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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인과 교부

성 그레고리오 나지안젠: "신학자"라 불린 삼위일체의 수호자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5.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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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혹시 가톨릭교회 역사상 "신학자(Theologian)"라는 칭호를 받은 성인이 몇 분이나 되는지 아시나요? 놀랍게도 단 세 분뿐이에요. 복음사가 요한,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오늘 소개할 성 그레고리오 나지안젠이죠. 4세기 격동의 시대, 삼위일체 교리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지켜낸 위대한 신학자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세요. 그의 삶은 마치 촛불 하나가 온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것 같았답니다.




성인 가정에서 태어난 특별한 아이

서기 329년경, 카파도키아 지방의 작은 도시 나지안조스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어요. 이 아이가 바로 그레고리오스였죠. 그의 가정은 정말 특별했어요. 아버지 그레고리오 원로는 나지안조스의 주교였고, 어머니 논나는 독실한 신자로 유명했거든요. 심지어 남동생 카이사리오스와 누나 고르고니아도 모두 성인품에 올랐을 정도로 신앙심 깊은 가정이었답니다.




어린 그레고리오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였어요. 특히 언어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죠. 부모님은 이런 아들을 위해 최고의 교육을 시켜주기로 했어요. 카이사레아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후, 팔레스타인과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최종적으로는 아테네로 유학을 떠났답니다.




바실리오와의 평생 우정, 아테네에서 꽃피우다

아테네에서 그레고리오는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되었어요. 같은 카파도키아 출신인 바실리오와 친구가 된 거죠. 두 사람은 금세 절친이 되었고, 함께 철학과 수사학을 공부하며 깊은 우정을 쌓아갔어요. 훗날 둘 다 카파도키아 3교부가 될 줄은 그때 몰랐겠지만요.




아테네에서 그레고리오는 뛰어난 웅변가로 명성을 얻었어요. 하지만 그의 마음은 세속적 성공에 있지 않았어요. 친구 바실리오와 함께 더 깊은 영성을 추구하고 싶어 했거든요. 결국 361년, 두 사람은 아테네를 떠나 카파도키아로 돌아왔답니다.




원치 않은 성품, 하지만 하느님의 뜻이었다

카파도키아로 돌아온 그레고리오는 바실리오와 함께 본토스 강가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했어요. 세상을 떠나 하느님만을 생각하며 살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하느님께는 다른 계획이 있으셨나봐요. 361년, 아버지 그레고리오 원로 주교가 아들을 사제로 서품한 거예요. 그것도 본인의 동의 없이 말이에요!




처음에 그레고리오는 크게 당황했어요. 자신은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고 생각했거든요. 심지어 한동안 숨어버리기까지 했답니다. 하지만 결국 이것이 하느님의 부르심임을 깨닫고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그리고 부활절에 첫 미사를 봉헌하면서 본격적인 사목 생활을 시작했죠.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어요. 372년, 친구 바실리오가 카이사레아의 대주교가 되면서 그레고리오를 사시마라는 작은 마을의 주교로 임명한 거예요. 또다시 본인 동의 없이요! 그레고리오는 이번에도 크게 반발했어요. 심지어 바실리오와 일시적으로 사이가 나빠지기까지 했답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펼친 신학적 대변론

379년, 그레고리오의 인생에 또 다른 전환점이 찾아왔어요. 콘스탄티노플의 정통 가톨릭 신자들이 그를 초청한 거예요.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아리우스파가 장악하고 있어서 정통 신앙을 가진 이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거든요.




그레고리오는 콘스탄티노플의 한 작은 성당에서 설교를 시작했어요. 이 성당의 이름이 '아나스타시아(부활)'였는데, 정말 상징적이었죠. 말 그대로 정통 신앙이 부활하는 곳이 되었거든요. 그의 설교는 그야말로 대박이었어요. 깊은 신학적 내용을 아름다운 언어로 풀어내는 그의 능력에 사람들이 감동했답니다.




