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세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어난 한 가지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바로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이 헬라어(그리스어)로 번역되는 대역사가 벌어진 것이죠. 이 번역본이 바로 우리가 '70인역' 또는 '셉투아긴타(Septuaginta)'라고 부르는 성경입니다. 단순한 언어 번역을 넘어서 세계사와 기독교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이 사건의 배경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과 헬레니즘 시대의 개막
70인역이 탄생하게 된 근본적인 배경을 이해하려면 먼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기원전 334년부터 시작된 알렉산더의 정복전쟁은 단순히 영토를 넓히는 것을 넘어서 그리스 문화를 동방 전체에 퍼뜨리는 결과를 가져왔어요. 그가 기원전 323년에 사망한 후, 그의 거대한 제국은 여러 후계자들에 의해 분할되었지만, 헬레니즘 문화의 확산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집트를 차지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알렉산드리아를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어냈죠.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코이네 헬라어'의 등장이었습니다. 코이네는 '공통의'라는 뜻으로, 지중해 전역에서 상업과 학문의 공용어 역할을 했어요. 마치 오늘날의 영어처럼 말이죠. 유대인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바빌론 포로기 이후 이미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인들)가 지중해 각지에 정착했는데, 헬레니즘 시대가 되면서 이들은 점점 헬라어를 일상어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에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어요. 이들은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리며 헬레니즘 문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죠. 2세대, 3세대로 넘어가면서 히브리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 유대인들이 늘어났던 거예요. 회당에서 토라를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으니까요.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70인역의 직접적인 탄생 배경에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기원전 285-246년 재위)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건설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더욱 확장하고 발전시켰어요.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세계 최대의 지식 저장소였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세계 각지의 모든 지식을 수집하고 보존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죠.
전설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엘르아살에게 편지를 보내어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할 학자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12지파에서 각각 6명씩, 총 72명의 학자가 파견되었고, 이들이 72일 만에 번역을 완성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이런 전설적인 이야기보다는 실제적인 필요에 의해 번역이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가 점점 커지면서 그들의 종교생활을 위해 헬라어 성경이 절실히 필요했던 거죠. 또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집트 내 다양한 민족들을 통치하면서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존중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유대교도 그 대상 중 하나였습니다.
번역 작업은 기원전 3세기 중반경부터 시작되어 약 150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번역된 것은 토라(모세오경)였고, 이후 예언서와 성문서가 차례로 번역되었어요. 이 과정에서 단순한 언어 번역을 넘어서 문화적 번역이 이루어졌습니다. 히브리어의 미묘한 뉘앙스들을 헬라어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유대교의 독특한 개념들을 헬레니즘 세계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가 큰 과제였죠.
번역의 도전과 혁신
70인역 번역자들이 직면한 가장 큰 도전 중 하나는 하느님의 이름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인 '야훼(YHWH)'를 헬라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말이죠. 결국 그들은 '키리오스(Kyrios)', 즉 '주님'이라는 단어로 번역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선택은 후에 신약성경과 초기 기독교 신학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또 다른 혁신적인 부분은 히브리어에는 없는 헬라어의 철학적 개념들을 도입한 것이었어요.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에서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신다는 내용을 번역할 때, 헬라어의 '로고스(말씀)'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번역을 넘어서 유대교 신학과 헬레니즘 철학 사이의 대화를 가능하게 만든 중요한 시도였죠. 후에 요한복음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유명한 구절도 이런 번역 전통 위에서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70인역은 또한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과는 다른 독특한 특징들을 보여줍니다. 일부 본문에서는 더 상세한 설명을 추가하거나, 때로는 히브리어 원문과 다른 해석을 제시하기도 했어요. 이는 번역자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언어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당시 헬레니즘 세계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치 오늘날의 의역성경들처럼 말이죠.
세계사에 미친 거대한 영향
70인역의 완성은 단순히 한 종교 경전의 번역을 넘어서 세계사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왔습니다. 가장 직접적인 영향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종교생활이 안정화되었다는 점이에요. 이들은 이제 자신들의 언어로 성경을 읽고 연구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알렉산드리아의 필론과 같은 걸출한 유대교 철학자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도 70인역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70인역의 진짜 역사적 의미는 초기 기독교의 탄생과 확산에서 찾을 수 있어요.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대부분 70인역을 사용했습니다.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는 거의 예외 없이 70인역의 번역을 따랐죠. 만약 70인역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헬레니즘 세계로의 전파도 훨씬 어려웠을 거고요.
