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번역의 역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파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특히 천주교회의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성경 번역은 단순한 언어적 전환을 넘어서 신학적, 문화적, 정치적 변화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번역사의 흐름을 통해 우리는 천주교 교회가 어떻게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신자들에게 전달해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대와 중세 시대의 성경 번역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성경 번역의 필요성은 복음 전파의 실용적 요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도들이 활동하던 1세기경, 신약성경의 대부분은 당시 지중해 지역의 공용어였던 그리스어로 기록되었지만, 지역별로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신자들을 위해서는 번역이 필수적이었습니다. 특히 북아프리카와 서유럽 지역으로 그리스도교가 확산되면서 라틴어 번역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는 후에 천주교회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성 히에로니무스(347-420년)가 완성한 불가타(Vulgata) 성경은 중세 천주교회의 표준 성경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히에로니무스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전을 직접 참조하여 라틴어로 번역했으며,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작업이었습니다. 불가타 성경은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천주교회의 정본으로 인정받았고, 약 1400년간 서방 천주교회의 전례와 신학 연구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중세 시대에 성경은 주로 라틴어로만 전해졌기 때문에 일반 신자들이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성직자들의 권위를 강화하는 동시에, 종교개혁 시대에 개신교도들이 제기한 주요 비판 중 하나가 되기도 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와 번역의 변화
16세기 종교개혁은 성경 번역사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1522-1534년)은 라틴어에 의존했던 기존의 관행에 도전장을 내밀었으며, 일반 신자들이 자국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천주교회로 하여금 자체적인 번역 정책을 재검토하게 만들었고, 신자들의 신앙 교육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모색하게 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는 종교개혁에 대응하여 천주교회의 입장을 명확히 했습니다. 공의회는 불가타 성경의 권위를 재확인하면서도, 동시에 신중한 자국어 번역의 필요성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번역 작업은 교회 당국의 엄격한 감독 하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고, 이는 이후 수세기 동안 천주교 성경 번역의 기본 방향을 결정했습니다.
17-18세기에는 각국의 천주교회에서 자국어 번역 성경이 조심스럽게 출간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의 르메트르 드 사시(Lemetre de Sacy) 번역, 독일의 다양한 천주교 번역본들이 나타났으며, 이들은 모두 불가타를 기준으로 하면서도 신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근대와 성서학의 발전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은 고고학적 발견과 성서학 연구의 비약적 발전이 이루어진 시기였습니다. 사해 사본의 발견(1947년), 이집트 파피루스 문서들의 발굴, 그리고 고대 근동 지역의 다양한 고고학적 성과들은 성경 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크게 향상시켰습니다. 이러한 학문적 진보는 성경 번역에 있어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원전에 더욱 충실한 번역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프로비덴티시무스 데우스」(1893년)와 교황 비오 12세의 회칙 「디비노 아플란테 스피리투」(1943년)는 천주교회의 성서 연구에 대한 입장을 현대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비오 12세의 회칙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전을 바탕으로 한 번역을 장려했으며, 이는 천주교 성경 번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예루살렘 성서학교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학자들의 연구와 독일 가톨릭 성서학자들의 노력은 천주교 성서학의 르네상스를 가져왔습니다. 이들의 연구 성과는 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서 이해와 번역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현대적 전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는 천주교회의 성경 번역 정책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공의회 문헌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헌장」(Dei Verbum)은 성경을 "하느님의 백성" 전체가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천명했습니다. 이는 중세 이래로 유지되어온 라틴어 중심의 성경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으며, 각 지역교회의 언어와 문화를 존중하는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했습니다.
공의회는 또한 전례에서의 자국어 사용을 허용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질 높은 자국어 성경 번역의 필요성을 증대시켰습니다. 미사 중 독서와 복음 선포가 신자들의 모국어로 이루어지게 되면서, 번역의 정확성과 문학적 품격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각국의 주교회의는 전례용 성경 번역 위원회를 구성하고, 전문적인 번역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경우,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한국어 성경 번역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1977년에 출간된 「성경」은 라틴어 불가타가 아닌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전을 바탕으로 번역된 최초의 한국 천주교 성경이었습니다. 이후 1999년에는 더욱 현대적인 언어로 개정된 「성경」이 출간되었고, 2005년에는 「가톨릭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대 번역학과 성경 번역의 새로운 도전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성경 번역은 전통적인 언어학적 접근법을 넘어서 문화 간 소통, 젠더 이슈, 다종교 사회에서의 대화 등 복합적인 문제들을 다루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현대 번역학의 발전은 성경 번역에도 새로운 방법론을 제공했으며, 동적 등가성과 형식적 등가성의 균형, 독자 반응 이론의 적용 등이 중요한 논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디지털 시대의 도래는 성경 번역과 보급에도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컴퓨터 보조 번역 도구의 활용, 다양한 번역본들의 비교 연구, 그리고 전 세계 번역팀 간의 실시간 협력이 가능해졌습니다. 바티칸에서도 이러한 기술적 진보를 적극 수용하여 다국어 성경 데이터베이스 구축과 번역 품질 관리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현재 천주교회는 전 세계 약 3,000개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특히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토착 언어들로의 번역 작업은 현지 교회의 성장과 신앙의 토착화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미래를 향한 전망
현대 성경 번역의 역사적 발전을 통해 우리는 천주교회가 어떻게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면서도 핵심적인 신앙의 진리를 보존해왔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불가타 성경의 천년 왕국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방적 접근법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항상 하느님의 말씀을 신자들에게 더 가깝게 전달하려는 노력을 지속해왔습니다.
앞으로 성경 번역은 인공지능과 기계학습 기술의 발전, 다문화 사회에서의 상호문화적 대화, 그리고 환경 위기와 사회 정의 문제 등 현대적 도전들에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모든 사람에게 전달하려는 교회의 근본적인 사명입니다. 현대 성경 번역의 역사는 이러한 사명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왔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및 자료
- 교황청 성서위원회, 『성경 해석에 관한 문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2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가톨릭 성경 번역 지침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5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헌장』(Dei Verbum), 1965
- Bruce M. Metzger, 『신약성경 본문 비평학』, 대한기독교서회, 1995
- 정양모, 『성서의 역사와 번역』, 성바오로출판사, 2010
- Vatican.va - 바티칸 공식 웹사이트 성서 관련 문서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홈페이지 - 성경 관련 자료실
- 가톨릭 성서학 연구소 - 성경 번역 연구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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