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번역된 책 중 하나로, 그 번역 과정에서 수많은 문화적 도전과 언어적 장벽을 마주했습니다. 초기 천주교회가 성경을 여러 언어로 번역하면서 직면했던 문화적 차이는 단순한 언어 변환의 문제를 넘어서, 신학적 해석과 교회 전승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번역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천주교 교리와 전례에 중요한 토대가 되고 있습니다.
기원전 3세기경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된 셉투아긴타 번역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옮긴 최초의 대규모 번역 작업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번역자들은 히브리 문화권의 개념들을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적응시켜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 '야훼'를 그리스어 '키리오스'로 번역하면서 단순한 언어 변환을 넘어 신학적 의미의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초기 번역들은 각 지역의 문화적 맥락 속에서 성경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으며, 동시에 번역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해석적 선택들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이기도 합니다. 특히 천주교회의 경우, 이들 번역본들이 교부들의 신학 발전과 교리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더욱 큽니다.

셉투아긴타의 문화적 적응
기원전 3-2세기에 걸쳐 완성된 셉투아긴타는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최초의 체계적인 작업으로, 알렉산드리아의 헬레니즘적 유대인 공동체를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번역자들은 히브리 문화의 독특한 개념들을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전환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단순한 어휘 대응을 넘어서 문화적 맥락의 전환이 필요했습니다.
특히 종교적 개념의 번역에서 이러한 문화적 적응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히브리어 '셰올'은 죽은 자들이 머무르는 지하 세계를 의미했지만, 그리스어 '하데스'로 번역되면서 그리스 신화의 지하세계 개념이 혼재되었습니다. 또한 '베리트'라는 계약 개념은 '디아테케'로 번역되면서 그리스-로마 법률 체계의 유언장 개념이 가미되었습니다.
이러한 번역상의 선택들은 후에 신약성경 저자들과 초기 교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도 바오로를 비롯한 신약 저자들이 구약을 인용할 때 주로 셉투아긴타를 사용했기 때문에, 헬레니즘적 해석이 초기 천주교 신학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 전통의 형성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라틴어 불가타의 서구 문화적 영향
4-5세기 성 히에로니무스에 의해 완성된 라틴어 불가타 성경은 서구 천주교회의 표준 성경으로 천년 이상 사용되면서 서구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히에로니무스는 히브리어 원전으로 돌아가 번역의 정확성을 높이려 노력했지만, 동시에 라틴 문화권의 독자들을 고려한 문화적 적응도 시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로마 법률 용어와 행정 체계의 개념들이 성경 번역에 반영되었습니다.
불가타 번역에서 나타나는 문화적 특징 중 하나는 교회 조직과 관련된 용어들의 선택입니다. 그리스어 '에클레시아'를 라틴어 '에클레시아'로 음역하면서도, 때로는 '콘그레가티오'나 '콘벤투스' 같은 로마의 정치적 집회 용어들도 함께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번역 선택은 초기 교회가 로마 제국 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또한 불가타는 중세 유럽의 지적 전통과 문화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중세 대학에서 신학은 물론 철학과 법학 교육의 기초가 되었으며, 문학과 예술 작품의 영감을 제공했습니다. 단테의 신곡이나 중세 성당의 조각들은 모두 불가타의 라틴어 표현에 기반한 것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번역 성경은 단순한 종교 텍스트를 넘어 문화 전체를 형성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방 교회의 시리아어와 콥트어 번역들
서구의 라틴어 번역과 함께 동방에서는 시리아어 페시타와 콥트어 번역들이 각각의 문화적 맥락에서 성경을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2세기경부터 시작된 시리아어 번역은 셈족 언어의 특성상 히브리어 원전과의 친밀성을 유지하면서도, 시리아 지역의 독특한 기독교 전통을 반영했습니다. 특히 시리아 교회의 금욕주의적 전통이 번역 선택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집트의 콥트어 번역들은 고대 이집트 문명과 헬레니즘 문화, 그리고 기독교가 만나는 독특한 지점에서 탄생했습니다. 콥트어 성경에서는 고대 이집트의 종교적 개념들이 기독교적 맥락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활'이라는 개념이 고대 이집트의 내세관과 결합되면서 독특한 신학적 해석이 발전했습니다.
