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말 5세기 초,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고 기독교가 국교로 자리 잡아가던 격동의 시대에 한 위대한 성인이 계셨습니다. 바로 '황금입(크리소스토모)'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St. John Chrysostom, 349-407년)이십니다. 그분의 삶은 말 그대로 수많은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그 모든 고난을 통해 교회사에 길이 남을 빛나는 유산을 남기셨죠.
안티오키아에서 피어난 웅변의 꽃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349년경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당시 안티오키아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동방 기독교의 중심지 중 하나였어요. 아버지는 로마군 장교였지만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 안 투사가 혼자서 아들을 키웠습니다. 어머니는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요한에게 깊은 영성적 토대를 마련해 주셨죠.
젊은 시절 요한은 당대 최고의 수사학자 리바니오스 밑에서 웅변술을 배웠습니다. 리바니오스는 이교도였지만 요한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했고, "기독교도들이 요한을 차지하지 않았다면 내 후계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어요. 하지만 요한은 세속적 명예보다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선택했습니다. 18세에 세례를 받고 독서자가 되었으며, 이후 수도생활에 전념했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서의 개혁 의지
397년, 요한은 예상치 못하게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새로운 로마'라고 불리며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막강한 권력을 자랑했어요. 하지만 성직자들의 부패와 사치가 심각한 문제였죠. 요한은 부임하자마자 과감한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그분은 먼저 자신부터 검소한 생활의 모범을 보이셨어요. 총 대주교궁의 사치스러운 연회를 폐지하고, 그 비용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성직자들에게는 엄격한 규율을 요구했고, 부정부패를 척결하려 노력했죠. 이런 개혁 조치들은 당연히 기득권층의 반발을 샀습니다.
황금 같은 말씀으로 백성을 깨우치다
'크리소스토모'라는 별명은 '황금입'이라는 뜻으로, 그분의 뛰어난 설교 능력을 가리킵니다. 요한의 설교는 단순히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성경에 깊이 뿌리를 둔 영적 가르침이었어요. 특히 마태오 복음서와 요한 복음서, 바울로 서간에 대한 주해는 지금도 교회의 소중한 자산이 되고 있습니다.
그분의 설교는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복잡한 신학적 개념을 쉽고 명확하게 설명하는 능력이 탁월했거든요. "부자와 가난한 자는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다", "재물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므로 가난한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그분의 메시지는 당시 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권력과의 충돌, 그리고 유배
요한의 직설적이고 용감한 설교는 점차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황후 에우독시아의 사치와 부정부패를 비판한 설교들이 문제가 되었어요. 황후는 자신을 구약의 악녀 이세벨에 비유했다고 여기며 분노했고, 알렉산드리아 총 대주교 테오필로스와 손을 잡고 요한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403년 '떡갈나무 공의회'라는 불법적인 종교회의에서 요한은 총 대주교직에서 해임되고 유배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 백성들의 강력한 항의로 곧 돌아올 수 있었죠. 그러나 이듬해 다시 충돌이 일어났고, 요한은 아르메니아의 쿠쿠소스로 유배되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은 신앙
유배지에서도 요한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편지를 통해 신도들을 격려하고, 가르침을 계속 전했어요. 하지만 정적들은 그조차 두려워했습니다. 407년, 더욱 외딴 폰토스 지역으로 이송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죠. 60세의 노구로 혹독한 여행을 견디기 힘들었던 요한은 결국 9월 14일 코마나에서 선종하셨습니다.
임종 직전 그분이 남기신 마지막 말씀은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을!"이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하느님에 대한 찬미와 감사를 잊지 않으신 거죠. 이후 438년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가 그분의 유해를 콘스탄티노플로 모셔왔고, 정식으로 명예를 회복시켰습니다.
교회사에 남긴 불멸의 유산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동방교회의 3대 교부 중 한 분으로 추앙받고 계십니다. 그분이 남기신 600여 편의 설교와 신학 저작들은 지금도 교회의 소중한 보물이에요. 특히 성체성사에 대한 깊이 있는 가르침과 사회정의에 대한 선구적 사상은 현대 가톨릭교회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분의 삶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은 진리 앞에서의 용기입니다. 권력자들의 압력과 박해에도 굴복하지 않고 복음의 정신을 지켜낸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감동을 줍니다. 1909년 비오 10세 교황께서 그분을 '설교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신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삶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을 줍니다. 물질만능주의와 권력 숭배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그분의 청빈과 정의에 대한 가르침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어요. 특히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과 설교에 대한 열정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본받아야 할 덕목입니다.
그분이 강조하신 "행동하는 신앙"의 메시지도 중요합니다. 단순히 미사에 참례하고 기도하는 것을 넘어서,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가르치셨거든요.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강조하시는 '나가는 교회'의 정신과도 일치합니다.
역사적 사건 연표
연도 |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관련 사건 | 동시대 세계사적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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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년 | 안티오키아에서 출생 | 콘스탄티우스 2세 로마 황제 재위 |
367년 | 세례 받고 독서자가 됨 | 발렌스 황제 즉위 |
381년 | 부제품 수품 |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개최 |
386년 | 사제품 수품, 안티오키아에서 설교 시작 | 테오도시우스 1세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 |
395년 | 안티오키아에서 설교자로 활동 절정 | 로마 제국 동서 분열 |
397년 |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임명 | 아르카디우스 동로마 황제 재위 |
403년 | 떡갈나무 공의회에서 해임, 첫 번째 유배 | 서고트족의 이탈리아 침입 |
404년 | 아르메니아 쿠쿠소스로 두 번째 유배 | 라벤나가 서로마 제국의 수도가 됨 |
407년 | 코마나에서 선종 (9월 14일) | 반달족의 갈리아 침입 |
438년 | 유해가 콘스탄티노플로 이송, 명예 회복 | 테오도시우스 법전 편찬 |
참고문헌 및 참고사이트
- 가톨릭대사전 편찬위원회, 『가톨릭대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 베네딕도 바우어, 『교부학』, 분도출판사
- 요한 크리소스토모, 『황금의 입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영성』, 가톨릭출판사
- 가톨릭굿뉴스: www.catholic.or.kr
- 바티칸 공식 홈페이지: www.vatican.va
- 가톨릭평화신문: www.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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