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 초, 로마 제국 전역을 뒤흔든 신학 논쟁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연 성부 하느님과 동등한 신성을 지니셨는가, 아니면 피조물에 불과한가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었습니다. 이 논쟁의 중심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와 그에 맞서 정통 신앙을 수호한 아타나시우스 주교가 있었습니다. 이들의 대립은 단순한 신학적 토론을 넘어 교회의 정체성과 신앙의 본질을 결정하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아리우스 이단의 등장과 그 위험성
알렉산드리아의 사제였던 아리우스는 서기 318년경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며, 따라서 하느님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리우스는 "성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라는 유명한 문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의 피조물로 격하시켰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헬레니즘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유일하고 초월적인 하느님과 물질 세계 사이에 중간 존재를 상정하는 플라톤 철학의 영향이 컸습니다. 아리우스의 가르침은 표면적으로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많은 주교들과 신자들이 그의 주장에 동조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동방 교회 지역에서 아리우스주의는 빠르게 확산되었고, 교회는 심각한 분열의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단순한 피조물에 불과하다면, 우리의 구원은 불완전한 것이 되며, 성육신과 구속의 교리 전체가 무너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의 정통 신앙 수호
아리우스의 이단 사상에 맞서 정통 가톨릭 신앙을 지킨 인물이 바로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주교입니다. 그는 젊은 부제 시절부터 아리우스의 오류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니케아 공의회에서 알렉산드로스 주교를 보좌하며 정통 교리를 옹호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같은 본질"을 지니신다는 호모우시오스 교리를 확고히 주장했습니다. 그는 만약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하느님이 아니시라면, 인간은 진정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느님만이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은 성경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특히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이 하느님이셨다"는 구절과 필리피서 2장의 그리스도 찬가를 근거로 삼았습니다. 그는 또한 초대 교회의 전승과 사도들의 가르침이 항상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증거해왔다고 역설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단순히 이론적인 신학자가 아니라, 자신의 신앙을 위해 목숨을 건 순교자적 증인이었습니다.
니케아 공의회와 역사적 결단
아리우스 논쟁이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자,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25년에 소아시아 니케아에서 역사상 최초의 보편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약 300명 이상의 주교들이 모였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시기에 고문과 순교를 경험한 증거자들이었습니다. 공의회는 격렬한 논쟁 끝에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성자께서 성부와 "같은 본질"이라는 니케아 신경을 선포했습니다. 이 신경은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 나시고 창조되지 않으시고, 성부와 한 본질이시며"라는 명확한 표현으로 정통 교리를 정의했습니다.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교회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었으며, 이후 모든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의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고, 이후 수십 년간 교회 내에서 계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습니다. 특히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후계자들 중 일부가 아리우스주의를 지지하면서 정통 신앙은 다시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의 박해와 유배
니케아 공의회 이후 아타나시우스는 328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선출되었지만, 그의 주교직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아리우스주의자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황제들의 압력으로 인해 아타나시우스는 무려 다섯 차례나 유배를 당했습니다. 그는 총 46년의 주교직 기간 중 17년을 유배지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336년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트리어로 유배되었고, 339년에는 로마로 피신했으며, 356년에는 사막의 수도자들 사이에 은신해야 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했던 교황들과 서방 교회는 그의 정당성을 옹호했지만, 동방의 많은 주교들은 황제의 압력에 굴복하거나 아리우스주의에 동조했습니다. 특히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는 열렬한 아리우스주의 지지자였으며, 정통 신앙을 고수하는 주교들을 조직적으로 박해했습니다. 이 시기에 아타나시우스는 "온 세상이 아리우스주의자가 되었다"고 탄식했지만, 결코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배 기간 동안에도 끊임없이 저술 활동을 계속하며 정통 교리를 변호했고, 특히 수도 생활의 아버지인 성 안토니오의 전기를 집필하여 수도 영성을 전 교회에 전파했습니다.
최종 승리와 신앙의 유산
361년 율리아누스 황제가 즉위하면서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이교도 황제였던 율리아누스는 곧 그를 다시 추방했습니다. 그러나 363년 율리아누스가 전사하고 요비아누스 황제가 즉위하면서 상황은 호전되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마침내 알렉산드리아로 영구 귀환할 수 있었고, 373년 5월 2일 선종할 때까지 자신의 양떼를 돌보았습니다. 그의 끈질긴 투쟁과 신앙의 증거는 결국 승리했습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니케아 신경을 재확인하고 보완했으며, 성령의 신성도 명확히 선언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은 동서방 교회 모두에서 정통 교리로 확립되었고, 삼위일체 교리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아타나시우스를 교회학자로 공경하며, 그의 축일을 5월 2일에 기념합니다. 그는 "믿음의 기둥"이라 불리며, 수많은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진리를 굽히지 않은 위대한 증거자로 기억됩니다.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의 논쟁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진리를 위해 싸우는 용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줍니다.
4세기 아리우스 논쟁 관련 주요 역사적 사건
| 연도 | 사건 | 의미 |
|---|---|---|
| 318년 | 아리우스, 그리스도의 신성 부정 주장 시작 | 아리우스 논쟁의 발단 |
| 321년 | 알렉산드리아 시노드에서 아리우스 파문 | 지역 교회 차원의 첫 대응 |
| 325년 | 니케아 공의회 개최 (제1차 보편 공의회) | 아리우스주의 단죄, 니케아 신경 선포 |
| 328년 | 아타나시우스, 알렉산드리아 주교 선출 | 정통 신앙 수호자의 사목 시작 |
| 335년 | 티레 시노드, 아타나시우스 불법 단죄 |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정치적 승리 |
| 336년 | 아타나시우스 첫 번째 유배 (트리어) | 박해의 시작 |
| 337년 | 콘스탄티누스 대제 사망 | 제국의 분할과 종교 정책 변화 |
| 339년 | 아타나시우스 두 번째 유배 (로마) | 동서방 교회의 입장 차이 심화 |
| 341년 | 안티오키아 공의회, 아리우스주의 옹호 | 동방 교회의 아리우스주의 확산 |
| 343년 | 사르디카 공의회 | 서방 교회의 아타나시우스 지지 확인 |
| 356년 | 아타나시우스 세 번째 유배 (이집트 사막) | 가장 긴 유배 기간 시작 |
| 361년 | 율리아누스 황제 즉위, 일시 귀환 | 이교 부흥 정책 속 혼란기 |
| 362년 | 알렉산드리아 시노드 개최 |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 |
| 363년 | 아타나시우스 최종 귀환 | 박해의 종결 |
| 373년 | 아타나시우스 선종 (5월 2일) | 신앙의 증거자 생애 마감 |
| 381년 |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제2차 보편 공의회) | 니케아 신경 재확인, 삼위일체 교리 완성 |
참고문헌 및 참고자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가톨릭 교회 교리서』, 2003
- 한국교회사연구소, 『초대 교회사』, 분도출판사, 1987
- 베네딕토 16세, 『교부들』, 바오로딸, 2008
- 가톨릭백과사전 (http://www.casuwp.org)
- 바티칸 공식 웹사이트 (https://www.vatican.va)
- 가톨릭 평화신문 자료실 (http://www.cpbc.co.kr)
- 한국가톨릭사전 온라인 (https://maria.cathol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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