특히 유명한 것이 삼위일체에 관한 다섯 편의 설교였어요. 이 설교들은 나중에 '신학적 설교(Theological Orations)'라고 불리며 삼위일체 교리의 고전이 되었죠.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느님이면서도 각각 구별되는 위격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했어요.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와 극적인 사임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가톨릭을 국교로 선포하면서 상황이 바뀌었어요. 그레고리오는 콘스탄티노플의 정식 총주교가 되었고, 381년에는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열렸죠. 이 공의회에서 니케아 신경이 보완되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가 되었답니다.




하지만 공의회는 그레고리오에게 시련의 연속이었어요. 이집트와 마케도니아에서 온 주교들이 그의 콘스탄티노플 주교 임명이 교회법에 어긋난다며 반대한 거예요. 또한 친구의 장례 설교에서 한 말이 오해를 받기도 했죠. 이 모든 갈등에 지친 그레고리오는 결국 극적인 결정을 내렸어요.




"나는 요나가 되겠습니다. 나 때문에 배가 흔들린다면 나를 바다에 던져 주십시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총주교직을 사임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그의 결심은 확고했답니다. 교회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명예쯤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거든요.




고향에서 보낸 마지막 10년, 시인 신학자의 진면목

콘스탄티노플을 떠난 그레고리오는 고향 나지안조스로 돌아갔어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잠시 그곳 주교직을 대행하기도 했지만, 곧 후임자를 세우고 완전히 은퇴했답니다. 그리고 인근의 아리안조스라는 조용한 곳에서 마지막 10년을 보냈어요.




하지만 이 시기가 그의 가장 창조적인 시기였어요. 그는 수많은 시를 썼는데, 이 시들은 신학적 깊이와 문학적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죠. 특히 자서전적 시들은 한 영혼의 내면 여정을 솔직하게 보여주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답니다.




"나는 너무 많은 폭풍을 만났다. 육지에서도, 바다에서도, 하늘에서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도. 나의 생애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이런 고백적인 시구들에서 우리는 성인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음을 느낄 수 있어요.




신학자로서의 위대한 업적

그레고리오의 신학적 업적은 정말 대단해요. 무엇보다 삼위일체 교리를 체계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죠. 그는 성부와 성자가 동일본질(homoousios)이라는 니케아 공의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서도, 성령의 신성에 대해서도 명확히 밝혔어요.




특히 성령에 관한 그의 가르침은 혁신적이었어요.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피조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레고리오는 성령도 성부, 성자와 같은 하느님이시라고 분명히 선언했거든요. "성령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이 아니라면 나를 신격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죠.




또한 그는 신학 언어의 정확성을 매우 중시했어요. "신학자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부정확한 표현 하나가 잘못된 교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죠. 이런 자세 덕분에 그의 신학은 매우 정밀하고 균형 잡혀 있었답니다.




인간적 고뇌와 영성의 깊이

그레고리오의 매력은 신학적 탁월함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면에도 있어요. 그는 자신의 약함과 고뇌를 숨기지 않았거든요. 원치 않는 성품과 주교직, 친구들과의 갈등, 건강 문제 등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이 모든 것을 신앙의 눈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했어요.




특히 그의 기도문들은 정말 아름다워요. "주님, 제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너무 작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제가 가진 이 작은 것이라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이런 겸손한 기도에서 우리는 진정한 성인의 모습을 볼 수 있어요.




또한 그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관심도 많았어요. 가난한 이들, 병자들, 나그네들을 위한 설교들이 많이 남아있죠.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이들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그의 말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줍니다.




390년, 위대한 신학자의 마지막

390년 1월 25일, 그레고리오는 61세의 나이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어요. 임종을 앞두고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영광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게"였다고 해요. 죽음의 순간까지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한 참된 신학자다운 모습이었죠.




