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박해의 시대는 끝났지만, 이제는 교리적 논쟁이라는 새로운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죠. 이 격동의 시대에 정통 신앙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친 한 위대한 성인이 계셨습니다. 바로 '정통신앙의 수호자'로 불리는 성 아타나시오(St. Athanasius, 295-373년)이십니다. 그분의 삶은 진리를 위한 끝없는 투쟁의 연속이었어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신학의 거인
성 아타나시오는 295년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아테네, 로마와 함께 고대 지중해 세계의 3대 학문 중심지 중 하나였어요. 특히 기독교 신학과 철학 연구의 메카였죠.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지적 능력을 보였던 아타나시오는 알렉산드리아 교리학교에서 체계적인 신학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젊은 나이에 이미 탁월한 신학적 통찰력을 보여주셨어요. 318년, 23세의 나이에 쓴 『성육신론』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깊이 있는 신학적 성찰을 담고 있어 지금도 교부신학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저작에서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 진정으로 사람이 되신 성육신의 신비를 명확하게 설명하셨죠.
아리우스 이단의 출현과 교회의 위기
32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같은 도시의 사제였던 아리우스가 "성자는 성부보다 열등하며, 성부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한 거예요. 이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부정하는 심각한 이단 사상이었습니다. 아리우스의 가르침은 교회 내에서 큰 혼란을 일으켰고, 많은 신자들이 혼동에 빠졌죠.
당시 알렉산드리아 주교였던 알렉산드로스는 아리우스의 가르침을 단호히 반박했고, 젊은 부제 아타나시오도 스승을 도와 아리우스주의에 맞섰습니다. 아타나시오는 뛰어난 논리력과 성경 지식을 바탕으로 아리우스의 주장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명확하게 드러냈어요. 하지만 아리우스주의는 이미 동방 교회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니케아 공의회와 정통신앙의 승리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교회 내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니케아에서 전 세계 주교들이 참석하는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사상 첫 번째 보편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였어요. 300여 명의 주교들이 모인 이 역사적인 회의에서 아타나시오는 비록 부제 신분이었지만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오는 성부와 성자가 '호모우시오스(ὁμοούσιος)', 즉 '같은 본질'을 가지신다는 교리를 강력하게 옹호했어요. 이는 아리우스가 주장한 성자의 열등함을 완전히 반박하는 개념이었죠. 치열한 논쟁 끝에 공의회는 아타나시오의 입장을 받아들여 아리우스주의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우리가 지금도 외우는 '니케아 신경'을 제정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로서의 투쟁
328년, 스승 알렉산드로스가 선종하자 33세의 아타나시오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로 선출되었습니다. 하지만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주의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어요. 오히려 황제와 궁정의 일부 세력들이 아리우스주의를 지지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아타나시오는 총대주교로서 정통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했습니다. 그분은 목회 서간을 통해 신자들을 가르치고, 신학 저작을 통해 아리우스주의의 오류를 계속 반박했어요. 특히 사막 교부들과의 깊은 유대관계를 통해 수도원 운동을 지원하며, 영성생활의 모범을 제시하셨습니다.
다섯 번의 유배, 굴복하지 않은 신앙
아타나시오의 삶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정통신앙을 지키기 위해 무려 다섯 번이나 유배를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335년 첫 번째 유배를 시작으로 무려 17년 동안을 고향을 떠나 유랑해야 했어요. 황제들과 아리우스주의 주교들의 끊임없는 압박에도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유배 기간 중에도 그분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갈리아, 이탈리아, 이집트 사막 등 여러 곳에서 저술 활동을 계속하며 정통신앙을 변호했어요. 특히 『안토니오의 생애』라는 작품을 통해 사막 교부 성 안토니오의 삶을 소개하여 수도원 운동 확산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이 책은 성 아우구스티노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죠.
