 질서 대격변. |
| 1808년 | 클레멘스 | 나폴레옹 명령으로 바르샤바 레뎀프토리스트회 강제 추방. 클레멘스, 20년 기반을 잃고 빈으로 이주. |
| 1809년 | 교회 | 나폴레옹, 교황 비오 7세 납치 억류. 교황령 해체 선언. 가톨릭 교회 존폐 기로에 서다. |
| 1809년 | 클레멘스 | 빈 우리 시대 마리아 성당 중심으로 사도직 시작. 낭만주의 지식인들과 신앙 대화, 개종자 다수 탄생. |
| 1814년 | 세계사 | 나폴레옹 1차 퇴위. 빈 회의 개최(1814~1815). 메테르니히 주도 유럽 구질서 복원. 교황령 회복. |
| 1815년 | 세계사 | 워털루 전투, 나폴레옹 최종 패배. 빈 체제 확립. 오스트리아 중심 보수 유럽 질서 재편. |
| 1820년 | 클레멘스 | 레뎀프토리스트회 오스트리아 공식 인가 소식 접한 지 나흘 뒤, 3월 15일 빈에서 선종. 향년 68세. |
| 1820년 | 교회 | 비오 7세 교황,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를 복자(Blessed)로 선포. 이례적 신속 시복. |
| 1909년 | 교회 | 비오 10세 교황, 클레멘스를 성인으로 시성. 동시에 빈(Wien)의 수호성인으로 공식 선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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