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한국 천주교회의 두 번째 교구장이었던 로랑 마리 조셉 앵베르 주교님 이야기를 풀어 볼게요. 한국 이름은 범세형이고, 세례명은 라우렌시오입니다.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실 수도 있는데, 1839년 기해박해라는 큰 시련 속에서 신자들 곁을 끝까지 지킨 분이라서 한국 교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어요. 세계사의 흐름과 함께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1. 조선교구의 설정과 파리외방전교회
앞서 주문모 신부님이 순교한 뒤 조선 교회는 약 30년 넘게 사제 없이 버텨야 했습니다. 신자들은 베이징 교구에 거듭 편지를 보내 사제를 보내 달라고 간청했어요. 그 간절함이 로마에 닿아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께서 조선을 독립된 교구로 세우셨고, 선교는 프랑스의 파리외방전교회가 맡게 됩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아시아 선교를 위해 세워진 단체로, 베트남과 태국 등에서도 활동하던 곳이에요.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님은 조선으로 향하던 길에 1835년 중국 북부에서 선종하셨습니다. 그 뒤를 이어 모방 신부님이 1836년 먼저 조선에 들어왔고, 앵베르 주교님이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됩니다. 19세기 전반 유럽에서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 이후 선교 열기가 다시 살아나던 때였고, 이런 세계 교회의 흐름이 조선 선교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어요.
2. 앵베르 주교의 입국과 사목
앵베르 주교님은 1796년 프랑스 남부 마리냥 출신이에요. 사제가 된 뒤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선교를 준비했고, 1837년 말 압록강 쪽 국경을 넘어 조선에 몰래 들어왔습니다. 당시 조선은 외국인 입국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자들의 도움으로 밤길을 걸으며 한양까지 오는 위험한 여정이었어요.
입국 후 주교님은 서울에 머물며 조선 말을 익히고 신자 공동체를 체계적으로 정비했습니다. 모방 신부님과 샤스탕 신부님이 지방 사목을 맡았고, 정하상 바오로 같은 평신도 지도자들이 곁에서 도왔어요. 이 시기 신자 수는 약 9천 명에 이르렀다고 전해집니다. 또 신학생 후보를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는데, 그중 한 명이 훗날 한국인 첫 사제가 되는 김대건 안드레아입니다.
3. 기해박해와 목자의 선택
평온은 길지 않았습니다. 1839년 헌종 때 정치 세력 간의 다툼이 얽히면서 기해박해가 일어났어요. 천주교 신자는 곧 국가 질서를 해치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서울과 지방에서 체포가 이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하상, 유진길 같은 평신도 지도자와 많은 여성 신자들이 순교했어요.
박해가 거세지자 한 배교자가 외국인 사제들의 거처를 밀고했고, 관아는 신부님들을 찾는 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앵베르 주교님은 도망갈 수도 있었지만, 더 많은 신자들이 고통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관아에 나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두 신부님께도 자수를 권하는 편지를 보냈어요.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는 복음 말씀을 그대로 따른 결정이었습니다.
4. 새남터의 순교와 그 이후
세 분의 선교사는 모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앵베르 주교님은 당시 43세였어요. 이후 조선 교회는 다시 사제 없는 시기를 맞았지만, 살아남은 신자들은 신앙을 이어 갔습니다. 순교 이야기는 기록으로 정리되어 훗날 시복과 시성 과정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어요.
앵베르 주교님은 1925년 복자품에 오르셨고, 1984년 서울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집전한 시성식에서 한국 순교 성인 103위 가운데 한 분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 진출이 가속화되던 시기에 종교가 외교와 정치 문제로 오해받아 충돌한 사례이기도 해요. 하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이방 땅의 신자들과 끝까지 함께한 목자의 이야기입니다.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이 되신다면 서울 새남터 순교성지나 절두산 순교성지를 한번 찾아가 보세요. 역사 책에서 읽던 이름들이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질 거예요.
앵베르 주교와 한국 교회 연표
| 연도 | 주요 사건 |
|---|---|
| 1796년 | 앵베르, 프랑스 마리냥에서 출생 |
| 1801년 | 신유박해, 주문모 신부 순교 |
| 1831년 | 교황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설정 및 파리외방전교회에 선교 위임 |
| 1835년 |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조선 입국 전 중국에서 선종 |
| 1836년 | 모방 신부 입국, 김대건 등 신학생 후보 선발 |
| 1837년 | 앵베르 주교 조선 입국, 제2대 조선교구장으로 사목 시작 |
| 1839년 | 기해박해 발생, 정하상·유진길 등 순교 |
| 1839년 9월 21일 |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 새남터에서 순교 |
| 1925년 | 앵베르 주교 복자품에 오름 |
| 1984년 | 서울에서 한국 순교 성인 103위 시성, 앵베르 주교 포함 |
참고문헌 및 참고 사이트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cbck.or.kr), 한국 순교자 관련 자료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앵베르·기해박해 항목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contents.history.go.kr), 천주교 박해 관련 항목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편, 『한국 가톨릭 대사전』
- 샤를르 달레 저, 『한국천주교회사』
※ 본 글은 위 자료를 참고하여 직접 재구성한 글이며, 연도와 세부 내용은 자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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