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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밀라노 칙령 – 그리스도교 공인의 결정적 전환점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5.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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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의 시대와 콘스탄티누스의 등장

3세기 후반 로마 제국은 깊은 위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사두정치 체제를 도입했습니다. 제국을 동서로 나누고 각각 정제와 부제를 두어 네 명의 통치자가 공동으로 다스리는 체제였습니다. 그러나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퇴위한 후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 군사 지도자들이 황제의 자리를 놓고 경쟁했고 제국은 다시 내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콘스탄티누스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그는 서방 부제였던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아들로 306년 아버지가 브리타니아에서 사망하자 군대의 지지를 받아 황제로 추대되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는 여섯 명의 황제 혹은 황제 후보자가 있었고 각자 정통성을 주장하며 대립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정치적 수완으로 하나씩 경쟁자들을 제거해 나갔습니다. 그의 운명을 결정지은 순간은 312년 로마 성문 앞 밀비우스 다리에서 벌어진 전투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밀라노 칙령 – 그리스도교 공인의 결정적 전환점

밀비우스 다리의 환시와 역사적 승리

312년 10월 콘스탄티누스는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막센티우스와 최후의 대결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막센티우스는 로마 시를 장악하고 있었고 훨씬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전투 전날 콘스탄티누스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하늘에서 십자가 표시와 함께 이것으로 승리하라는 글자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날 밤 꿈에서 그리스도가 나타나 병사들의 방패에 그리스도의 이름 첫 두 글자를 표시하라고 명령했다고 전해집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지시를 따랐고 다음 날 밀비우스 다리에서 막센티우스 군대와 격돌했습니다. 전투는 콘스탄티누스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습니다. 막센티우스는 다리가 무너지면서 테베레 강에 빠져 익사했고 그의 군대는 궤멸되었습니다. 이 승리로 콘스탄티누스는 서방 전체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 승리를 그리스도교의 신이 내려준 것으로 해석했고 이후 그리스도교에 대한 우호적인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이 순전히 종교적 체험에서 비롯되었는지 아니면 정치적 계산도 포함되었는지는 역사가들 사이에 논쟁거리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이 그리스도교와 서양 문명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밀라노 칙령의 탄생과 내용

313년 2월 콘스탄티누스는 동방의 공동 황제 리키니우스와 밀라노에서 만났습니다. 두 황제는 제국의 종교 정책에 관한 합의문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바로 밀라노 칙령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공식적인 법령이라기보다는 동방 총독들에게 보낸 훈령의 형태였습니다. 칙령의 핵심 내용은 모든 사람에게 종교의 자유를 부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신앙을 실천할 수 있도록 보장했습니다. 또한 과거 박해 시기에 몰수당했던 교회의 재산과 예배 장소를 돌려주도록 명령했습니다. 개인이 구입한 경우에는 보상을 해주되 교회 재산은 반드시 반환되어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밀라노 칙령은 단순히 그리스도교를 관용하는 수준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조치들을 포함했습니다. 이전의 갈레리우스 관용 칙령이 소극적으로 박해를 중단한 것과 달리 밀라노 칙령은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 내의 완전히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했습니다. 이는 약 250년간 지속되어 온 박해의 시대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그리스도교 지원 정책

밀라노 칙령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했습니다. 성직자들에게 세금 면제와 법정 소송 면제 특권을 부여했고 주교들에게 민사 재판권을 인정했습니다. 교회 건축에 막대한 재정을 지원했으며 로마의 라테란 궁전을 교황에게 하사했습니다. 성지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도 대성당 건축을 명령했습니다. 그의 어머니 성녀 헬레나는 예루살렘을 순례하며 성십자가를 발견했다고 전해지며 성묘 교회 건립을 후원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일요일을 공휴일로 지정했고 검투사 경기를 금지했으며 십자가형을 폐지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들은 그리스도교적 가치관을 로마 제국의 법률과 제도에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324년 리키니우스를 물리치고 제국 전체의 단독 황제가 된 후에는 더욱 적극적인 정책을 펼쳤습니다. 새로운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건설하면서 이교 신전이 아닌 그리스도교 성당들로 도시를 장식했습니다. 이는 로마 제국의 정체성이 전통적인 이교에서 그리스도교로 전환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을 사도들과 동등한 위치로 여겼으며 교회의 보호자이자 감독자로 자처했습니다.

니케아 공의회와 교리의 정립

박해가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지만 교회 내부에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주장을 펼쳐 교회가 분열되었습니다. 아리우스는 성자 그리스도가 성부 하느님보다 열등한 피조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에 맞서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드로와 부제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진 참 하느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논쟁이 격화되어 교회 전체가 흔들리자 콘스탄티누스는 직접 개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325년 소아시아의 니케아에서 전 세계 주교들을 소집하여 공의회를 개최했습니다. 약 300명의 주교가 참석한 이 회의는 교회 역사상 최초의 보편 공의회였습니다. 많은 주교들은 최근까지 박해를 받았던 순교자들과 증거자들이었습니다. 공의회는 격렬한 신학적 논쟁 끝에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단죄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본질이시며 참 하느님이시라는 내용을 담은 니케아 신경을 공포했습니다. 이 신경은 오늘날까지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 대부분의 개신교에서 신앙 고백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공의회 결정을 제국법으로 뒷받침했고 아리우스파를 추방했습니다. 이로써 황제가 교회의 교리 문제에 직접 개입하는 선례가 만들어졌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세례와 죽음