특히 사도 바오로의 이방인 선교에서 70인역의 역할은 결정적이었습니다. 그가 소아시아와 그리스, 로마 각지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 청중들은 이미 70인역을 통해 구약성경에 친숙해져 있었어요. 바오로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70인역에서 예언된 메시아라고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헬라어 구약성경이 없었다면 초기 기독교의 급속한 확산은 상상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후대에 이어진 영향과 유산
70인역의 영향은 고대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동방정교회는 지금도 70인역을 정경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또한 라틴어 불가타 성경을 번역한 성 예로니모도 70인역을 중요한 참고 자료로 활용했습니다. 결국 서방 가톨릭교회의 전통에도 70인역의 영향이 스며들어 있는 거죠.
종교개혁 시대에는 또 다른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개신교 개혁자들은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지만, 가톨릭교회는 70인역과 불가타의 전통을 지키려 했어요. 트렌트 공의회에서는 불가타를 공식 성경으로 선언하면서 간접적으로 70인역의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이런 전통은 오늘날 가톨릭교회의 성경관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현대 성경학에서도 70인역은 중요한 연구 대상입니다. 사해 사본의 발견으로 기원전 3세기경의 히브리어 본문들이 공개되면서, 70인역 번역자들이 사용한 히브리어 본문이 지금의 마소라 본문과는 다른 전승을 따르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거든요. 이는 구약성경 본문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번역본이 아니라 고대 성경 본문을 연구하는 핵심 자료인 셈이죠.
시대를 초월한 메시지
70인역의 탄생 과정을 되돌아보면 참으로 놀라운 통찰을 얻게 됩니다.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가 만났을 때, 갈등과 대립이 아니라 더 풍성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해졌다는 것이에요. 히브리어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되면서 잃어버린 것도 있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차원의 의미들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다문화 시대에도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어요.
또한 70인역의 역사는 진리가 어떻게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서 전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기원전 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학자들이 시작한 번역 작업이 2천 년이 넘는 시간을 거쳐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정말 경이로운 일이죠. 그들은 단순히 언어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작업했을 것입니다.
결국 70인역의 탄생은 수많은 시련과 도전을 이겨낸 세계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바빌론 포로기의 아픔, 헬레니즘 문화의 충격, 디아스포라의 정체성 혼란 등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의 본질을 지키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대에 맞는 형태로 발전시켜 나간 것입니다. 이런 정신은 오늘날 급변하는 세상에서 신앙을 지켜나가려는 우리들에게도 큰 격려와 지혜를 주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 연대표
연도 | 사건 | 배경 및 의미 |
---|---|---|
기원전 334-323년 |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 | 헬레니즘 문화의 동방 확산, 코이네 헬라어 보급 |
기원전 323년 | 알렉산더 대왕 사망, 제국 분할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이집트 통치 시작 |
기원전 305년 | 프톨레마이오스 1세 즉위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건설 시작 |
기원전 285-246년 |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 재위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전성기, 학문 발전 |
기원전 280-250년 | 70인역 번역 시작 (토라) | 히브리어 모세오경의 헬라어 번역 완성 |
기원전 250-150년 | 70인역 전체 완성 | 예언서와 성문서까지 전체 구약성경 번역 완료 |
기원전 168년 | 안티오쿠스 4세의 유대교 탄압 | 마카베오 반란의 원인, 종교적 정체성 강화 |
기원후 30년경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 초기 기독교 공동체 형성 |
기원후 50-60년 | 사도 바오로의 이방인 선교 | 70인역을 활용한 복음 전파 |
기원후 70년 | 예루살렘 성전 파괴 | 유대교 중심지 상실, 디아스포라 본격화 |
기원후 50-100년 | 신약성경 저작 | 70인역을 기반으로 한 구약 인용 |
기원후 382-405년 | 성 예로니모의 불가타 번역 | 70인역 참고하여 라틴어 성경 완성 |
'2. 성경과 번역의 역사 > 라틴어 불가타, 70인역, 초기 성경 전승'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 라틴어 – 초기 성경 언어의 네 가지 축 (0) | 2025.09.07 |
---|---|
콘스탄틴 대제와 성경 보급의 역사적 의미 (0) | 2025.09.06 |
유대교와 기독교 성경 전승의 차이: 수많은 시련을 이겨낸 신앙 전통의 분화 (0) | 2025.09.05 |