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거대한 교부의 만남과 시대적 배경
4세기 말과 5세기 초,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두 인물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와 성 히에로니무스(347-420)는 성경 번역과 해석을 둘러싸고 격렬한 학문적 논쟁을 벌였습니다. 히포의 주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 교회의 신학적 사유를 체계화한 위대한 신학자였으며, 달마티아 출신으로 베들레헴에서 활동한 제롬은 당대 최고의 성경 학자이자 번역자였습니다. 이들의 논쟁은 단순한 개인적 견해 차이를 넘어서, 초기 교회가 성경의 권위와 번역의 원칙에 대해 어떻게 사고했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입니다.
당시 서방 교회는 라틴어 번역 성경의 혼재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구약의 경우 칠십인역에서 번역된 베투스 라티나(Vetus Latina) 계열의 여러 번역본들이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들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교황 다마소 1세는 이러한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382년경 제롬에게 통일된 라틴어 성경 번역을 의뢰했습니다. 제롬은 처음에는 칠십인역을 기초로 하여 기존 라틴어 번역을 수정하는 작업을 시작했지만, 점차 히브리어 원전으로부터 직접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롬의 히브리어 원전 번역 프로젝트
제롬이 히브리어 원전에서 직접 번역하기로 결심한 것은 학문적 정확성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유대인 랍비들로부터 히브리어를 배우고, 오리게네스의 헥사플라를 연구하면서 칠십인역과 히브리어 본문 사이의 차이점들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다니엘서의 수산나 이야기나 벨과 용 이야기, 에스테르서의 추가 부분들이 히브리어 원전에는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들을 별도로 분리하거나 부록으로 처리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것으로, 성경학의 과학적 방법론을 앞서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제롬의 번역 작업은 단순히 언어적 전환을 넘어서 신학적 판단을 수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히브리어 진리"(Hebraica Veritas)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하느님께서 구약을 히브리어로 계시하셨으므로 히브리어 원전이 가장 권위있는 텍스트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당시 서방 교회에서 널리 사용되던 칠십인역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제롬은 또한 유대인들과의 논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인정하는 히브리어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는 실용적 이유도 제시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우려와 반박
아우구스티누스는 제롬의 번역 방침에 대해 교회 일치와 전통의 관점에서 깊은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그는 394-395년경 제롬에게 보낸 편지에서 칠십인역이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성령의 영감을 받은 권위있는 텍스트라고 주장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칠십인역 번역자들은 예언적 영감을 받아 번역했으며, 따라서 히브리어 원전과 다른 내용이 있더라도 그것은 성령께서 의도하신 바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알렉산드리아의 필론과 요세푸스 이래로 유다교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던 칠십인역에 대한 전통적 이해를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의 실용적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제롬에게 보낸 편지에서 새로운 번역이 기존의 칠십인역 기반 번역들과 크게 다를 경우, 평신도들이 혼란을 겪을 것이며 교회 내부에 분열이 생길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특히 아프리카 교회들에서는 이미 칠십인역 계열의 번역들이 전례와 교육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급작스러운 변화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또한 요나서의 번역을 둘러싼 실제 사례를 들며, 새로운 번역이 야기할 수 있는 사회적 파장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했습니다.
요나서 번역 사건과 그 파장
두 교부 사이의 논쟁에서 가장 구체적이고 상징적인 사례는 요나서 4장 6절의 번역 문제였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요나를 그늘지게 해준 식물은 '키카욘'(qiqayon)인데, 칠십인역에서는 이를 '콜로킨타'(박과 식물)로 번역했고, 제롬은 히브리어를 따라 '헤데라'(담쟁이덩굴)로 번역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전해주는 바에 따르면, 북아프리카의 한 교회에서 제롬의 새 번역으로 요나서를 읽었을 때 회중들이 강하게 반발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친숙했던 '박'이라는 표현 대신 '담쟁이'라는 낯선 표현을 듣고 번역의 정확성을 의심했습니다.
이 사건은 성경 번역의 사회적 차원을 잘 보여줍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통해 제롬에게 학문적 정확성만큼이나 교회 공동체의 수용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성경은 학자들만의 연구 대상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의 신앙과 생활의 기초가 되는 하느님의 말씀이므로, 번역자는 개인의 학문적 견해보다는 교회 전체의 유익을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제롬은 진리에 대한 추구가 일시적인 혼란보다 중요하며, 장기적으로는 정확한 번역이 교회에 더 큰 유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
신학적 방법론의 차이: 권위와 비판
두 교부의 논쟁은 궁극적으로 신학적 방법론의 근본적 차이를 드러냈습니다. 제롬은 원전 비판과 언어학적 분석을 통한 과학적 접근을 중시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되, 그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어 연구와 역사적 맥락 파악이 필수적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접근법은 후에 중세와 근세 성경학 발전의 기초가 되었으며, 현대 역사비평적 방법론의 선구적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제롬은 또한 유대교 전통과의 대화를 통해 구약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개방적인 태도였습니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 공동체의 신앙적 수용을 더 중시했습니다. 그에게 성경의 권위는 개별 텍스트의 언어학적 정확성보다는 교회 공동체가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받아들인 전통에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께서 칠십인역 번역자들에게도 영감을 주셨으며, 따라서 칠십인역의 독특한 표현들도 신학적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후에 가톨릭교회의 성전(聖傳) 이해와 교도권 개념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개인의 학문적 판단보다는 교회 전체의 식별력을 더 신뢰했던 것입니다.