이러한 동방의 번역들은 초기 천주교회의 보편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각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반영하면서도 동일한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노력들은 오늘날 천주교회의 문화적 적응 원칙들의 뿌리가 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강조된 토착화의 정신도 이러한 초기 번역 전통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번역 과정에서의 신학적 해석 문제
초기 성경 번역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도전 중 하나는 신학적으로 민감한 구절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번역자들은 단순한 언어 변환자가 아니라 신학적 해석자의 역할도 동시에 수행해야 했습니다. 특히 메시아 예언이나 삼위일체와 관련된 구절들에서 이러한 해석적 개입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셉투아긴타에서 이사야 7장 14절의 '알마'를 '파르테노스'로 번역한 것은 대표적인 예입니다. 히브리어 '알마'는 단순히 젊은 여성을 의미했지만, 그리스어 '파르테노스'는 처녀를 명확히 지칭합니다. 이러한 번역 선택은 후에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교리의 구약적 근거로 활용되었습니다. 이는 번역이 단순한 언어 전환을 넘어 교리 발전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요한 복음 1장 1절의 '로고스' 개념도 번역 과정에서 중요한 신학적 함의를 가졌습니다.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 개념이 기독교적 맥락에서 재해석되면서, 각 번역 언어에서 이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는 삼위일체 교리의 이해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라틴어 '베르붐', 시리아어 '멜타' 등 각각의 번역 선택들이 해당 지역 신학 전통의 특색을 형성했습니다.
초기 번역 성경들의 문화적 차이는 오늘날에도 천주교회의 성경 해석과 교리 이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특히 교황청 성서위원회에서 발표한 「성경의 해석」 문헌은 이러한 역사적 번역 경험을 바탕으로 현대적 번역 원칙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현대적 의미와 교훈
초기 번역 성경들에서 나타나는 문화적 차이는 오늘날 천주교회의 복음 선교와 문화적 적응에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각 시대와 지역의 문화적 맥락을 존중하면서도 복음의 본질적 메시지를 보존하는 것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과제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강조되고 있는 토착화의 원리도 이러한 초기 번역 전통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현재 천주교회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언어의 전례서들과 성경들도 초기 번역자들이 직면했던 동일한 문화적 도전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다양한 문화권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하면서도 각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존중하는 것은 초기 교회의 번역 경험에서 배울 수 있는 지혜입니다.
특히 한국 천주교회의 경우,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성경 번역 작업에서도 이와 유사한 문화적 적응 과정을 겪었습니다. 한문 번역에서 시작하여 순한글 번역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문화권의 특성을 반영하면서도 가톨릭 전승의 정통성을 유지하려는 노력들은 초기 교회 번역자들의 경험과 맥을 같이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연속성은 천주교회의 보편성과 지역성이 조화를 이루는 방식을 보여주는 소중한 유산입니다.
참고문헌
- 교황청 성서위원회, 『성경의 해석』,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4
- 레이몬드 브라운, 『신약성서 개론』, 분도출판사, 2009
- 브루스 메츠거, 『신약성서 본문비평학』, 대한기독교서회, 2005
- 에마뉘엘 토프, 『구약성서 본문사』, 비블리카 아카데미아, 2013
- 프랑수아 르푸아르, 『성서 번역의 역사』, 성서와함께, 2011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가톨릭 성경 번역의 역사와 원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20
- Vatican.va - 교황청 공식 웹사이트 (https://www.vatican.va)
- Catholic Encyclopedia Online (https://www.newadvent.org/cathen)
- United States Conference of Catholic Bishops (https://www.usccb.org)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https://www.cbc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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