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 후반, 한 학자가 베들레헴의 동굴 수도원에서 평생을 바쳐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히에로니무스, 서방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경학자이자 교회학자입니다. 그가 번역한 불가타 성경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가톨릭 교회의 공식 성경으로 사용되었으며, 서방 그리스도교 문명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모든 성경 번역의 뿌리에는 히에로니무스의 헌신과 학문적 엄밀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히에로니무스의 생애와 회심
히에로니무스는 347년경 달마티아 지방의 스트리돈에서 부유한 그리스도교 가정에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에우세비우스 소프로니우스 히에로니무스였으며,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지적 능력을 보였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고전 문학과 수사학을 공부했으며, 키케로와 베르길리우스를 비롯한 라틴 고전 작가들의 작품에 깊이 심취했습니다. 젊은 시절 히에로니무스는 세속적 학문에 몰두했지만, 성령의 이끄심으로 점차 그리스도교 신앙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는 366년경 로마에서 세례를 받았고, 이후 갈리아와 아퀼레이아를 여행하며 영적 동반자들과 교류했습니다. 374년 히에로니무스는 동방으로 순례를 떠났고, 시리아 사막의 칼키스에서 은수자로 살며 금욕적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꿈속에서 그리스도께 꾸짖음을 받는 강렬한 체험을 했는데, 주님께서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키케로주의자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 체험은 히에로니무스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고, 그는 이후 평생을 성경 연구와 교회 봉사에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막에서 그는 히브리어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이는 훗날 구약성경을 원어에서 직접 번역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교황 다마소와 성경 번역 시작
382년 히에로니무스는 로마로 돌아와 교황 다마소 1세의 비서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교황 다마소는 히에로니무스의 학식과 언어 능력을 높이 평가했으며, 당시 서방 교회에서 사용되던 여러 라틴어 성경 번역본들의 혼란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당시 라틴어로 된 성경은 베투스 라티나 또는 고 라틴어 성경이라 불리는 다양한 번역본들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그리스어 칠십인역 성경을 기반으로 번역되었으며 번역의 질이 일정하지 않았고 오역도 많았습니다. 교황 다마소는 히에로니무스에게 성경을 새롭게 번역하거나 수정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히에로니무스는 먼저 복음서부터 작업을 시작했는데, 그는 그리스어 원문과 기존의 라틴어 번역들을 비교하며 신중하게 개정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383년경 그는 네 복음서의 개정판을 완성했고, 이어서 시편을 번역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칠십인역을 기준으로 시편을 번역했지만, 나중에 히브리어 원문에서 직접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교황 다마소가 384년에 선종한 후, 히에로니무스는 로마의 정치적 분위기가 자신에게 불리해지자 동방으로 다시 떠났습니다. 385년 그는 귀부인 성녀 파울라와 그녀의 딸 에우스토키움의 후원을 받아 베들레헴에 정착했고, 이곳에서 그의 가장 위대한 성업인 불가타 성경 번역을 완성하게 됩니다.
베들레헴에서의 번역 작업과 학문적 엄밀함
베들레헴에 정착한 히에로니무스는 구세주 탄생지 근처의 동굴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하며 성경 번역에 전념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기존 번역을 개정하는 수준을 넘어, 구약성경을 히브리어 원문에서 직접 라틴어로 번역하는 혁명적인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대담한 결정이었는데, 초대 교회 이래 칠십인역 그리스어 번역이 권위 있는 성경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히에로니무스는 유대인 학자들에게서 히브리어와 성경 해석을 배웠으며, 오리게네스의 헥사플라와 같은 다양한 학문적 자료들을 참고했습니다. 그는 389년부터 405년까지 약 15년간 구약성경 전체를 번역했는데,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오경을 시작으로, 역사서, 지혜서, 예언서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히에로니무스의 번역은 문자적 정확성과 문체의 우아함을 동시에 추구했습니다. 그는 원문의 의미를 충실히 전달하면서도, 라틴어의 문학적 품격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그의 번역 원칙은 "단어 대 단어가 아니라 의미 대 의미로 번역한다"는 것이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번역학의 기본 원칙으로 여겨집니다. 번역 작업 중에 히에로니무스는 많은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일부 교부들은 전통적인 칠십인역을 버리고 히브리어에서 직접 번역하는 것에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그러나 히에로니무스는 원문으로 돌아가는 것이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했고, 자신의 작업을 끝까지 완수했습니다.
