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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경과 번역의 역사/라틴어 불가타, 70인역, 초기 성경 전승

서방 교회의 불가타와 교황의 권위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5.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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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분기점

기독교 초기부터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는 서로 다른 언어적,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발전해왔습니다. 서방 교회는 라틴어를 공용어로 사용했으며, 로마를 중심으로 한 교회 조직과 전례 전통을 형성했습니다. 반면 동방 교회는 그리스어를 중심으로 하여 콘스탄티노플과 기타 동방의 교구들이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구조를 유지했습니다.

이러한 언어적 차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문제를 넘어서 신학적 사고와 교회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서방 교회에서는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과 교부들의 저작이 신학 발전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는 후에 불가타 성경의 권위 확립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습니다.

4세기 이후 서방 교회는 점차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구조를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이는 동방 교회의 총대주교제나 공의회 중심의 교회 정치와는 다른 특징을 보여주었으며, 성경의 권위와 해석에 있어서도 독특한 전통을 형성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성 히에로니모와 불가타의 탄생

347년경 스트리돈에서 태어난 성 히에로니모는 서방 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성서학자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로마에서 고전 문학을 공부했으며, 후에 동방으로 가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익혔습니다. 이러한 언어적 능력과 학문적 소양은 그를 성경 번역의 최적임자로 만들었습니다.

383년 교황 다마소 1세는 히에로니모에게 당시 서방에서 사용되고 있던 여러 라틴어 성경 번역본들을 통일하고 개정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당시 서방 교회에서는 베투스 라티나(Vetus Latina)라고 불리는 다양한 라틴어 번역본들이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들 번역본들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어서 교리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히에로니모는 이 작업을 위해 단순히 기존 번역을 수정하는 것을 넘어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전으로 돌아가는 혁신적인 접근을 취했습니다. 그는 "히브리어 원전(Hebraica veritas)"의 권위를 강조했으며,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관점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번역 철학은 후에 종교개혁 시대 '원전으로의 복귀(ad fontes)' 운동에 영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히에로니모의 번역 작업은 약 20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383-405년), 이 기간 동안 그는 베들레헤म에서 수도 생활을 하면서 번역에 전념했습니다.

교황의 후원과 불가타의 공인

불가타 번역 사업은 처음부터 교황청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교황 다마소 1세는 히에로니모의 학문적 능력을 신뢰했을 뿐만 아니라, 통일된 라틴어 성경이 서방 교회의 일치와 교황 권위 강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다마소 교황의 후원은 단순한 학문적 관심을 넘어서 교회 정치적 고려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4세기 후반 서방 교회는 아리우스주의와 기타 이단들의 도전에 직면해 있었으며, 정통 교리의 명확한 표현과 전달이 시급한 과제였습니다. 통일된 성경 번역본은 이러한 교리적 통일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도구로 여겨졌습니다.

히에로니모 사후 불가타는 점차 서방 교회 전체에 확산되어 나갔습니다. 6세기경 교황 그레고리오 1세 대교황은 불가타의 사용을 더욱 장려했으며, 8세기 샤를마뉴 대제는 알쿠인의 도움을 받아 불가타의 표준화 작업을 추진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불가타는 단순한 번역본을 넘어서 서방 교회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문헌이 되었습니다.

교황 다마소 1세는 히에로니모에게 보낸 서신에서 "교회의 일치를 위해 하느님의 말씀이 명확하고 통일된 형태로 전해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중세 교회에서의 불가타의 지위

중세 시대 동안 불가타는 서방 교회의 신학과 영성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수도원 학교와 대학에서 신학 교육의 기본 텍스트로 사용되었으며, 전례와 설교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스콜라 신학자들의 저작도 불가타를 바탕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불가타의 권위는 단순히 번역의 정확성에만 기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전통과 교도권의 승인을 통해 확립된 권위였으며, 이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개인의 자의적 판단보다는 교회 공동체의 전통적 이해를 우선시하는 천주교적 원칙과 일치했습니다.

12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파리 대학을 중심으로 불가타의 표준화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기에 제작된 파리 불가타(Biblia Parisiensis)는 장과 절의 구분을 체계화했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성경의 기본 구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체계화 작업 역시 교황청의 승인과 후원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교황 권위와 성경 해석권의 연결

불가타의 역사는 교황의 교도권 발달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황청이 불가타를 후원하고 공인한 것은 단순히 번역본의 우수성을 인정한 것을 넘어서, 성경 해석과 교리 형성에 있어서 교황의 권위를 확립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중세 후기로 갈수록 교황청은 불가타의 권위를 통해 성경 해석의 최종 권한이 교회의 교도권에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개인적 영감이나 신비적 체험에 기반한 성경 해석을 견제하고, 교회의 통일성을 유지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14세기 위클리프와 15세기 후스 등의 개혁 운동가들이 자국어 성경 번역과 개인적 성경 해석을 주장했을 때, 교회 당국은 불가타의 권위와 교회의 해석권을 내세워 이에 대응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후에 종교개혁 시대의 성경관 논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핵심 개념: 불가타의 권위는 단순한 언어학적 우수성이 아니라 교회의 전통과 교도권의 승인에 기초한 것이었으며, 이는 천주교의 성경 해석 원칙과 교황 수위권 사상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에 대한 대응과 트리엔트 공의회