논쟁의 전개 과정과 서신 교환
두 교부 사이의 논쟁은 약 20년에 걸쳐 여러 편의 서신을 통해 전개되었습니다. 초기 서신들(394-405년)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비교적 정중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자신의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그는 제롬의 학문적 능력과 헌신을 인정하면서도, 교회 일치라는 더 큰 가치를 위해 번역 방침을 재고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제롬은 처음에는 다소 방어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점차 아우구스티누스의 진정성을 인정하고 더욱 상세한 설명을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학문적 권위를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논쟁의 후반부(405-420년)로 갈수록 상호 이해와 존중의 분위기가 강해졌습니다. 제롬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실용적 우려를 이해한다고 밝히면서도, 자신의 번역 작업이 장기적으로 교회에 유익할 것이라는 확신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제롬의 학문적 성과를 인정하고, 새로운 번역이 갖는 가치를 부분적으로 수용했습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후기 저작들에서 제롬의 번역을 참고하는 경우가 늘어났으며, 이는 두 사람 사이의 건설적 대화가 결실을 맺었음을 보여줍니다. 두 교부는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형제요 동역자로 인정하며 우정을 유지했습니다.
불가타 성경의 완성과 교회의 수용
제롬의 번역 작업은 그의 생애 동안에는 완전한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 가치가 인정되었습니다. 6세기 이후 서방 교회에서는 제롬의 불가타 성경이 점차 표준 텍스트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카시오도루스, 이시도루스 등 후기 교부들이 불가타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널리 보급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8-9세기 카롤링거 르네상스 시기에는 알쿠인과 테오둘프 등이 불가타 텍스트의 정화 작업을 진행했으며, 이를 통해 더욱 정확하고 통일된 형태의 불가타가 확립되었습니다.
1546년 트리덴틴 공의회에서 불가타 성경이 "진정한(authentic) 번역본"으로 공식 선언된 것은 제롬의 학문적 노력이 최종적으로 교회의 권위를 얻은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 인정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우려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불가타의 라틴어 텍스트가 교리와 도덕의 문제에서 오류가 없다고 선언했을 뿐, 모든 번역상의 세부 사항이 완벽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교회는 지속적으로 원어 연구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번역과 해석에서 교회 전통과 교도권의 지침을 따를 것을 강조했습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본 논쟁의 의의
아우구스티누스와 제롬의 논쟁은 현대 성경학의 두 축인 역사비평적 방법론과 교회적 해석학 사이의 긴장을 미리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헌장"(Dei Verbum)은 이 두 접근법의 조화를 추구했습니다. 공의회는 성경이 하느님과 인간의 공동 저작물이므로, 인간 저자들의 의도와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과학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인정했습니다. 동시에 성경의 완전한 의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만 드러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1993년 교황청 성서위원회의 문헌 "교회 안에서 성경의 해석"은 더욱 구체적으로 역사비평적 방법론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를 지적했습니다. 이 문헌은 제롬이 추구한 원어 연구와 역사적 맥락 파악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아우구스티누스가 강조한 교회 공동체적 차원의 해석도 필수적임을 밝혔습니다. 현대 가톨릭교회는 두 교부의 논쟁을 통해 성경 연구에서 학문적 엄밀성과 신앙적 수용성이 모두 필요함을 배우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이 단순히 고대의 문헌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신앙적 확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후세에 미친 영향과 현대적 함의
두 교부의 번역 논쟁은 서방 그리스도교 전통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권위론적 접근과 제롬의 학문적 방법론을 모두 계승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성경 해석의 네 가지 의미(문자적, 비유적, 도덕적, 신비적)를 제시하면서, 문자적 의미의 정확한 파악을 위해서는 원어 연구가 필요하다고 인정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성경의 영적 의미는 교회의 전통과 교도권을 통해서만 올바로 드러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균형잡힌 접근은 가톨릭 성경학의 기본 원칙이 되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두 교부의 논쟁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은 제롬의 "히브리어 진리" 개념을 받아들여 원어 성경의 권위를 강조했습니다. 루터는 불가타보다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전을 번역의 기초로 삼았으며, 이는 각국 언어 성경 번역 운동의 확산으로 이어졌습니다. 반면 가톨릭교회는 트리덴틴 공의회를 통해 불가타의 권위를 재확인하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가 강조한 교회 공동체적 해석의 중요성을 더욱 명확히 했습니다. 이러한 대조는 그리스도교 내부의 성경관 차이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지만, 동시에 각각의 전통이 추구하는 가치를 더욱 분명히 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오늘날 에큐메니컬 시대에 두 교부의 논쟁은 새로운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공동 성경 번역 사업에 참여하면서, 학문적 정확성과 교회적 수용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방안이 모색되고 있습니다. 현대의 성경 번역자들은 제롬의 원어 연구 정신과 아우구스티누스의 공동체적 관심을 모두 계승하여, 정확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번역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양한 문화적 맥락에서 성경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두 교부가 제기한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가 다시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및 참고사이트
- 아우구스티누스, 『서신집』(Epistulae), 가톨릭출판사 번역
- 히에로니무스, 『서신집과 불가타 서문』, 분도출판사, 2019
- 교황청 성서위원회, 『교회 안에서 성경의 해석』, 1993
- 제2차 바티칸공의회,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헌장』(Dei Verbum), 1965
- 앙리 드 뤼박, 『중세의 성경 해석학』, 분도출판사, 2010
- 이형우, 『초기 교회 성경학 연구』,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20
- 정양모, 『교부들과 성경』, 성바오로출판사, 2015
- 마르틴 슈탈만, 『히에로니무스와 불가타』, 한들출판사, 2018
- 바티칸 공식 홈페이지: www.vatican.va
- 교부 문헌 디지털 라이브러리: www.patristique.org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www.cbck.or.kr
- 성서공회: www.bskore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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