불가타 성경의 구성과 특징
히에로니무스의 번역 작업이 완성되면서 오늘날 불가타로 알려진 라틴어 성경이 탄생했습니다. 불가타는 "일반적인" 또는 "대중적인"이라는 뜻의 라틴어 불가투스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이 성경이 서방 교회에서 널리 사용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불가타 성경은 구약 46권과 신약 27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히에로니무스가 직접 히브리어에서 번역한 구약 정경과, 그가 개정한 복음서 및 신약 서간들, 그리고 후대에 포함된 일부 제2경전을 포함합니다. 히에로니무스는 토빗기, 유딧기,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마카베오기 상하권과 같은 제2경전에 대해서는 정경성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이 책들도 불가타 전통 안에 포함되었습니다. 불가타의 문체적 특징은 명료성과 간결성입니다. 히에로니무스는 고전 라틴어의 우아함을 추구하면서도, 일반 신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언어를 사용하려 노력했습니다. 그의 번역은 시적인 부분에서는 리듬감 있고 아름다우며, 법적이거나 역사적 부분에서는 정확하고 명확합니다. 특히 시편의 번역은 전례에서 노래하기에 적합한 음악적 특성을 지니고 있어, 중세 내내 수도원의 성무일도에서 애창되었습니다. 불가타는 또한 신학적으로도 중요한 기여를 했는데, 많은 교리적 용어들이 히에로니무스의 번역에서 확립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은총"을 의미하는 그라티아, "성사"를 의미하는 사크라멘툼과 같은 용어들이 불가타를 통해 서방 신학의 표준 어휘가 되었습니다.
불가타의 역사적 영향과 교회의 승인
히에로니무스가 405년경 번역을 완성한 후, 불가타는 점차 서방 교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전통적인 고 라틴어 성경에 익숙한 사람들의 저항이 있었지만, 불가타의 우수성이 인정되면서 6세기경부터 서방 교회의 표준 성경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불가타를 교회의 공식 성경으로 사용했으며, 중세 내내 모든 신학 연구와 전례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불가타는 중세 유럽 문명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수도원의 스크립토리움에서 수사들이 손으로 필사한 불가타 성경 사본들은 유럽 전역에 퍼졌고, 성경의 내용과 사상이 중세 문학, 예술, 철학, 법률에 스며들었습니다. 단테의 신곡,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비롯한 중세의 위대한 저작들은 모두 불가타 성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15세기 구텐베르크가 활판인쇄술을 발명했을 때, 최초로 인쇄된 책이 바로 불가타 성경이었습니다. 1455년 완성된 구텐베르크 성경은 인쇄술의 혁명적 힘을 보여주었고, 성경을 더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에 개신교 개혁자들은 원어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며 불가타의 권위에 도전했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가톨릭 교회는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불가타를 교회의 공식적이고 정통적인 라틴어 성경으로 선포했습니다. 공의회는 불가타가 오랜 사용으로 검증되었으며 신앙과 도덕에 관한 문제에서 오류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현대의 불가타와 히에로니무스의 유산
20세기 들어 성경학의 발전과 새로운 고대 사본들의 발견으로 불가타 성경도 개정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1907년 교황 비오 10세는 불가타 성경의 비판적 개정을 명령했고, 1979년 신 불가타 성경이 완성되었습니다. 신 불가타는 히에로니무스의 원래 번역을 기초로 하되, 현대 성경학의 연구 성과와 더 나은 사본들을 반영하여 개정한 것입니다. 