그의 죽음은 동서방 교회 모두에 큰 슬픔을 안겨줬어요. 특히 콘스탄티노플의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교회가 위대한 별을 잃었다"며 애도했답니다. 정말 한 시대가 끝나는 느낌이었을 거예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그레고리오의 유산

성 그레고리오 나지안젠의 업적은 1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있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삼위일체 교리의 정립이죠.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은 그의 신학적 기여 없이는 불가능했을 거예요.




또한 그의 설교와 시들은 동방교회의 귀중한 유산이 되었어요. 특히 동방정교회에서는 그를 '3대 성사제' 중 하나로 공경하고 있죠. 가톨릭교회에서도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고 1월 2일을 축일로 정했답니다.




현대 신자들에게 주는 그레고리오의 메시지

그레고리오의 삶에서 우리가 배울 점들이 참 많아요. 첫째는 학문에 대한 열정이에요. 그는 평생 공부를 멈추지 않았거든요. "무지는 모든 악의 뿌리다"라고 했을 정도로 배움을 중시했어요. 우리도 신앙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계속 공부해야겠어요.




둘째는 원치 않는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는 자세예요. 그레고리오는 사제품이나 주교품을 원하지 않았지만, 결국 이를 통해 더 큰 선을 이룰 수 있었거든요. 우리 인생에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더라도, 그 속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셋째는 교회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마음이에요. 그레고리오는 자신의 명예보다 교회의 일치를 더 소중히 여겼잖아요. 요즘 교회 안에서도 여러 갈등이 있는데, 그의 정신을 본받아 화해와 일치를 위해 노력해야겠어요.




마지막으로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예요. 그레고리오의 인생은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끝까지 신앙을 지켰거든요. 우리도 힘든 일이 있을 때 그의 용기를 기억하며 희망을 잃지 말아야겠어요.




역사적 사건 연표

연도 성 그레고리오 나지안젠 관련 사건 동시대 세계사적 사건
329년경 나지안조스에서 그레고리오 출생 콘스탄티누스 대제 통치 말기
345-355년 카이사레아, 팔레스타인,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 콘스탄티우스 2세 통치, 아리우스 논쟁 격화
355-361년 아테네에서 바실리오와 함께 수학 율리아누스 황제의 배교와 기독교 탄압
361년 아버지에 의해 사제 서품, 본토스에서 수도생활 율리아누스 황제 페르시아 원정 중 사망
362년 부활절 나지안조스에서 첫 미사 봉헌 요비아누스 황제 즉위, 기독교 복원
372년 바실리오에 의해 사시마 주교로 임명 발렌스 황제의 정통파 주교들 탄압
374년 나지안조스 교구 관리 시작 서방과 동방교회 분열 심화
379년 콘스탄티노플로 초청, 아나스타시아 성당에서 설교 바실리오 대 선종, 테오도시우스 1세 즉위
380년 삼위일체 교리 설교, '신학적 설교' 완성 테살로니카 칙령, 가톨릭 국교화
380년 11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로 임명 아리우스파 주교들 추방
381년 5월-7월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의장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공포
381년 7월 총주교직 사임, 나지안조스로 귀향 동방교회 내부 갈등 지속
383년 나지안조스 주교직 사임, 아리안조스에서 은퇴 서로마 제국 정치적 혼란
383-390년 시 창작과 신학 저술 활동 암브로시오의 테오도시우스 황제 회개 요구
390년 1월 25일 아리안조스에서 선종(61세) 기독교 로마 제국 체제 확립



참고문헌 및 참고사이트

  • 『가톨릭 대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성바오로출판사
  • 『카파도키아 교부들』, 요한네스 퀘스텐 저, 왜관 분도출판사
  • 『그레고리오 나지안젠의 신학』, 존 맥그래스 저, 대한기독교서회
  • 『삼위일체론 발전사』, 베르나르 세즈부에 저, 가톨릭출판사
  • Vatican.va - 바티칸 공식



성 그레고리오 나지안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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