콘스탄티누스는 평생 그리스도교를 후원했지만 정작 세례는 늦게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세례 후 지은 죄를 용서받기 어렵다는 믿음이 있어 임종 직전에 세례를 받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또한 황제로서 전쟁과 처형 등 피할 수 없는 폭력을 행사해야 했기에 세례를 미루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337년 5월 콘스탄티누스는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병에 걸렸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근처 니코메디아로 옮겨진 그는 임종을 앞두고 마침내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리우스파 주교 에우세비우스가 세례를 집전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그가 말년에 아리우스파에 우호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세례 후 콘스탄티누스는 흰 세례복을 입은 채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사도 성당에 안치되었으며 그는 사도들과 동등한 위치로 여겨졌습니다. 동방 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며 이사도라는 칭호를 붙입니다. 서방 가톨릭 교회는 그를 공식 성인으로 시성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역할을 높이 평가합니다. 콘스탄티누스의 유산은 복잡합니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박해에서 구했고 제국의 공식 종교로 만들었습니다. 동시에 교회와 국가의 밀접한 관계라는 문제적 유산도 남겼습니다.

밀라노 칙령이 교회에 미친 영향

밀라노 칙령은 교회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우선 가장 즉각적인 변화는 공개적인 예배가 가능해진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카타콤바나 개인 가정에 숨어서 미사를 드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대규모 성당이 건축되었고 전례가 더욱 장엄하게 발전했습니다. 교회는 막대한 재산과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고 사회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사회적 이익이 되자 개종자들이 급증했습니다. 4세기 말에 이르면 로마 제국 인구의 절반 이상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급속한 성장은 부작용도 가져왔습니다. 순교 시대의 순수한 신앙심이 약화되었고 형식적인 신자들이 증가했습니다. 교회는 부와 권력을 얻었지만 복음의 가난과 겸손이라는 이상과는 멀어졌습니다. 일부 신자들은 세속화된 교회를 떠나 사막으로 가서 수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집트의 안토니우스와 파코미우스 시리아의 시므온 등이 대표적입니다. 수도원 운동은 콘스탄티누스 이후 세속화된 교회 안에서 복음적 순수성을 지키려는 노력이었습니다. 또한 황제가 교회 문제에 깊이 관여하면서 교회의 독립성이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훗날 동방에서는 황제교황주의로 서방에서는 교황과 황제의 권력 투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

콘스탄티누스와 밀라노 칙령의 역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교회가 사회적 권력과 영향력을 가지는 것이 반드시 긍정적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박해 시대 교회는 가난하고 약했지만 신앙은 순수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교회는 부유하고 강력해졌지만 세속화의 위험에 직면했습니다. 이는 모든 시대 교회가 직면하는 근본적 긴장입니다.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영향력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그 영향력이 교회를 타락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와 정치 권력의 관계에 대한 질문도 제기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를 도왔지만 동시에 교회를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현대에도 많은 나라에서 종교와 정치의 관계가 논쟁거리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종교 자유를 강조하며 어떤 종교도 국가 권력에 의해 강요되거나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밀라노 칙령의 진정한 유산은 단순히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것이 아니라 종교의 자유라는 원칙을 천명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강요나 박해 없이 양심에 따라 신앙을 선택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 원칙은 현대 인권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콘스탄티누스의 시대로부터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진정한 개종이란 무엇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콘스탄티누스와 밀라노 칙령 관련 주요 사건 연표

연도 역사적 사건 의미와 영향
272년경 콘스탄티누스 출생 나이수스에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아들로 태어남
285년 디오클레티아누스 사두정치 체제 수립 제국을 4명의 통치자가 분할 통치
303-311년 디오클레티아누스 대박해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 시기
306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즉위 아버지 사후 군대의 추대로 서방 부제가 됨
311년 갈레리우스 관용 칙령 박해 중단과 그리스도인에 대한 제한적 관용
312년 10월 28일 밀비우스 다리 전투 십자가 환시 후 막센티우스 격파, 서방 통일
313년 2월 밀라노 칙령 발표 그리스도교 공식 공인, 종교의 자유 보장
313년 라테란 궁전 교황에게 하사 교황청의 첫 공식 거처 마련
321년 일요일 공휴일 지정 그리스도교적 가치의 제도화 시작
324년 리키니우스 격파, 제국 통일 콘스탄티누스 단독 황제, 동방까지 지배
325년 니케아 공의회 개최 아리우스 이단 단죄, 니케아 신경 선포
326년 성녀 헬레나 성지 순례 성십자가 발견 전승, 성묘 교회 건립
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 그리스도교 도시로 설계된 새 수도 건설
337년 5월 22일 콘스탄티누스 세례와 서거 임종 직전 세례, 사도 성당에 안치
380년 테살로니카 칙령 테오도시우스 황제, 그리스도교 국교화

참고 문헌 및 참고 사이트

  • 유세비우스,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은성출판사
  • 유세비우스, 교회사, 은성출판사
  • 락탄티우스, 박해자들의 죽음에 관하여
  • 폴 베인, 콘스탄티누스는 왜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는가
  • 피터 브라운, 고대 말기의 세계 연구
  •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홈페이지 (www.cbck.or.kr)
  • 바티칸 공식 웹사이트 (www.vatican.va)
  • 가톨릭 굿뉴스 (www.catholic.or.kr)
  • 분도출판사 교회사 시리즈
  • 교부 문헌 연구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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