최후의 승리와 신앙의 유산
361년 율리아노 황제가 죽고 요비아노 황제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새 황제는 니케아 신앙을 지지했고, 아타나시오는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비록 365년 발렌스 황제 때 잠시 다시 유배되었지만, 이번에는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의 강력한 항의로 곧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373년 5월 2일, 78세의 나이로 선종하실 때까지 아타나시오는 계속해서 교회를 이끌어가셨습니다. 그분의 끝없는 투쟁 덕분에 삼위일체 교리는 교회의 확고한 신앙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어요.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니케아 신앙이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도 아타나시오의 평생에 걸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교회사에 남긴 불멸의 업적
성 아타나시오는 동서방 교회 모두에서 위대한 교부로 추앙받고 계십니다. 그분이 남기신 신학적 유산은 실로 방대해요. 삼위일체론에 관한 체계적인 신학 체계를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론의 기초도 마련하셨거든요. 특히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되기 위함이다"라는 명제는 동방교회 신학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분은 신약성경 27권의 목록을 처음으로 확정한 분이기도 해요. 367년 부활절 서한에서 현재 우리가 인정하는 신약성경의 정경 목록을 제시하셨거든요. 이는 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성경의 권위와 정통신앙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죠.
수도원 운동의 후원자
많은 분들이 놓치기 쉬운 아타나시오의 또 다른 공헌은 수도원 운동에 대한 지원입니다. 그분은 사막 교부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고, 특히 성 안토니오와는 30년 이상 교분을 유지했어요. 유배 기간 중에도 이집트 사막의 수도자들이 그분을 보호해주었을 정도였습니다.
『안토니오의 생애』는 단순한 전기가 아니라 수도원 영성을 서방 세계에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은수자적 삶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고, 서방에서도 수도원 운동이 활발해졌습니다. 성 제로니모, 성 아우구스티노 등도 이 책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어요.
현대 교회에 주는 교훈
성 아타나시오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영감을 줍니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는 용기, 압박과 유혹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신념,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덕목들이에요. 특히 상대주의와 종교 다원주의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그분의 확고한 신앙관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또한 아타나시오가 보여준 학문적 탐구와 신앙의 조화도 주목할 만합니다. 그분은 결코 맹목적인 신앙인이 아니었어요. 철학과 신학을 깊이 연구하면서도 성경과 교회 전통에 충실했습니다. 이는 현대의 가톨릭 지식인들에게 훌륭한 모델이 되고 있어요. 신앙과 이성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임을 보여주신 거죠.
역사적 사건 연표
연도 | 성 아타나시오 관련 사건 | 동시대 세계사적 사건 |
---|---|---|
295년 |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 |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재위 시작 |
303년 | 유년기, 대박해 시작 |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대박해 |
313년 | 청년기 신학 공부 | 밀라노 칙령, 기독교 공인 |
318년 | 『성육신론』 저술 | 아리우스 이단 출현 |
320년 | 부제품 수품, 아리우스주의 반박 | 아리우스 논쟁 본격화 |
325년 | 니케아 공의회 참석, 정통신앙 옹호 | 제1차 니케아 공의회 개최 |
328년 |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착좌 | 콘스탄티누스 대제 통치 절정기 |
335년 | 제1차 유배 (트리어) | 티루스 종교회의 |
339년 | 제2차 유배 (로마) | 콘스탄티우스 2세 동방 황제 |
356년 | 제3차 유배 (이집트 사막) | 아리우스주의 황제들의 탄압 |
362년 | 제4차 유배 (8개월) | 율리아노 황제 배교 |
365년 | 제5차 유배 (4개월) | 발렌스 황제 아리우스주의 지지 |
367년 | 신약성경 27권 정경 목록 확정 | 훈족의 서진 시작 |
373년 | 선종 (5월 2일) | 성 암브로시오 밀라노 주교 선출 |
참고문헌 및 참고사이트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한국가톨릭대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 요하네스 퀘스텐, 『교부학 개론』, 분도출판사
- 아타나시오, 『성육신론』, 은성출판사
- 베네딕도 바우어, 『초대교회사』, 가톨릭출판사
- 가톨릭 백과사전: www.newadvent.org/cathen
- 바티칸 공식 홈페이지: www.vatican.va
- 가톨릭굿뉴스: www.catholic.or.kr
- 가톨릭평화신문: www.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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