이 신 불가타는 현재 가톨릭 교회의 공식 라틴어 성경으로 사용되며, 특히 로마 전례서와 성무일도의 성경 본문은 신 불가타를 기준으로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는 각 나라의 언어로 된 성경 번역을 장려했지만, 라틴어 불가타는 여전히 권위 있는 기준 본문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히에로니무스의 유산은 단순히 성경 번역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성경 주석서를 집필하여 성경 해석학의 토대를 놓았으며, 수많은 서간을 통해 영성 지도와 신학적 논쟁에 참여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교부 문학의 보고이며, 서방 교회 사상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히에로니무스를 교회학자로 공경하며, 그의 축일인 9월 30일을 기념합니다. 그는 번역가, 학자, 성경학자, 사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경을 연구하고 번역하는 모든 이들은 히에로니무스의 학문적 엄밀함과 헌신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그의 유명한 말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는 오늘날에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경 읽기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성 히에로니무스와 불가타 성경 관련 주요 역사적 사건
| 연도 | 사건 | 의미 |
|---|---|---|
| 347년 | 히에로니무스 출생 (달마티아 스트리돈) | 위대한 성경학자의 탄생 |
| 366년 | 히에로니무스 로마에서 세례 받음 | 그리스도교 신앙의 시작 |
| 374년 | 시리아 칼키스 사막에서 은수 생활 | 히브리어 학습 시작 |
| 379년 | 안티오키아에서 사제 서품 | 성직자로서의 사명 시작 |
| 382년 | 로마 귀환, 교황 다마소 1세의 비서 | 성경 번역 작업 시작 |
| 383년 | 네 복음서 개정판 완성 | 신약성경 번역의 첫 결실 |
| 384년 | 교황 다마소 1세 선종 | 히에로니무스의 로마 시대 종료 |
| 385년 | 베들레헴 정착, 수도원 설립 | 본격적인 구약성경 번역 착수 |
| 389-405년 | 구약성경 히브리어 원문에서 라틴어로 번역 | 불가타 성경의 핵심 작업 기간 |
| 392-393년 | 오경 번역 완성 | 구약 번역의 기초 확립 |
| 398년 | 역사서 번역 완성 | 구약 역사서의 라틴어 정본 완성 |
| 405년 | 구약 예언서 번역 완성, 불가타 완결 | 15년간의 대역사 완수 |
| 410년 | 로마 함락 소식 전해짐 | 서로마 제국 쇠퇴기의 불안 |
| 420년 9월 30일 | 히에로니무스 베들레헴에서 선종 | 성경학자의 생애 마감 |
| 6세기 | 불가타 서방 교회의 표준 성경으로 확립 | 교회 전례와 신학의 기초 |
| 1455년 | 구텐베르크, 불가타 성경 최초 인쇄 | 인쇄술 혁명과 성경 보급 |
| 1546년 | 트리엔트 공의회, 불가타를 공식 성경으로 선포 | 가톨릭 교회의 공식 승인 |
| 1907년 | 교황 비오 10세, 불가타 비판적 개정 명령 | 현대 성경학 반영한 개정 시작 |
| 1979년 | 신 불가타 성경 공포 | 현대판 공식 라틴어 성경 완성 |
참고문헌 및 참고자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성경의 이해』, 2005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경 번역의 역사』, 가톨릭출판사, 2010
- 교황청 성서위원회, 『교회 안의 성경 해석』,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2
- J. N. D. 켈리, 『초기 그리스도교 교리사』, 분도출판사, 2002
- 베네딕토 16세, 『교부들』, 바오로딸, 2008
- 가톨릭백과사전 (http://www.casuwp.org)
- 바티칸 공식 웹사이트 (https://www.vatican.va)
- 한국가톨릭사전 온라인 (https://maria.catholic.or.kr)
- 가톨릭 평화신문 자료실 (http://www.cpbc.co.kr)
'6. 세계사와 함께 보는 가톨릭'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성녀 모니카와 가정의 신앙: 끝없는 기도로 아들을 구한 어머니 (1) | 2025.12.21 |
|---|---|
|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설교와 영성: 황금의 입을 가진 교부 (0) | 2025.12.20 |
|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와 신경 확립: 삼위일체 신앙의 완성 (0) | 2025.12.17 |
|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 논쟁: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킨 위대한 투쟁 (0) | 2025.12.16 |
| 니케아 공의회와 삼위일체 교리 –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확립 (2) | 2025.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