16세기 종교개혁은 불가타의 권위와 교황의 교도권에 직접적인 도전이었습니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원칙을 내세우며 교회 전통과 교황의 권위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원전 언어로의 복귀를 주장하며 불가타의 번역상 오류들을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한 천주교회는 1545년부터 1563년까지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체계적인 대응을 마련했습니다. 공의회는 1546년 4월 8일 불가타를 "모든 공적 강의, 논쟁, 설교, 해설에서 사용되어야 할 정본(authentica)"으로 선언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이 결정은 단순히 불가타의 번역적 우수성을 확인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교도권이 성경의 정경과 해석에 있어서 최종적 권위를 가진다는 천주교 교리를 재확인한 것이었습니다. 공의회는 "성경의 참뜻을 판단하고 해석할 권리는 거룩한 어머니인 교회에 속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반종교개혁과 불가타의 개정

트리엔트 공의회는 불가타의 권위를 확인하는 동시에 그 개정 작업도 지시했습니다. 이는 종교개혁자들이 지적한 일부 번역상의 문제점들을 인정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교황 식스토 5세는 1590년 개정된 불가타를 출간했지만, 이는 곧 여러 문제점이 발견되어 철회되었습니다.

1592년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새로운 개정판을 출간했으며, 이것이 '식스토-클레멘티나 불가타'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개정 작업은 교황청이 성경 텍스트의 정확성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는 의미였으며, 교도권의 범위가 교리뿐만 아니라 성경 본문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17세기와 18세기를 거치면서 천주교회는 불가타를 중심으로 한 성경학 연구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베네딕토회 수도사들의 마우리니 학파나 예수회 학자들의 연구는 불가타의 학문적 기초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었으며, 이는 교황 권위의 지적 토대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근현대 시대의 변화와 연속성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고고학적 발견과 원전 연구의 발달로 성경학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사해 사본의 발견이나 고대 근동 문헌들의 연구는 성경 본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왔으며, 이는 불가타 중심의 전통적 접근에도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교황 레오 13세는 1893년 회칙 "프로비덴티시무스 데우스"를 통해 현대적 성경학 방법론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교회의 교도권이 성경 해석에서 가지는 권위를 재확인했습니다. 이는 학문적 발전을 받아들이면서도 교회의 전통적 권위를 유지하려는 균형 잡힌 접근이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느님의 말씀에 관한 교의헌장(Dei Verbum)"을 통해 성경과 전승, 그리고 교도권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했습니다. 공의회는 자국어 번역을 허용하고 현대적 성경학 방법론을 적극 수용했지만, 동시에 성경 해석에 있어서 교회의 교도권이 가지는 권위는 계속 강조했습니다.

현대적 의의: 오늘날 천주교회는 불가타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다양한 언어와 번역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해석에 있어서 교회의 교도권이 가지는 권위라는 근본 원칙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불가타 유산의 현재적 의미

현재 천주교회에서 불가타는 더 이상 유일한 공식 성경은 아니지만, 여전히 특별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새로운 불가타(Nova Vulgata)를 공포했으며, 이는 라틴 전례에서 사용되는 공식 번역본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불가타의 역사적 경험은 현대 천주교회의 성경관과 교도권 이해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성경의 권위와 교회의 권위, 학문적 연구와 신앙적 해석 사이의 관계에 대한 천주교적 접근의 특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불가타의 역사는 교황 수위권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합니다. 교황청이 성경 번역과 해석에 개입하고 이를 통해 교회 전체의 일치를 도모했던 경험은, 현대 천주교회의 중앙집권적 구조와 교도권 행사의 역사적 배경을 보여줍니다.

참고문헌 및 참고사이트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가톨릭대사전』 제2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5.
  • 정양모. 『성서의 역사』. 성바오로출판사, 2018.
  • 김정우. 『교회사 개론』. 가톨릭출판사, 2016.
  • 이창훈. 『중세 교회사와 교황권』. 분도출판사, 2019.
  • 바티칸 공식 홈페이지: www.vatican.va
  • 바티칸 도서관 디지털 아카이브: digi.vatlib.it
  • 한국가톨릭대학교 성서학연구소: bible.catholic.ac.kr
  • 교황청 성서위원회: www.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
  • 가톨릭 백과사전(Catholic Encyclopedia): www.newadvent.org/cathen
  • 트리엔트 공의회 문헌 아카이브: www.thecounciloftren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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